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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시詩 2008. 2. 18. 13:43

이재훈


터덕터덕 걸었을 뿐이다
모래바람 따라 그랬던 건 아니다
보리가 살갗에 닿는 쓰라림 같은 것
그렇게 하늘 끝을 향해 걸어갔다
차도르를 걸친 채 외줄을 탔다
그때부터 귀향지를 생각했다
도랑창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면
귓구멍에 개미가 한가득 기어 다녔다
우주의 날씨는 늘 맑은 것처럼
무더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뒤채는 모래처럼
한 알의 몸, 한 숨의 잠이었을까
사랑을 배운 죄로
이 넓은 광야를 걷고 있는 것일까
이슬의 영롱함과 풀잎의 생명이
더 맑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자꾸 과거만 투명하게 보인다

뼈와 살이 풍화되는 겨울 저녁
아무도 나의 고향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노래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느 마구간 구유에 입을 넣고
소리없이 여물만 삼켰다
나는 원래 들판의 아들이었지
아름다운 황혼은 뱃속에 숨겨두고
퀭한 눈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이제는 도시의 골목을 기웃거리며
킁킁 냄새나 맡으며
예술을 아는 척 피카소전엘 간다
어깨 구부정한 늙은 포유류가
저기 보인다

_ <시현실>, 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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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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