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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04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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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드라마가 역사를 앞에 내세울 때는 그 역사의 승리를 되새기고, 그 좌절에서 승리의 약속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하나의 승리 앞에서, 또는 승리의 약속 앞에서 우리는 그 승리가 공정한 것인가를 묻게 된다. 말하자면 주어진 현실의 조건들을 제대로 지켰는지 묻는 것이다.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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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람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채소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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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과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젊은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일시에 밝게 비춰줄 한 광채의 존재를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서 보았으며, 자신이 그 빛을 본 첫번째 사람이 아니란 것도 배워서 안다. 그래서 그는 착하고 진실한 삶이 저기 있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비루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날마다 묻게 된다. 어쩌면 그가 쓰는 시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말을 골라 이리저리 조합했을지 모른다. 제가 무엇을 썼는지 자기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에 제목을 붙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진지할 것이 없어 보이는 말장난을 할 때조차도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다. 그는 자기 자신도 누구도 속인 것이 아니다. 그는 벌써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보았기에, 그가 쓰는 말들이 그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늘 새롭게 관계를 맺기에, 그의 시는 이 모욕 속에서, 이 비루함 속에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려던 사람들을 다시 고쳐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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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삶을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삶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전쟁은 바보짓이다. 분쟁의 해결책 가운데 전쟁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하는 것은 없다. 전쟁은 우리 삶을 파괴하고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떤 명분도 이 비극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핍박받는 민족의 독립전쟁 같은 것을 거론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핍박하는 일도 실은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다. 이 오월에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들은 어느 골목을 헤맬까. 지금 축제를 벌이는 젊은이들의 소식을 어느 골짜기에서 듣게 될까. 공부하고 일하고 춤추는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훈장을 뽐내며 돌아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음의 상처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민족의 절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능력을 스스로 멸시하고, 우리가 이 민족이었던 것을 저주할 것이다.

나는 전쟁이 무섭다. 오만과 증오에 눈이 가려 심각한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이 무섭다. 전쟁을 막을 지혜와 역량이 우리에게서 발휘되지 못할 것이 무섭다.

 

역사는 과거와 나누는 대화라고 흔히 말한다. 유령의 역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편협한 주관성으로 역사의 입을 틀어막고도 대화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이번 국사교육 번복 소동에서 보듯이, 역사의 입을 막았다 열었다 하며 그 눈치를 보는 사람들의 이상한 대화법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는 대량으로 소비되지만 그 원산지에서 일하는 시인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진이정의 경우처럼 특별히 독창성이 있는 작업, 그래서 미래의 생산성을 크게 기약할 수 있는 작업에 몰두하는 시인일수록 그 고단함이 더하다. 이 점은 시의 유통 경로가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사태를 파악해야 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잘 만들어진 실패담이다. 성장통과 실패담은 다르다.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 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간다.

 

스위스의 비자금에는 키드의 보물이 누리는 낭만적 깊이 같은 것은 없다. 어떤 농부나 양치기에게 발견된다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인 키드의 보물은 어떤 풍경을 때로는 윤택하게 한다. 설령 그것이 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서민으로서는 접근도 할 수 없는 스위스의 비자금은 우리의 소박한 삶을 비웃고 우리의 상처를 들쑤시어 우리를 억압한다. 독재권력에 대한 이상한 향수가 역사의 깊이일 수 없듯이 그것은 깊이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깊이의 반대다.

 

맥락을 따진다는 것은 사람과 그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맥락 뒤에는 또다른 맥락이 있다. 이렇듯 삶의 깊이가 거기 있기에 맥락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일에 시간과 정성을 바치기보다는 행정 규정을 폭력적으로 들이미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한국을 이상사회로 생각한다는 노르웨이의 한 청년이 이런 문제 저런 문제를 깊이 살피기보다 제가 생각한 세계와 맞지 않는 것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려 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라가 진실로 억울한 사람들의 원을 풀어주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해 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처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더 나이가 들어, 제도 속에 들어가 어쭙잖게라도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들어섰기에, 그 책임을 어디에 전가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러서도, 젊은 날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굳게 믿는다.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또한 지배해온 사람들이 동상이나 기념관을 세워 추앙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밑에서 핍박받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염원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옛날과 많이 달라진’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나라가 그 하늘에 여섯 마리의 용이 날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 나라의 글자를 만든 임금이 있었고, 어떤 도를 실천하려는 선비들이 있었고, 인간답게 살기를 애쓰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얻었던 것과 같다.

 

현실의 조건이 이러저러하니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까지만 실현하자는 식으로 민주주의에 선을 긋는 것은 현실의 압제를 인정하자는 것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에는 우리가 어떤 난관에 부딪히고 어떤 나쁜 조건에 처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그 뜻이 거기 들어 있는 다른 모든 뜻보다 앞선다. 민주주의에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가 그와 같다.

