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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0 [다시 읽는 명시 4] 정현종_ 소리의 심연

소리의 심연


정현종


1. 귀를 그리워하는 소리

나는 소리의 껍질을 벗긴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랑이 깊은 귀를 아는 소리는
도둑처럼 그 귀를 떼어가서
소리 자신의 귀를 급히 만든다
소리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붙인다
내 떨리는 전신을 그의 귀로 삼는 소리들
모든 소리의 핵 속에 들어 있는 죽음
모든 소리는 소리 자신의 귀를 그리워한다.

2. 명랑한 남자

나는 아 어쩌면 이렇게 명랑한가?
낮이 밤 속으로 태양색의 꼬리를 감추기까지
해님이 걸어가는 방식을 아시나요?
어찔 명랑, 뒤뚱 명랑
정오의 목을 조르기 위해
밥의 바다, 찌개의 바다로 나아가고
그러나 일용할 양식 이외의 양식은 버리며
그러나 일용할 즐거움과 야합하며
그러나 자기의 날개에 더욱 못을 치기 위해
발의 해머, 웃음의 해머, 눈물의 해머를
동원한다. 어찔 명랑……

대낮이 만드는 청명한 공기의 계단을
물론 오르내릴 수 있지만
아시나요 모든 소리가 다 외로워하고 있어요
가령 슬픔에 찬 저 바람의 푸른 눈이
내가 끌어안고 쩔쩔매는 바람 소리를 보네요

3. 소리의 구멍

남자의 몸이 사라지고 문득
몸 형상의 구멍이 빈다
여자의 몸이 사라지고
여자의 몸 형상으로 공기가 잘린다
그들의 소리가 지나간 만큼의
구멍이 공기 속에 뚫려 있다
나의 바깥으로 열린 감각들은 모두 닫혀 있다

공기를 뚫고 지나간 소리의 구멍의 유혹
소리를 통해서 형상이 남는 방식
소리가 남는 쓸쓸한 방식
소리를 잊을 수 없기 위하여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우면 좋다
어둠 속에서 들린 소리의 구멍은
어둠이 묻지 않은 공기의 구멍보다
더 뚜렷하고 더 아프기 때문에.
(소리의 주인들인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랑과 울음으로 뭉쳐 어디로 갔을까)

4. 침묵

나는 피에 젖어 쓰러져 있는
한 무더기의 고요를 본다
고요는 한때 빛이었고 고요 자신이었고
침묵의 사랑하는 전우였다
나는 피에 젖어 쓰러져 있는
한 떼의 침묵을 본다
말은 침묵의 꼬리를
침묵은 말의 꼬리를 물고 서로
기회를 노리고 있다
죽도록 원수처럼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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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잠자던
감각이 서서히 찬바람을 맞고 일어선다.
귀를 그리워하는 소리들이 아우성대다가
침묵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감각의 향로(向路)들이
빈 속의 찬소주처럼 몸속으로 싸하게 들어오는 가을이다.(記. 이재훈 시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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