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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01 이명연_ 자재에의 욕망

자재(自在)에의 욕망

 

 

이명연

 

 

1. 시작 - 자재에의 욕망?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의 말이다. 하이데거의 할아버지쯤 되는 니체에게는 매우 익숙했을 이 전복적인 문장의 의미는 (인간) 존재가 언어를 통해 존재가 된다는, 존재가 언어로 인해 존재로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이 놀라운 정의는 그러나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 이와 비슷한 말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요한복음 1장 1절).”라는 말이다. 이 말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존재는 말씀 이후에, 말씀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무려나, 언저가 존재를 앞서는 것이라 했을 때, 언어가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했을 때,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에 갇힌 수인(囚人)의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자연이 아닌, 인공 아니, 언공(言工)으로서의 존재는 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길 욕망한다. 욕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재훈의 시 제목이기도 하고 마네의 그림 제목이기도 한 <올랭피아>의 하녀처럼, 그 하녀가 빼앗기지 않았으면 하는 ‘내 꽃’인 자유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존재성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기에.
헌데 욕망이란 무엇인가? 지라르나 라깡이 지적하듯, 나의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내 욕망의 대상의 욕망이며, 대차자의 욕망일 뿐이다. 즉 그것은 중계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만의 것, 나의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무엇이 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욕망이건 욕망의 대상이건, 언어화될 수 없는 것들은 욕망이,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은 언어, 정확히는 금지와 금지의 수용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로서의 나(라깡)와 그러한 주체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나(지라르)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결국 언어로부터 탄생한 욕망, 언어로써 말해질 수 있는 욕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에의 욕망은 불가능한 욕망일 뿐이며, ‘자재에의 욕망’이란 말은 불가능한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자유자애(自由自在)의 준말이라도 볼 수 있"는 자재라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는 상태, ’시공을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을 이르는 말(이명권, <예수 석가를 만나다>, 코나루스, 2006. 34쪽)인데, 우리는 언어의 구속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욕망을 이룰 수 없는 존재, 이 자재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욕망을 포기해야 할까? 자재의 존재로서의 나, 자유롱ㄴ 존재로서의 나에의 욕망을 우리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시는 고개를 젓는다.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3. 진실을 바라보라 - 이재훈의 경우

삶과 세계의 진실을 바라본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자재의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첫 단계라는 점에서 더 없이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뼈아픈 일인 이유는 우리의 삶과 세계가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것이 자재로서의 존재의 첫 단계인 이유는 그것, 곧 삶과 세계의 아름답지만은 않은 진실을 알아야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렷한 밤이었지. 무수히 낭비한 말들을 끌어안고 그 성(城)을 찾았어. 어지럽게 나선형 계단을 올랐지. 두렵지는 않았어. 사람의 눈은 아름다운 무늬만을 본다지. 내가 만난 이의 꿈꾸는 눈빛. 정물처럼 수놓아진 가슴에 꽃잎이 화르르 번졌어. 촛불 사이로 흐르던 눈물과 기도. 가슴으로 잇는 하나의 다리를 오래오래 건넜어. 숨찬 시간이 흘렀지. 붉은 꽃이 만발한 오솔길도 아니었어. 구름과 어우러지는 파란 하늘과 흰 등대로 아니었어. 안개 자욱한 길 끝에, 스스로 몸을 비튼 고행의 소나무들이 가득했어. 사는 것의 원리도 모른 채, 그 캄캄한 숲에 발을 디뎠지. 성 안은 온통 어두웠지만, 따뜻하고 행복했어. 해가 뜨면 오로지 명령만 귀에 가득했지. 애벌레처럼 꿈틀대다 안식향을 피워.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지. 내 몸은 이 땅에 저당잡혀 있어. 말끔한 이미지의 감옥 속으로 나는 들어가지.

위 시, <하얀 성>에서 화자는 ‘무수히 낭비한 말들을 끌어안고’ 성을 찾는다. ‘또렷한 밤’이라는 시어에서 알 수 있듯, 무수히 낭비한 말들은 낮 동안의 말들이다. 이 낮 동안의 말들이 낭비인 이유는 내가 저당잡혀 있는 이 땅이 ‘이미지의 감옥’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이미지의 감옥 속에서의 말들은 낭비된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밤은 또렷하다는 점에서 실체의 세계라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스스로 몸을 비튼 고행의 소나무들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하여 뼈아픈 공간이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이 된다. 더구나 극 오간은 ‘명령’이 없기에 자유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공간은 실재하는 공간이기보다는 오인의 공간, 꿈의 공간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곳은 화자가 보소 싶어하는 ‘아름다운 무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때, 성은, 하얀 성은 화자가 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무늬일 뿐이며, 내 몸이 저당잡혀 있는 세계는 명령만 가득한 이미지의 감옥, 안식향을 피워야만 하는 공간이 된다. 전자가 꿈의 세계라면, 후자는 몸이 살아내는 현실의 세계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사는 곳은, 살 수밖에 없는 곳은 후자라는 점에서 하얀 성은 오이느이 공간, 꿈의 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이 공간 역시 이미지의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감옥에서의 시 혹은 시 쓰기는 어떠한가?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를 쓴다.
예술가들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머리에 뿔을 단다. 광대의 옷을 입는다.
거친 발걸음으로 거리에 나가 거죽을 벗긴
날짐승을 전시한다.
대중은 환호하고, 예술은 진지하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고독한 오만으로 공허한 시를 쓴다.
재주 좋은 시인은
높은 나무에 올라 나뭇잎의 형상을 그린다.
시든 나뭇가지의 슬픔을 노래한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사로잡힌 유니콘의 뿔에 대해.
사랑하는 말발굽 소리에 대해.
문명인의 실험에 훼손당한 별의 슬픔에 대해.
스삭스삭 재킷의 말로 쓴다.
실상 외투는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
올올이 풀려나온다.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
잠자는 숲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재킷을 태우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태어날텐데.
재킷의 재가 나무에 뿌려져
울창한 숲이 되면,
앙상한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길텐데.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너무 추워 재킷을 꼭 껴입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재킷, 재킷 말을 건다.

