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달콤하기만 한 문명의 정치학

 

이재훈(시인)

 

 


언제부터인가 신혜정 시인은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까다로운 그들만의 금기를 실천하고 있는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되어 있었다”라는 말로 짐작했겠지만 그 이전의 신혜정은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한때 우리의 우상이었던 시인의 말대로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마음보다 몸으로부터 먼저 오는 허무를 그저 받아들였을 것이다. 시인은 살기 위해 몸이 반응하는 솔직함에 더욱 충실했고, 자신의 영혼과 몸에 대한 신념을 보란듯이 지켜나갔다. 그렇게 신혜정은 몸이 반응하는 사유의 길목을 서성거리며 시의 언어를 타진해왔다. 침묵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그녀의 첫 시집은 반문명과 반육식의 외침이 가득한 의분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
현대문명은 음험한 음모를 거느리고 광장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다. 그 질서는 곧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들의 음모에 의해 조종되어진다. 눈에 뻔히 보이는 모종의 담합들이 위정자들의 가난한 머릿속에서 실현되어질 때 우리는 그 공분(公憤)을 억누를 수 없게 된다. 최근 들어 자주 제기된 문학과 정치와의 상보적 관계는, 문학의 역할과 창작자들의 태도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하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신혜정은 이번 시집을 통해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했다. 그러나 신혜정의 시를 단지 작금의 유행처럼 번지는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진단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혜정은 일찍부터 몸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실현해왔기 때문이다. 즉 신혜정의 몸은 사유의 또다른 기관뿐 아니라, 가장 일차적인 육체로서의 몸에 대한 깊은 탐색을 수행해 왔다.
신혜정은 현란한 이미지의 수사를 버리고 자신이 넘나드는 사유의 징검돌을 직접화법의 언어로 성큼성큼 넘는다. 신혜정의 기억술은 공동체적 서사 속에서 희구하는 갈망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선험적으로 감응한 원시적 서사이다. 그렇기에 신혜정의 육체는 문명에 접속한 기계적 감각의 플러그를 빼버리고, 넓은 초원과 대지에 기댄 육신의 기억을 갈망한다. 이것은 많은 시인들이 갈망하고 응시하는 공동선(共同善)의 기저이지만, 신혜정은 원시적 몸의 감각을 이 시간 속에 재소환하여 생태적 정치성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신혜정이 기억하고 있는 육체의 기억은, 문명과 생태의 정치성을 소요하듯 사유하여 이끌어낸 보편적 기억이다. 시에서 자주 보이는 “깍두기와 국물이 뒤섞인 입 속을 왔다갔다”(<숟가락들의 점심식사>)하는 숟가락의 풍경들처럼, 역겹고 느끼하며 불결한 현대사회의 동굴을 탐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의 풍경인 것이다. 신혜정은 자본문명의 일상성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매일 반복하고 있는 음식문화에서부터 찾는다. “21세기 식탁혁명”은 육식을 탐하는 미각뿐 아니라, “엉덩이가 예쁜 아가씨를 보면 따라가고 싶은” 육욕의 욕망에까지 다다른다고 말한다.(<21세기 식탁혁명>) 그러면 우리가 가장 즐겨먹는 라면은 어떠할까. 신혜정이 말하는 ‘라면의 정치학’은 이 시대 문명 진단의 집합소이다.

현대는 엑기스의 시대다
정보의 집합체에 접근하기
혹은 접근 금지의 아고라에 모여들기
농축이 아닌 것들은 천대 받는 시대

젊음은 치기라는 농축 엑기스의 집합체로
술을 마셔도
연애를 해도
미친 듯이,
미칠 듯이
객체와 영혼의 융화를 이루어내는

라면은 현대 식문화의 집대성으로
영양학자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 만들어내는
정치적인 이슈는 스프 속에 감춰진 비밀 레시피
소고기맛 베이스
지미강화육수분말
육개장양념분말
햄맛분말
향미증진제
돈골엑기스……
엄청난 살육의 엑기스를 분말로 만들어내는
물리학의 기적

