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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22 도시의 얼굴_ 금동철

금동철




1. 가면, 그리고…

현대인들이 영위하는 대부분의 삶은 도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도시적인 삶의 구조 가운데, 도시적인 사고방식으로, 도시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도시 속에서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도시가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 풍요로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절대로 놓지 않을 만큼 크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온전한 평안이나 안식을 얻기에는 불가능한 것임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면서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갈망을 내면 깊숙한 곳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도시적인 삶의 방식이 지니는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속성들을 노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호에 실린 이재훈의 시들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특히 문제삼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러한 도시적 삶의 공간에 관한 시인의 시선이다. 도시라는 공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시인에게 다가오고 있는지를 시인은 보여준다. 도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느끼는 도시의 얼굴 앞에 시인은 사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다. 관계의 단편성이나 박제화된 인간관계, 끝없이 추락하는 삶들을 강요하는 도시의 모습 속에서 시인은 우울하게 떠도는 것이다. 이 시들에서 어둡고 암울한 정서가 지배하는 이유도 시인의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이러한 시인이 은연중에 드러내고자 하는 도시의 얼굴 중 하나는 가면이다.

술렁거리는 거리를 걸어간다
소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땅
스모그가 밀려오고 사방에 경적이 울리면
떨어뜨린 성냥처럼 사람들로 뒤엉킨다
르네상스 쇼핑몰 사이키 조명 아래
댄서들이 아슬한 옷을 걸친 채 춤을 춘다
사람들은 모두 가면 하나씩 쓰고 걷는다
발바닥이 쿵쿵 울린다
지하 카바레로 들어가는 입구
모자 쓴 청년은 내게 노래방에 가자고 꼬인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래전 이곳은 나무들이 울창했을 것이다
나무의 교훈으로 맨얼굴을 들이대도
부끄럽지 않은 숲
어둡고 고요한 밤, 나무들이 서로 몸 부비는
소리만 잠깐씩 들렸을 것이다
자정 녘 소음으로 숨이 막히는 시간
술에 취해 얼굴을 만져보니
이상한 가죽이 씌워져 있다
여기저기 나무들의 곡소리가 들려온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알고 보면 모두 선량한 사람들
따뜻한 방문을 열기 전 서둘러 가죽을 벗겨냈다
이곳은 新林이다
― <新林洞> 전문

가면은 자신과는 다른 모습이면서 또 다른 자신이기도 하다. 도시적인 삶이 가면을 요구하는 이유는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갖는 단편성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도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언제나 필요한 일이나 요구에 얽매이게 되고, 그것은 그 사람 전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분적인 측면만을 요구하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정과 직업과 사회가 거의 일치하는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전인격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관계 형성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만남은 언제나 그 만남에 가장 합당한 부분적인 얼굴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곧 자아에게 가면을 쓸 것을 강요하는 이유가 된다.
시인이 “사람들은 모두 가면 하나씩 쓰고 있다”고 우울한 시선으로 말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인 요구와 관련된다. 사람들은 가면에 대한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본질적인 자아와는 다른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바, 이 시가 보여주는 바가 바로 그러한 현대이들의 사람의 방식에 대한 서글픈 인식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에서, 보다 진솔한 방식의 만남을 지향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밤의 술자리까지 가면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공간이 시인에게는 “따뜻한 방문”을 여는 순간, 다시 말해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순간뿐인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도시 공간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가면의 삶과 ‘신림’이라는 지명이 불러일으키는 ‘울창했을’ 나무숲과 대조시킨다. “소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땅”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소음의 땅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것이 바로 “오래전 이곳”에 있었을 나무들의 숲이다. 시인이 그리는 오래전의 이 숲에는, 지금의 도시와 같은 “발바닥을 쿵쿵 울이는” 지하 캬바레의 소음이나 사방에서 들려오는 “숨막히는” 소음은 없었다. 단지 “어둡고 고요한 밤, 나무들이 서로 몸 부비는/소리만 잠깐씩 들렸을” 뿐인 조용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숲은 또한 “맨얼굴을 들이대도/부끄럽지 않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인이 마지막 행에서 “이곳은 新林이다”고 노래하는 이유는 그런 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신림’의 ‘新’이 의미하는 바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은 것이다. 과거의 고요하고 차분하면서도 존재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도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는 “오래전 이곳”이라는 공간과 “소음으로 숨이 막히는” 현대의 도시 공간 사이의 간극을 이 ‘新’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가면을 강요하는 현대 도시적 삶의 속석은 사람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주말의 식사>는 일 주일 동안 그렇게 만나기를 기다리는 “낯익은 그대”와의 관계의 문제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 얼마나 박제화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낯익은 그대”는 “브라운관 속 투명한 색조화장을 한 얼굴”, 다시 말해 화면 속의 얼굴이다. 이 얼굴과 창가에 놓인 “화분”의 꽃이 동일시되는 과정을 통해 자아가 사랑하는 “그대”의 실상이 드러난다.
창가의 화분에 놓인 꽃에 대한 시인의 수사는 자못 찬란하다. “감동스러운 꽃, 모든 수사에도 화려하게 어울리는 꽃, 볕 잘 드는 곳에서 햇살을 쬐고” 있는 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꽃은 자연 자체가 가진 야생의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고, “저녁 연기가 꽃모가지에 걸리면” 그냥 툭 떨어지는 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어느새 다른 사연의 꽃이 꽃병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아에게 의미있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하룻밤에 불과한 존재, 그래서 언제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꽃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브라운관을 통해 만나는 “그대”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주말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잠시 쳐다보고 마는 존재. 삶의 자리 깊은 곳까지 내려와 뿌리 내리는 만남이 아니라, “정말 그럴듯하게, 주말드라마에서”만 만나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박제화된 사랑이고 만남이기에, “꽃은 시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꽃은 당연히 시들어야 하고, 그래야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관에서 만나는 “그대”라는 꽃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 박제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현대인이 써야 하는 가면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본래적인 자아를 그대로 드러낸 채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브라운관이라는 매개를 통해 박제화된 상태로 만나는 인관관계, 도시라는 공간은 이러한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전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순간적이고 부분적인 관계만으로 형성되는 관계는, 그래서 언제나 가면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2. 허무의 밑바닥