 

나는 '풍경다운' 풍경을 얻는답시고, 마치 피난처에만 풍경이 있는 것처럼, 현실을 피해 얼마나 멀리 도망치려 했던가. 거기에 향기가 있다 한들 그것을 진정으로 평화롭게 마신 적이 있던가. 구본창의 시선은 새롭고 용감하다. 구본창의 사실주의는 용감하고 잔인하다. 사실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늘 잔인하다. 사실은 그것이 눈에 익을 때까지, 그래서 새로운 시선이 얻어질 때까지 잔인하다.

 

극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 전까지 삶의 드라마를 구성해 왔으며, 잠시 후에 다시 구성하게 될 것들은 배가 저쪽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사람들의 심중 깊이 내려가 있고, 조용하게 찌푸린 얽굴들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을 공허라는 말밖에 다른 말로 부르기는 어렵다.

 

아니, 달리 말해야 한다. 덜 끔찍하다는 것은 사실 더 끔찍하다는 말이다. 봉천동의 마지막 작은 집이 허물어지고, 정릉의 고층 아파트들을 둘러싼 원주민촌이 이주를 마저 끝내기 전까지는, 저 빈집의 두터운 빗장이 다 삭기 전까지는, 우리가 제사상 앞에서 올리는 절이 아직 허망하지 않다. 그러나 없는 신에게 절을 하는 것보다 없어질 신에게 절을 하는 것이 덜 끔찍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불안은 슬픔보다 더 끔찍하다.

 

온갖 종류의 대중물과 상업물에는 ‘시’가 충분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를 소비할 뿐 생산하지는 않는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저 대중 소비적 ‘시’의 소구력와 성공에 비한다면, 새로운 감수성과 이미지의 생산이 목표인 본격적인 시의 수요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하다. 그러나 시가 생산한 것은 어떤 방법과 경로를 거쳐서든 대중물들 속에 흡수되고 전파된다. 시는 낡았고 댄스 뮤직은 새롭다고 믿는가. 사실을 말한다면 시에서는 한참 낡은 것이 댄스 뮤직의 첨단을 이룬다.

 

현대의 다단한 문명을 만들기까지는 권태에 대한 두려움이 큰 몫을 담당했다.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것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는 것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시는 기억술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 시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왕성했던 생명과 순결했던 마음을, 좌절과 패배와 분노의 감정을, 마음이 고양된 순간에 품었던 희망을, 내내 기억하고 현재의 순간에 용솟음쳐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예술의 윤리는 규범을 만들고 권장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날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새롭게 얻어낸 희망을 세세연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어떤 사람에게 현재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겠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 유신시대의 압제가, 한국동란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의 몸부림이, 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 모두 현재에 속한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사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자각되지 않는 말들이고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고 인습적인 말들이지, 반드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쉬워질 수 있지만, 인습적인 말은 더 인습적이 될 뿐이다. 진실은 어렵게 표현될 수도 있고 쉽게 표현될 수도 있다. 진실하지 않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 장 주네는 "자신이 배반자라고 여겨질 때 마지막 남아 있는 수단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바도 아마 이와 관련될 것이다.

 

물질문명의 시대란 역설적이게도 몸이 물질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다. 이제 육체가 물질을 접촉하는 순간이란 저 스냅 동작의 짧은 순간 뿐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단추를 누른다. 옷을 입을 때도 옷고름을 매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도,윗층에 올라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단추를 누른다. 우리의 육체가 물질과 교섭할 때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각들은 이제 누름단추의 탄력으로 통일된다. 물질로부터 듣게 될 모든 소리는 이제 딸가닥에 그치는 경쾌한 금속성의 소리로 통일된다. 흙도 물로 불도 나무도 돌도 모두 손가락에 한 번 튕겨오르는 탄력과 딸가닥으로 추상화된다.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에게도 그런 시간을 가지라고 권한다. 애들은 그 시간에 학교 성적과는 아무 관계 없는 소설이나 만화를 보기도 할 것이며,내가 알고는 제지하지 않을 수 없는 난잡한 비디오에 빠져 있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보게 될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보는 편이 낫다고 본다. 아내는 그런 시간에 노래방에 갈 수도 있고, 옛날 남자친구를 만나 내 흉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늘 되풀이 되는 생활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문학은 영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더 낡은 것은 아니다. 양식으로건 기법으로건 영화에서 새롭다고 말하는 것이 문학적 서사에서 완전히 낯선 것인 경우는 드물다. 문학이 손대보지 않은 새것은 거의 없다. 문제는 문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이라는 말에 있으며, 그 말의 함의에 있을 것 같다. 흔히 문학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은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문학연구자들처럼 문학을 제 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문학의 낡은 인습들이며, 문학이라면 필경 그럴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잘못 믿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문학의 키치들일 뿐이며 키치화된 문학일 뿐이다. 문학은 '문학적'인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좋은 문학은 오히려 문학적으로 그럴듯하거나 그럴듯하게 문학적인 것들의 허울을 헤치고 사물의 본색을 보려고 애쓴다. 그래서 문학적인 것은 문학에게도 그 해악이며 그 적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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