팔팔 달아오른 냄비는 뜨거운 욕망을 탄생시키고
한 번의 사용을 위해 가지런히 포장된 비닐봉지는
원 나잇 스탠딩
구깃구깃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부패되지 않는 것들을 양산하는 현대의 문명은
한 끼 식사에 30분을 소비하지 않는다
- <라면의 정치학> 부분

현대 문명사회는 가공할만한 엑기스의 시대다. 위의 시는 음모를 꾸미는 배후들로 믹싱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한 데 모아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문명의 제조법을 소개하고 있다. 라면은 20세기 최고의 음식 발명품이다.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최고의 인스턴트 식품이다. 시인은 이 식품의 “비밀 레시피”를 세세히 들려준다. 라면의 레시피는 배후를 가지고 있다. 라면은 빨리 먹어야 하는 음식이다. 늦게 먹으면 불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에서 속도는 새로운 재화를 대량생산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다. 또한 스프의 제조 이면에는 “엄청난 살육의 엑기스”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배후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영양학자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얽혀진 “현대 식문화의 집대성”인 라면은 그 사용법에 있어서도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냄비가 발열해내는 “뜨거운 욕망”과 썩지 않는 비닐봉지는 “원나잇 스탠딩”이며 한 끼 식사시간은 아주 짧다. 결국 라면의 정치학은 속도와 인공의 것들을 가공한 최대의 집합소이며, 이는 우리 현대 물질문명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애초에 시인은 내면의 힘든 시간을 힘들다고 말하기 싫었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절망이 사회적 희망까지 막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인은 사회의 불합리한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실상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다.

살상무기를 제조하는 자들이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상한 시대

용산 미군기지 안을 보면 이해가 간다

그곳은 평화의 눈

모든 평화의 중심에 핀 꽃

이국의 개들이 사람과 산책을 즐기고
중성화 수술을 마친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창가의 볕을 즐기는 곳

사람들에겐 주님의 평화가 임재하는 곳
- <평화의 눈 1> 전문

시인은 음식문화의 정치학뿐 아니라 현실사회의 일면을 예리한 눈으로 포착한다. 평화가 있는 현실의 공간은 실상 평화가 없다. 이 거대한 아이러니를 시인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용산미군기지 안은 이 땅의 슬픔과 분노에는 관심이 없는 공간이다. “광장의 촛불시위”도 “먼 나라 이야기하듯/하품처럼 넘기는 곳”이다. 그렇지만 그곳의 사람들에겐 주님의 평화가 임재하는 곳으로 비춰진다. 용산기지 안은 이국의 권력이 만들어낸 성역이다. 성역 밖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시인은 거리에서 추억을 버렸다고 한다.

추억을 버리는 일은 이 도시에서 흔한 일이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하루를 카메라 속에 주워담는다
추억은 땅을 잃은 빗물처럼 아스팔트 위를 떠다니다 결국
바다로 모여들고
바다에 모인 추억들은 뒤엉겨 들치근해진다
순간의 갈증이
콜라 한 페트로 버려지는
플라스틱 사랑
바다 위를 부표처럼 떠돌다
(어쩌면 등푸른 생선은 기억에만 존재하는 과거가 될지도 몰라)

해는 떨어지고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환경호르몬처럼 지독하게
외롭다
멸종 위기 동물은
뉴스 속에서나 존재할 뿐
콘크리트 위에 견고한
문명의 위기는 밥상에 오른 고기덩이만큼이나
무심히 씹히고……
그뿐
질문이 없는 이 도시에서
추억은 버려지기 위해 태어난다
- <이상기후> 전문

