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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18 처형극장에서 세상을 보다_ 강정 대담

처형극장에서 세상을 보다



강정, 이재훈

 

 

“당신의 용서는 내 핏줄 속에 숨은 바람을 뽑아 하늘로 되돌려 보내는 것, 살아서 죽음을 보여주는 것,//죽음을 살아낼 테야”
― <당신을 만난 이후로> 중에서

 

죽음을 살아낸다고 하는 젊은 시인의 목소리는 자뭇 신선하다.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이 말 속엔 강한 정신적 자장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인식의 경험에 대한 솔직함이다. 1970년산 시인의 삶 속에 인식의 경험은 그 어떤 실제적 경험보다 크다. 그러기에 시인은 마치 주술에 걸린 듯 언어의 마력에 휩싸인 채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김열규 교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한국인의 죽음론’에 관해 다룬 유일한 책이다. 김열규 교수는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로서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도 생물학적인 테두리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으려 들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죽음에 대한 천착은 반대로 삶에 대한 천착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정의 죽음은 현실 이후의 죽음, 다시 말하면 영생의 세계이거나 새로운 유토피아의 세계를 꿈꾸는 죽음이 아니다. 그러한 죽음이라면 그 죽음에는 기쁨이 있거나 나르시즘이 있을 것이다. 강정 시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이다. 현실 속에서의 죽음이다. 우리는 삶을 위하여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다. 살아내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 살아내기 위하여 죽임을 택하는 것. 강정 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시인은 말한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수천 번 죽음을 노래했건만/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이상하다”(<불안스런 것들>)고.


이재훈:반갑습니다. 첫 시집 이후로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을 듯 합니다. 문예지에서도 시인의 시를 만나기가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강정:그동안 발표를 많이 못했습니다. 99년부터 조금씩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를 써야지 하는 강박도 없었고 시를 쓰지 말아야지 하는 강박도 없었지요. 시에 대해서도 인생에 대해서도 딱 그런 자세였습니다.(웃음)

이재훈:등단 후 첫 시집 발간될 때까지가 궁금합니다.

강정:시집에 있는 시들 중에는 절반 이상이 군대 가기 전에 쓴 것이구요. 제대하고 시골에 있으면서 시를 많이 썼습니다. 집에 286구닥다리 컴퓨터가 있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아마 군대에 있으면서 묵혀둔 에너지가 있었나봐요. 군대에서 읽었던 여러 책들도 크게 도움이 되었구요. 그때 50-60편 정도 썼던 거 같아요. 사우나한 것처럼 내적 에너지를 쏟아냈었죠.

이재훈:시를 읽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참을 수 없는 내적 에너지의 폭발에 의해 시가 나온 듯합니다. 쏟아냈다는 말이 마치 강신무의 사연처럼 들립니다.(웃음)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언어에 대한 생각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강정:시란, '끝없이 변전하는, 죽은 자의 무덤의 단 한 차례의 묘비명'이라고 감히 정의 내릴 수 있겠는데요. 시의 본령이 바로 그러한 인식에서 촉발되는 것이지요. 언어는 부르는 동시에 사라지는 신기루거나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적 형식'이라 명한 것처럼, 세계의 구조를 쉼없이 모방, 전이시키는 나 자신에 대한 '변종의 자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언어는 나 자신의 도구이자 살해자이며 동반자이자 영원한 적입니다. 나는 즉, 언어와 살을 섞어 나 자신에 배리되는 존재와 우주의 쌍생아, 그것도 돌연변이들의 세계를 한없이 지향하고 있는 겁니다.

이재훈:오늘은 '죽음'이라는 얘기를 안할 수 없겠네요. 좀 뻔하고 재미없는 질문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죽음의 문제야말로 가장 큰 화두가 아니겠습니까.

강정:시를 가지고 어떤 경지에 이르겠다 그런 마음이 제게는 없는 거 같아요, 제게 시는 나를 곧추세우고 정신적으로 단련시켜주는 것은 있는데 저는 연애하는 것처럼 시를 써요. 애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죠. 시가 항상 자발적인 의사표현은 아니잖아요. 어떤 힘이 나를 눌러서 써질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뱉어놓고 나를 놀라게 할 때도 있구요. 이런 식으로 무의식적으로 나를 드러내고 있는 거구나 하구요.

