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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13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배수아역), 봄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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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인간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과 함께 그에게 앞서 주어진 죽음을 죽는 것이다. 죽음이 미리 주어지지 않았다면, 죽음은 인간을 기습하는, 훨씬 더 격렬한 사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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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말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말을 전혀 갖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인은 모든 말을 매번 원천으로부터 새로이 퍼올려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신의 흔적에 가까이 있다. 원초적 말에는 신의 흔적이 더욱 선명하므로. 그것이 시인이 얻은 은총이다. 하지만 시인은 원초적 말을 접함으로써 자연적인 것과도 가까이 하게 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도 있다. 시인의 정신이 자연적 요소와 더불어 지나치게 과도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고, 자연적 요소로 정체성을 물들일 수 있고, 특히 자연의 분출, 자연의 경련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분출 활동을 통해 시인으로부터 뿜어져나온 새로운 정신이 말에 도입된다. 이것은 시인에게는 커다란 유혹이자 동시에 위험이다. 그래서 시인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다른 이들보다 신의 흔적에 가까이 있는 시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깊은 심연을 자신 안에 갖기 때문이다. 시인의 불안은 그 심연으로 굴러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심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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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때 진리가 온전하게 들어 있던 언어로 말한다. 신이 그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슬픔 중 하나는 신이 더 이상 그 안에 없다는 점이다. 이제 언어 속에 있는 것은 절망한 그 무엇이다. 시도했다가 실망하는 것, 앞으로 나서긴 했으나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버리는 몸짓, 몸을 일으키긴 했으나 다시금 주저앉아버리는 행위가 지금 언어 안에 들어 있다. 언어는 한때 말 속에 깃들어 있던 자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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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는 언어가 절망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신이 비워놓은 공간이 시에 의해서 채워진다. 그러나 시는 공간을 점령하지는 못한다. 시는 공간에 가볍게 떠 있고, 환영처럼 나타나나 싶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사라져버린다. 시가 사라지고 나면, 그토록 고대하는 말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멜랑콜리는 더욱 깊어진다. 시는 언어의 공간이 신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기억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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