오염된 환경은 인간의 정서도 함께 오염시킨다. 이 세계의 이상기후는 정서의 상실 때문에 발생한다. 이제는 “추억을 버리는 일”이 흔한 일인 것이다. 플라스틱 사랑이 부표처럼 떠도는 세계이다. 시인은 “질문이 없는 이 도시”에서 무언가 말 걸고 싶어한다. 추억이 버려지는 것을 보며, 추억이 흔하게 버려지는 세태를 보여주며 반성적 성찰을 기대한다. 오염된 환경에 실천적으로 반응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은 다른 여타의 시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풍경이다. 풍경이 오래된 기억이 되기 위해서 시인은 근원적 시간을 불가피하게 떠올려야 하는 지 모른다. 저 북방의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기억의 관념적 체험은 시인에게 또 하나의 의미영역에 속한다.

주홍날개꽃매미 유충 한 마리가
아스팔트 위에 선명한 핏자국처럼 멈춰 있었다
검고 날렵한 다리 땅에 붙은 듯, 태곳적 정지 그 고요함 속에
바람이 불었다
발견이 곤충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북태평양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고래가 분기(噴氣)한 습기가
붉은 점 위를
점점이,
점점이, 지나
가고 있었다
고요하던
붉은 점, 바람에 휘청하더니
감춰둔 날개 펴고 유유히
바람 속으로 돌진해 버리는 것이었다

바람은 곤충의 등을 기억에 업고
대륙으로, 멀리, 사막을 향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 <대륙의 기억> 전문

대륙의 기억은 바람으로부터 온다. 그 바람은 유충 한 마리에게 도달한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사건을 통해 원시의 기억을 회복한다. 시인은 회복된 기억을 ‘발견’이라고 말한다. 바람은 습기를 머금고 있다. 북태평양의 고온다습한 습기. 즉 기분이 좋을 리 없는 습기이다. 그 바람이 유충 한 마리의 시신을 지나치고 있다. 어찌 유충 한 마리뿐이겠는가. 이 땅의 온갖 생명체들의 죽음 위를 무수히 통과해 나갈 것이다.
유충의 시신은 바람에 그냥 몸을 맡기지 않는다. “붉은 점”으로 남아, 죽음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날개를 편다. 감춰둔 날개를 편다는 것이 부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죽음으로 새로운 탄생을 예감하는 동양적 세계관과 닮아 있다. 대륙의 기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바라보고 싶은 지점이다. 왜 ‘땅’이 아니라 ‘대륙’이라 했을까. 이 땅, 이 흙이 아닌 좀 더 큰 사유의 밑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차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건 그가
낚아 챈 봉지가 아니라
검은 눈이다
빛을 감지한 동공이
수축하는 소리다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사냥하지 않는 호랑이
새끼를 돌보지 않는 새장 속의 새
도시의 하수구를 돌아다니는
쥐의 꼬리……

밟힐라
긴 것들이여
문명의 말들이여
사전들이여

짓눌린 것은
아스팔트 밑의 땅
스스로 검은 땅을 자처한
불순한 운명

운행을 멈춘 엔진엔
아직 온기가 감돌고
차 밑에 숨은 고양이는
우주의 검은 점처럼
몸을 웅크린다

비가 온다
 
잘린 꼬리가 아픈 건
비단 고양이만이
아닐 것이다
- <꼬리> 전문

‘불구’는 불구자 자체에서 기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부요인이 불구의 존재를 만든다. 원시의 감각은 본능적인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체는 늘 자신의 본능에 충실해왔다. 그 충실함에 균열을 가한 것은 문명이 주는 불구의 훼손 때문이다.
시인은 고양이의 동공이 수축하는 소리를 듣는다. 동공이 빛을 감지하고 차 밑에 숨어 있는 이유는 꼬리가 잘렸기 때문이다. 잘린 꼬리를 운명처럼 던져준 이 문명세계는 말들이 넘쳐나는 세계다. 밟히는 꼬리와 문명의 말들은 서로 은유의 관계를 이루며 사족의 비만함을 설파한다.
문명의 말들은 수많은 규율과 억압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는 땅까지도 “불순한 운명”을 자초한다. “우주의 검은 점”은 고양이를 말한다. 즉 아주 작은 존재를 더 강조하고 있다. 이 작은 존재는 고양이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시는 전해준다.