- <재킷을 입은 시인>


위 시는 <재킷을 입은 시인>이다. 아베 고보의 소설 <시인의 생애>를 시로 다시 쓴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위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이미지로 만든다. 그들은 대중의 환호에 진지한 척 하지만, 공허한 시를 쓸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시에는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생애>에서 재킷은 어머니의 노동이자 어머니의 육체였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가 없는 시란 노동과 그 노동의 지옥과 그 노동을 하는 육체가 없는 시를 말하고, 이는 역으로 노동과 노동의 지옥과 노동을 하는 육체가 담겨 있을 때 시는 가득 찬 세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노동과 어머니의 노동의 지옥과 어머니의 육체로서의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는 것은 제스처일 뿐이며, 이 제스처를 버릴 때, 이 재킷을 태워버리고 내가 시를 쓸 때, 그 시는 ‘가장 아름다운’ 시, 가득 찬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 시에서 시인은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태워버리지 못하고 공허한 시, 제스처의 시만을 쓸 수밖에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하는 공허한 말 걸기일 뿐이다. 시인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재킷을 벗기에 이 세계는 너무 춥기 때문이다. 재킷은 이렇게 볼 때, 화자인 시인을 자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공허한 삶과 육체가 기댈 수밖에 없는 무엇이면서 동시에 시인이 어머니의 것이 아닌 시인의 것으로서 가져야 할 무엇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어머니의 재킷을 태워버리고 자신의 재킷을 가질 수 없다. 추위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추위는 무엇일까? ‘공상을 허락하지 않(<만>)’는 시대로서의 추위일까? 그럴 것도 같다. 그럴 것도 같지만, 그것으로는 재킷이 지난 무게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일가. 추위의 정체는.


얼굴 없는 안개의 밤,
죽음의 그림자를 막연하게 살피던 밤,
한밤 내 웃었다.


<만(灣)>의 일부이다. 위 시를 통해 우리는 추위의 온전한 정체와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만’이라는 제목은 이 시의 모티프인 천연두 자국과의 형태적 유사성과 배꼽과의 의미론적 유사성(만은 육지의 배꼽이라 할 수 있다)을 담고 있는 은유이다. 위 시의 화자는 어릴 적 천연두를 앓으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한밤 내 웃는다. 이때의 웃음은 즐거운 웃음이라기보다는 죽음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안 자의 페이소스가 담긴 웃음이라 할 수 있다. 천연두 자국과 유사성을 지닌 만으로부터 그 만에서 연상되는 배꼽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재생되는 이 웃음은 삶의 두려운 진실을 상기하게 하고, <재킷을 입은 시인>의 시인으로 하여금 어머니인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배교의 고백 혹은 돌아온 탕아의 ‘연대기’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시들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시인으로서의 화자는 ‘난삽한 사랑(<할례의 연대기>)’의 삶을 살고,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귀신과 도둑>)’하는, ‘호명을 두려워(기억의 기술>)’하는 존재의 삶을 산다. 이는 <재킷을 입은 시인>에 표현된 ‘고독한 오만’이라 할 수 있다. 고독하기에 호명을 두려워하고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며, 오만하기에 난삽한 사랑만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오만은 ‘유디트의 강한 팔에 붙들려/ 목이 잘리는 환상이 가장 즐거울 때도 있었다.(<기억의 기술>)’는 진술이나 ‘그러나 나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랑이 완성(<만신전>)’된다는 진술까지 가능케 한다. 이러한 고독과 오만은 재킷의 시인의 한계이자 삶 옆에 죽음을 달고 사는 인간 존재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본다는 것, 이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지로서의 세계와 삶이 아닌 실체로서의 세계(인간이 만든 것으로서의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것,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앎은 ‘세상과 더불어 있’는 존재로서의 자재를 가능케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독한 오만을 안다는 것은 그 고독한 오만을 벗어나 죽음이라는 진실과 함께 삶의 진실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돌 위에 앉아 있으면
저 바닥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
엉덩이가 뜨끈했다.
숭고한 소리들이 돌 속으로 몰려갔다.
피의 온기를 가진 돌.
깊은 밤 달빛은 제 몸인양 돌 속으로 푹 잠겼다.
나도 모르게 일어서 돌에 머리를 숙였다.

- <돌> 부분


<돌>의 일부이다. ‘매일 다니는 골목길에’ 있는 ‘무심코 지나쳤’던 돌에게 화자는 인사를 한다. 고독과 오만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재킷을 벗어버릴 수 없는 약한 존재, 죽음과 함께 사는 존재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그 고독과 오만을 알았을 때, 재킷의 시인은 자신이 ‘세상과 더불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이로 인해 ‘돌의 근원’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서 돌은 인간의 삶이 잃어버린 짐승의 울음과 숭고가 담겨 있는 것이자, 따뜻한 온기를 담고 있는 자재하는 존재로 변한다. 이처럼 새로운 돌, 자재하는 돌, 돌의 자재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자재를 찾아가는 또 다른 단계 혹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재의 세계란 그저 그렇게 있음, 자유롭게 있음의 존재들, 곧 자재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_ <시현실> 2008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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