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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전(萬神殿)

시詩 2008. 2. 14. 17:39

이재훈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 가슴이 휑뎅그렁해져서 사다리를 타고 허공 위에 올라갔습니다. 십자가가 네온을 켜고 붕붕 하늘을 날아 다닙니다. 오리온을 찾으려고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보았습니다. 거인의 눈과 코와 활 오늬의 도톰한 입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도시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가슴 속에서 귀신들이 포식하고 구역질하는 소리 들립니다. 밤거리를 나서면 골목의 이곳저곳에서 토하는 소리 들립니다. 저는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는 술집을 찾아 헤맵니다. 너무 시끄러워 고독합니다. 어제 올랐던 사다리를 허방지방 오르다가 기우뚱합니다. 차라리 길 위에 몸을 던질까요. 공중으로 힘껏 차올라 활갯짓을 합니다. 귀신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몸이 터져 귀신들을 내놓으면 사람들은 변할까요. 기도의 시간도 포기할까요. 그러나 나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랑이 완성됩니다.

촛불을 집어 삼키고 가슴에 등을 켭니다. 환한 가슴으로 지나가는 개에게 절을 합니다. 허공의 사다리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걸려 있습니다. 이전 세상에서 쫓겨난 귀신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갑니다. 제 목이 점점 뻣뻣해지고 코끝이 찡해집니다. 어머니가 자꾸 저를 부르십니다. 아들아, 아들아 문 밖에 나와 목이 쉬도록 부르십니다. 칼날이 제 목젖을 지그시 누르고 천천히 들어옵니다.

_ <작가와 사회>,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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