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무모(無毛)한 생활에선 이미 잊힌 지 오랜 들꽃이 많다.
더욱이 이렇게 숱한 풀벌레 울어 예는 서녘 벌에
한 알의 원숙한 과물(果物)과도 같은 붉은 낙일을 형벌처럼 등에 하고
홀로 바람의 외진 들길을 걸어 보면
이젠 자꾸만 모진 돌 틈에 비벼 피는 풀꽃들의 생각밖엔 없다.
멀리 멀리 흘러가는 구름 포기
그 구름 포기 하나 떠오름이 없다.
Ⅱ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풀밭엔 꽃잎사귀,
과일 밭엔 나뭇잎들,
이젠 모든 것이 스스로의 무게로만 떨어져 오는
산과 들이 이렇게 무풍(無風)하고 보면
아, 그렇게 푸르기만 하던 하늘, 푸르기만 하던 바다, 그보다도 젊음이란 더욱 더 답답하던 것,
한 없이 더워 있다. 한없이 식어 가는
피 비린 종언(終焉)처럼
나는 오늘 하루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Ⅲ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無形)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다오,
저 이름 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 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 시_ 박성룡 -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으며, 1956년 《문학예술》에 「화병전경」등이 추천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춘하추동』『동백꽃』, 『휘파람새』, 『꽃상여』, 『고향은 땅끝』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송_ 이재훈 - 1972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현대시》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있음.
◆ 출전_ 『풀잎』(창비)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김태형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로 시작하는 시를 기억하실 거예요. 시인 박성룡을 저는 ‘풀잎의 시인’이라 기억합니다. 풀잎 풀잎 자꾸 부르면 우리 몸과 마음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된다고 하던…… 풀이 아니라 풀잎! 그리고 여기, 그 청신한 풀잎의 감각을 ‘풋물 같은 것’으로 펼쳐 놓고 우리 몸 어딘가 작은 일부라도 풋물에 적셔두고 살자는 ‘풀잎 마음’을 전합니다. 동시처럼 해맑은 시 「풀잎」의 어른 버전, 혹은 클래식 버전이라고 할까요. 시는 기본적으로 아날로그의 영혼을 가진 장르입니다만, 오래된 시인들이 보여주는 고품격 아날로그의 타전에 숙연해지는 때 많습니다. ‘모진 돌 틈에 비벼 피는 풀꽃’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나를 흔들어주는 바람에 감사합니다. 그래요 우리, 흔들리면서,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몫이 그러하듯이. 교외― 그 푸른 틈처럼.
문학집배원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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