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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0.11 키에르케고어, <유혹자의 일기>(황문수 역), 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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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배후에, 저 멀리 아득한 배경 속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데 이 세계와 첫째 세계의 관계는 때때로 극장에서 실제 장면의 배후에 보이는 장면이 실제 장면에 대해 갖는 관계와 거의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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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길을 잃은 나그네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다음 길 잃은 자로서 혼자 놓아두고 돌아온다면 분격할 일이지만, 어떤 사람을 자기 자신 속에서 갈을 잃게 하는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사소한 일인가. 길 잃은 나그네는 어쨌든 주위의 경치가 끊임없이 변하므로 변할 때마다 벗어날 길을 찾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 속에서 길을 잃은 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별로 넓지 못해서 곧 그가 가는 길은 벗어날 수 없는 순환로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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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습니다. 당신은 거울을 무시하지만, 거울은 당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거울은 얼마나 충실하게 당신의 모습을 비춰주는가. 마치 충실함을 통해 자신의 헌신을 증명하려는 천한 노예처럼. 물론 그에게는 그녀가 의미 있지만, 그녀에겐 그가 아무 의미 없는 노예처럼.
(...)
인간이 거울과 같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우랴.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거울과 같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 그녀가 단 한마디라도 그녀의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하면 그녀의 모습을 잃고 마는 이 거울처럼, 단지 표면만을 파악하고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며 본질이 나타나려고 하면 모든 것을 상실하는 그러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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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로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조차도 이 사건을 거의 은밀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모든 사랑은, 성실하지 못한 사랑조차도 적당한 미학적 계기를 갖고 있는 한 은밀하다. 나는 함께 알고 있는 사람을 바라거나 나의 모험을 자랑하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컨대 그녀의 집을 알지 못하고 그녀가 가끔 찾아가는 곳만 알고 있다는 것조차도 거의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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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는 부드럽고 충실한 이해라는 포옹이나 인력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오해라는 반발 작용에 의해 규정된다. 그녀에 대한 나의 관계는 본래 순수한 무(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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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일반적으로 왜 이렇게 둔한가. 남자는 비약해야 할 때가 오면 망설이고 오랜 준비를 하고 거리를 눈으로 재고 몇 번씩 출발을 하지만 무서워서 되돌아온다. 마침내 도약하지만 떨어지고 만다. 젊은 아가씨의 방식은 다르다. 산악 지대에서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두 개 나란히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두 낭떠러지는 내려다보면 몸이 오싹하는 깊은 협곡으로 갈라져 있다. 남자는 감히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지방 주민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 젊은 아가씨가 용감하게 뛰어넘었으며 그래서 이곳은 '아가씨의 도약'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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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무서워하는 동안은 미워하게 하라. 이 말에서는 마치 공포와 증오만이 짝을 이루고 공포와 사랑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으며 사랑을 관심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공포가 아닌 것 같지 않은가. 우리가 자연을 포옹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이러한 사랑에는 신비한 불안이, 공포가 있지 않은가. 자연의 조화는 무법칙성과 격렬한 혼란으로부터 자연의 신회성은 불성실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안이야말로 가장 매혹적인 것이다. 사랑은 관심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사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배후에는 깊고 불안에 찬 밤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고, 이 밤으로부터 사랑의 꽃이 핀다. 예컨대 꽃은 수면 밖에 나와 있으나 뿌리는 생각하기만 해도 섬뜩한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수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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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는 끊어졌다. 그녀는 동경에 가득 차서 힘차고 대담하게, 거룩하게 날아간다. 마치 방금 날개를 활짝 펼칠 자유를 얻게 된 새처럼. 날아라, 새여. 날아라! 이 왕자와 같은 비상이 정녕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한없이 깊은 고통을, 피그말리온의 애인처럼 다시 돌이 된다면 그때의 기분은 나의 기분과 같으리라. 나는 그녀를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사상처럼 가볍게.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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