엄마들은 제 상처에 스스로 반창고를 붙이지 못한다 아프면 시름시름 앓다 일어선다 한겨울 시린 갈증에 달콤한 귤 한 봉지 선뜻, 사지 못한다 아이들은 자라고 로맨스는 이미 너무 멀고, 늘어진 남편의 런닝구 추슬러 입고 새벽 댓바람 교회에 간다 이방의 신 야훼는 엄마들을 어루만져 주신다 옷 한 벌, 과일 한 봉지, 새 속옷, 파마 한 번 어치의 욕망을 차곡차곡 모아 제물로 바친다 넙죽넙죽 잘 드시는 이방의 신 엄마들의 얼굴은 사랑받는 여자의 욕망으로 넘쳐나 우리 아이 학업,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게, 해, 주시옵 시, 고……
야매로 일만 원짜리 파마를 하고 촌스런 머리와 독한 파마약 냄새를 받아주시는 야훼 앞에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야훼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며 부자들의 배를 채워주시는 풍요의 신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들려주시는 은밀한 신 엄마들의 처진 마음을 탱탱하게 하시는 오르가즘의 신!
오늘도 엄마들은 붉은 루즈 칠 하고 교회에 간다.
- <외로운 엄마들은 교회에 간다> 전문

엄마는 여성과 다른 이름이다. 시에서는 엄마가 교회에 가는 이유로 외로움을 꼽는다. 시에서의 엄마는 희생과 인고의 엄마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여성성을 잃어버리고 욕망으로 점철된 소욕이 엄마의 모습 속에 가득하다. 엄마에게 이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이방의 신” 야훼라고 말한다. 그러면 왜 “신”이 아닌 “이방의 신”이라고 굳이 말했을까. 이 속에 또다른 상징적 의미가 놓여 있다. 이방의 신에 대한 엄마의 태도는 언제나 같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거나 교회로 새벽기도를 가는 엄마의 태도는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기복신앙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신앙의 맹종은 “야훼”라는 이방의 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방의 신은 가난한 자도 사랑하시지만, 그 이면에 부자들의 배도 채워주시는 신이다. 은밀한 가운데 임재하여 “풍요의 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은밀한 신은 엄마들에게 영혼의 오르가즘을 선사해준다. 이렇듯 “이방의 신”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속성을 띠고 엄마들의 영혼을 위무한다.
신혜정이 일관되게 지녀온 문명에 대한 시각은 결국 삶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적극적인 노력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노력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번 시집의 후반부에는 순환론적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무덤이면서 동시에
집인

새는 이제 곧 날 수 있겠다
- <동거> 부분

고양이가 쥐를 뒤집자 바닥에 붙었던 몸에서 눈물처럼 뚝뚝, 구더기 무리가 떨어졌던 것이다 쥐의 내장이 질질, 흐르지도 못하고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꼬물거리는 구더기에게 고양이가 발길질을 했지만 이내 흥미가 사라진 듯하였다 바람이 불었고 고양이는 이제 냄새나는 쥐 따위에게서 관심이 멀어진 듯, 살아 있는 생을 쫓아갈 발톱을 핥는 중이었고 쥐의 몸은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창(窓)> 부분