이재훈:시가 안될 때 안 되는대로 그대로 두는 경우를 보면 자신에게 솔직하신 것 같아요. 어떤 경우에는 시를 이대로 안쓰면 큰일나겠다 라는 중압감이나 불길함 때문에 시를 계속 쓰는 경우도 많은데요.

강정:내식대로 말해 본다면 그런 중압감은 저에게도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맞서느냐 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합니다. 갑자기 이대로 계속 시를 쓰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중압감이 있습니다. 낭떠러지에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시간들도 시가 나오기 위한 하나의 단계인 것 같기도 해요.

이재훈:시집 <처형극장>은 90년대 들어 젊은 시인들이 천착하는 ‘죽음’의 문제에 꼭 거론되는 시집입니다. 많은 평자들은 90년대 후반 들어 생겨난 죽음의 시학에 관한 일반적인 평가를 이데올로기의 부재에서 찾는 듯 합니다. 현실세계 속에서 더 이상 싸울 근거지를 잃은 시인들의 정신적 촉수가 인식의 끝간 지점인 죽음을 향하는 것이지요. 시인들은 이성으로 결론 내릴 수 없는 극한의 정서에 매력을 느끼는 존재들 아닙니까. ‘죽음’을 생각하게 된 특별한 연유라도 있을까요.

강정: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해서 실제적인 큰 경험은 없습니다. 솔직히 저도 잘 몰라요. 왜 그렇게 죽음에 몰입하게 되었는지. 당연히 죽고 싶지 않죠. 길거리에서 차가 오면 피하게 되고 죽음을 회피하려는 것은 본능인 것 같아요. 죽음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런데 아까 극한이라고 하셨는데요. 가령 내가 뭘 하고 싶은데 못하면 저는 죽고 싶어요. 단순하게 말해서 가장 근본적으로 거기에서 발단이 되고 있지 않나 봅니다. 뭔가 하고 싶다라는 게 그 자체가 죽음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못 죽죠. 삶의 순간들마다 그런 죽음들이 도처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삶의 행간일 것 같기도 하구요. 물론 문학적으로 뻔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요.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그런 쪽으로 갔던 거고 버튼을 누르면 마구 쏟아져 나오듯이 시가 쏟아져 나온 것 같아요. 제 시가 어떤 형식의 틀 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쏟아져나왔던 거죠.

이재훈:죽음을 얘기한 선배 시인들의 영향은 없었는지요?

강정:선배 시인들의 죽음에 대한 시들은 솔직히 어둡잖아요. 선배 시인들에서는 형식만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게 영향을 받았겠죠. 어떻게보면 첫 시집은 내용은 없고 말만 많았던 시집인 것 같습니다. 말이라는 게 폭포처럼 쏟아질 때 나 스스로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겠고 그런 말들이 나를 처형시켜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록음악을 좋아했는데 그런 음악들의 테마가 어둡고 침울하잖아요. 또 제 성격도 굉장히 침울한 성격이거든요. 조울증도 심하구요. 그런 것들도 이유가 된 것 같아요. 내 몸 속에 죽음이 꽉 차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했는데 말로 그것을 풀어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의 춤을 추고 싶었던 본능이 있었나봐요. (웃음)

이재훈:시집이 나올 당시 25세이셨는데 20대 중반의 나이에 바라보는 죽음은 중년 이상의 연대를 살아온 사람들과 다른 변별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적은 삶을 살았다는 게 체험의 빈약도를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강한 체험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삶의 성찰을 통한 죽음의 인식이 아니라 성찰을 통과하지 않은 죽음에 대한 인식일 겁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그 나이에 죽음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은 인식의 치장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극단이면서도 그럴듯한 가면이 아닐까요?

강정:제가 쓴 시에서 빠져나와 멀리서 볼 때가 있잖아요. 그게 다 맞는 말인 거 같아요. 당연한 말들 같구요. 기분 나쁜 부분이 있다면 너무 당연한 말인 게 나쁘죠. 치장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치장 맞아요. 치장하면 왜 안되나요?(웃음) 살면서 치장만큼 삶을 본질적이고 역으로 드러내 주는 게 뭐가 있나 이런 생각도 들구요.