도시적 삶의 또 한 가지 특징으로 시인이 제시하는 것은 바로 삶의 허무이다. 자연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존재의 본질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다면 부딪히지 않을 문제들을 도시적인 삶은 날마다 경험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존재의 본질까지 허물어뜨릴 파괴적인 힘들까지 존재한다.

바닥을 가지지 않은 삶도 있다
하늘 위의 독수리
그의 날개치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그냥
가볍게 그곳으로 올라가면 된다
들쥐가 썩은 뼈에 이를 갈고 있을 때
올빼미의 울음은 더 우렁차고
밤 사이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 들린다
그의 경험은 어디든 닿을 수 있다
솟구치지 못하고 바닥을 치는 마음이
비상을 꿈꿀 때
홀연히 찾아드는 어떤 소리
그러나
조용한 삶은 일찍 소멸한다
깔끔하고, 경건하게
굳어지기 전의 말랑한 영혼을
간직한 채
한 떨기 꽃대궁,
뿌리까지 잠방잠방 건너가는 물의 감촉,
그 종종거리는 발자국 소리
때론 뿌리 밑바닥까지 갔다가
제 몸 누일 자리 없어 뿌리를 빠져나와
땅 속으로 스미는 이주의 수런거림,
고통스럽다고 하지 마라
소리는 바닥이 없다
대신 소멸의 기록이 담긴
문장들이 네 몸에 새겨져 있다
- <소리무덤> 전문

도시의 삶은 끝없이 이주하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한 곳에 붙박이로 붙어 살면서 그곳을 고향으로 삼는 삶은 전근대적인 전통적 삶의 방식 중의 하나이지, 도시 공간에서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삶의 방식과는 멀다. 언제든지 직장을 따라, 집값의 추이에 따라, 생활 형편에 따라 옮겨앉아야 하는 삶이 바로 도시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끝없는 이주의 흔적들을 자신의 내면에 새겨나가는 삶, 그래서 “소멸의 기록이 담긴 무장들”을 몸에 새기고 다니는 삶이 바로 도시적인 삶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이주의 삶 중에서 시인은 “바닥을 가지지 않은” 삶을 그린다. 사람들은 언제나 비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허무하게 꿈으로만 끝나고마는, 그래서 한없이 추락하는 삶들도 많이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바 “깔끔하고, 경건하게/굳어지기 전의 말랑한 영혼을 간직한” “한 떨기 꽃대궁”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특히 “깔끔하고 경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영혼의 몰락은, 도시적 삶의 부정적 단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살아남기 위해 온갖 부정과 비리, 죄악들로 얼룩져 있는 도시적 삶 속에서, “깔끔하고 경건한 영혼”이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현실의 삶의 “뿌리 밑바닥까지 갔다가/제 몸 누일 자리 없어 뿌리를 빠져나와/땅 속으로 스미는” 데까지 이른다. 그 삶을 시인은 소리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도시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허무의 한 양상이다.
이러한 허무는 삶에서 가장 열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일상의 기원>에서 시인은 삶 전체를 던지는 사랑마저 한 순간의 ‘잠’일 뿐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들장미가 흐드러진 동산에 누워 장미를 생각하는 소녀에게 장미는 가시가 되고 독이 된다. 그 독을 즐기기까지 하면서 미소를 만들어내는 소녀의 삶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거는 사랑의 한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그저 ‘긴 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과정을 거치는 시간 자체가 단지 “주름살 하나가 늘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적인 박제화된 삶이 가져다주는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 삶이 지니고 있는 허무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일상’이라는 것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아에게 잠이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수면장에>는 사랑도 희망도 잃어버린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순간을 보여준다. 시인은 오히려 잠을 “뱀처럼 차갑다”고 표현한다. 자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으나, 시인에게 잠은 차갑게 미끌어져 나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차가운 미끄러움 앞에 사랑도 희망도 가차없이 사라진다. “페가수으와 카시오페아” 사이의 사랑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차가운 잠 앞에서는 “그리움”도 멎고 만다. 뿐만 아니라 “빈 들에서 돌베개를 찾다가/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다리를 찾다가” “여윈잠”이 들고마는 자아의 모습은 하늘을 찾고 싶은 시인의 희망마저 이 잠앞에 미끄러질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무엇일까. 각 사람들마나 그것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결코 긍정적인 것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도시가 제공하는 편리함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역으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많은 것들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시인의 표현대로 언제나 가면을 써야 하고, 숨막히는 소음에 시달려야 하며, 밑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삶을 경험하기도 하고, 잠도 잘 자지 못해 방황하기도 해야 하는 허무한 삶도 있는 것이다.
도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시인에게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도시가 가진 본질적인 특징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수준으로 우리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을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생명력이 충일한 삶, “맨얼굴”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자리를 꿈꾸는 시인의 꿈이 우리 시대에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_ <시인시각>, 2006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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