다음 생을 위해
우주가 움직이는 것은
참 이상도하지
나고 죽는다는 것 말이야
고게 자꾸 입맛을 당겨
- <참 이상도 하지> 부분

인간의 삶이 죽음에 다다르는 시간의 연속이라면, 반대로 죽음은 삶에 닿기 위한 시간이다. 죽음과 삶이 결핍과 단절이 아니라 서로를 위무하고, 희망하는 소생의 힘이 될 수도 있다. 신혜정은 ‘죽음’의 공간인 ‘무덤’과 삶의 공간인 ‘집’을 함께 부려놓는다. “무덤이면서 동시에/집”인 공간은 신혜정이 도달하고 싶은 인식의 지평에 속한다. 시적 자아의 현신처럼 보이는 “새”는 비상을 통해 죽음과 삶이 함께 존재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공존의 순환론적 세계관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해서도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시 <창(窓)>에서는 죽은 쥐에서 생겨난 구더기를 통해 새로운 시선의 창을 갖고 싶어한다. 고양이는 이미 죽은 쥐의 시체에게 관심이 없지만, 부패된 쥐의 시체 속에서는 우리들이 모르는 새로운 잉태의 순간이 진행되고 있다. ‘추의 미학’을 통해 소생의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창’이 생기게 될 것이다. 우주의 생존 원리는 파괴와 창조의 반복이다. 신혜정은 “다음 생을 위해/우주가 움직이는 것”의 순리를 “참 이상도하지”라는 독백의 말로 이해하고 있다. 무엇을 더 말할까. 존재하지 않는 희망에 대해서 불가능한 말을 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독자들도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만약 낙원이 존재한다면
그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겠습니다

서로가 뿌리째 연결되어 있는 그곳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태양이 대지를 덥히고
생의 뿌리 깊은 맛을 알몸으로 느끼는
그 시간을 나는
기적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월을 견뎌온 나무의 기적을
그저 느끼며 살아도
행복하겠습니다

서양 최초의 사람이 따 먹었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가 있다면
나는 제일 먼저 따서
그대에게 건네겠습니다

달고 쓰고 시큼한
진리의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영원을 맹세해도 좋습니다

신령한 나무 아래서
오래도록 그대와 나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 하며
그 실과를 먹겠습니다

그곳은 모든 세상의 말들이 사라지고 고요히
바람 부는 소리만 들릴 것입니다
- <연가(戀歌)> 전문

신혜정이 닿고자하는 지점이 위 시에 등장하는 “낙원”과 같은 곳이라면, 과연 그러한 곳에 닿고자 하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이다. 시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연가(戀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울창한 숲속에서 사자와 뱀과 인간이 함께 뛰어노는 그 시간들이 “기적”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낙원”은 종교적 신념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존재이다. 선악과의 실과를 기꺼이 따먹겠다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은 “연가”를 통해 “맹세”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신혜정은 연가의 말미에 “그곳은 모든 세상의 말들이 사라지고 고요히/바람 부는 소리만 들릴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떤 소멸을 의미할까.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 소멸에 허무의 냄새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 상기할 수 있다.
“때로 아름다움은 치명적 재앙”(<데드 플라이>)이라고 한 신혜정은 자신이 택한 미학적 결말의 쓸쓸함에 대해 이미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나의 팔은 혀처럼 널름거리며/말라가고 있는 중”이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그것은 신의 축복”이라는 보편적 행복의 가능성을 늘 타진해가는 시인이다.
신혜정은 이번 시집에서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의 아이러니를 경쾌하게 좇다 허무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피곤에 찌든 거리의 일들을 돌봤다. 문명사회의 허기와 오염된 생산품들에 대한 신념의 언어가 뜨거운 김을 뿜으며 고여 있었지만, 그곳엔 새로운 생성의 기운이 엿보이기도 했다.
하늘은 잊을만하면 자신의 푸른 몸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감동이란 말을 선사해준다. 신혜정 시인은 오래 꿈꾸던 먼 이방의 땅으로 곧 떠난다 한다. 그녀는 이방의 시간 속에서 더 오래오래 하늘을 들여다보며 매혹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안개가 가득해 저 앞의 바다가 정말 바다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혼자 남은 섬은 그 의심으로부터 부여받은 고독의 영광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새로운 사유의 텍스트를 찾아 떠나는 그녀가 어떤 말풍선을 옷자락에 가득 달고 올 지 사뭇 궁금해진다.

_ 신혜정 시집 <라면의 정치학>(2009), 북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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