이재훈:언어가 무척 화려합니다. 화자의 캐릭터를 만들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규정하는 것인데요. 강하게 또박또박 말하는 것. 그것은 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또는 그만큼 삶에 대해 큰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강정:캐릭터를 말씀하셨는데 제 시는 사람을 무척 불편하게 하는 시에요. 어떤 괴상한 놈을 하나 떡 세워놓고 볼 테면 봐라, 싫으면 말아라 하는 거죠. 성숙하지 못한 생각이긴 한데 그게 나의 방식인 거니까요. 이야기가 무척 장황하긴 합니다. 문법의 혼돈과 사유의 혼돈, 그리고 확정된 것에 기대지 못하고, 불연속적인 삶의 리듬에 쉬이 휘둘리는 연약함이 행간마다 읽는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생각들이 정리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완결성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또는, 저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 모든 이들의 생각들에 동의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은 단선적 불신이나 배반당하지 않으려는 웅크림은 아닙니다. 저는 되려 더 큰 배반과 더 예리한 당착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배리의 과정이 더 극악한 과오들을 이끌어내길 바랄 뿐입니다. 앞으로도 보다 점증된 의견과 보다 가파른 추락의 낙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재훈:죽음이라는 테마가 패러다임의 과도기에서 생산된 정신적 산물로 말해지는 경우도 많은데요.

강정:어떤 패러다임을 옮겨다니며 시를 쓰는 것들이 많지요. 그런 것에 연연하지는 않구요.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갖는 것에는 오히려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재미가 없어요.

이재훈:예. 그 말씀을 들으니 “시를 왜 쓰는가?”는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 같습니다만.

강정:요컨대 '시란 무엇인가?' '작금의 시대에 시가 작용할 수 있는 역할과 그 반경은 어떤 것인가?'하는 정도의 물음이 내 스스로에게도 간헐적으로 들곤 하는 것인데, 그건 결국 '내가 왜 시를 쓰는가?'하는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나는 거기에 대한 여러가지 가능한 변설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도 속일 수 없고 스스로 조차도 수긍할 수 없는 궁색한 변명이겠지요.
  사실, 그런 문제를 고민한다는 건 여러모로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 '내가 왜 이것을 하느냐?'하는 물음은 결국에는 자기동일성 문제로 귀착되기 마련이고, 그것에 대한 대답은 또 반드시 자기존재증명의 형태로 연결되니까요. 그리고 그 대답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식의 후체험적인 귀결보다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설명하면 할수록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만드는 어떤 미지의 선험성 쪽으로 대답을 지연시키는 걸 더 좋아합니다. 좋아한다고 말한 것만큼 그것은 분명 어떤 요령부득한 취향을 드러내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내가 도라지 담배를 피는 이유를 도라지 특유의 성질을 들어 설명할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취향 이전의 문제인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런 질문들은 항시적입니다. 시를 쓰면 쓸수록 그 질문의 범위는 확대되고 대답은 갈수록 요원해지면서, 종국에는 질문 자체가 대답이 되어버린 듯한 상태에 다다르기도 하는데요.
  이 때, 모든 질문들은 그 자체로 무화되면서 다른 질문들 사이를 옮겨다니거나, 다른 질문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요컨대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거나 수긍할 때(그리고, 아주 자주 반대할 때), 그것의 내용은 이미 내 안에 흡수되어 있거나 다른 형태로 표출된 내 의견의 일부로 벌써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즉, 아무도 나와 같이 얘기하진 않지만, 그 누구도 나와 다른 걸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그가 아마도 현대의 신, 나를 활동하게 하면서, 내가 활동하는 만큼 내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신성의 뮤즈(?!)일지 모른다) 벌써부터 주입되어 있다는 사실이지요. 지금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무슨 짓, 무슨 생각을 하고 살든 그 모든 것들이 모종의 시적 회로 속으로 녹아들어가 그 안에서 본능적으로 타당하게 운영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단 세계에 접속이 되었고, 코드가 잘려지거나 불타 없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만이 내 유일한 삶의 양식인 까닭이지요.

이재훈: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비가 그치지 않네요.

_ 출전 : [현대시], 2002년 10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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