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 대담

 

빌딩나무 숲을 거니는 비교秘敎의 사제

 

이재훈 ․ 신동옥

 

 


신동옥 : 형과 대담을 하다니! 오늘 나의 주제는 ‘형을 이해하기 위하여’다.(웃음) 최근에 대담집(이재훈, <나는 시인이다>, 팬덤북스, 2011)을 냈다. 형이 인터뷰를 진행한 십여 년, 그 오랜 행간을 좇다가 문득 이건 농축된 이재훈 스스로의 질의응답이 아닐까 여겨지기까지 하더라. 돌아가신 김춘수, 오규원, 박찬 시인과의 인터뷰를 읽고는 뭉클하기도 했다. 대담집 소개 말씀, 더불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들려 달라.

이재훈 : 오랜 문우인 신동옥 시인과 대담을 나누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 우리가 만난 지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우리가 독고다이, 언더 스타일이 서로 맞아 이렇게 오래 가는 건가?(웃음) 각설하고,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는 내게 십여 년의 세월이 집적된 문학 일기처럼 느껴진다. 이 대담집은 시인들이 직접 육성으로 풀어놓는 시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는 책이다. 각 시인들의 시관詩觀, 창작의 비밀, 창작배경, 성장과정, 문청시절,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적 삶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시인론을 쓰는 많은 평자들이 내 대담을 귀동냥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인의 창작배경이나 시적 의도가 큰 참고가 될 테니까. 또한 원로, 중견, 시의 성향, 계파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수의 시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너무나 많다. 시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한 가지씩의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나는 서면 인터뷰보다는 거의 현장 녹음을 하고 녹취를 푸는 식으로 했다. 당연 품이 많이 든다. 그만큼, 재미난 일화도 많다. 개인적으로 이미 작고하신 김춘수, 오규원, 박찬 선생 같은 시인들을 대담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김춘수 선생은 김수영이 평생의 라이벌이었다는 얘기와 국회의원을 역임하셨던 사연 등이 기억에 남는다. 오규원 선생과의 대담은 경기도 양평의 서후리라는 동네에서 요양하고 계실 때 했다. 이메일로 대담을 주고받았는데, 대담을 시작한 2004년 여름은 지독히 더웠다.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대담의 진행과정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박찬 선생은 연세에 비해 좀 일찍 작고하셔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대담 당시 일산에 살고 계셨는데, 비가 많이 내렸던 날이다. 직접 차를 몰고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대담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에피소드를 이 자리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또다른 자리에서 말할 기회가 있겠지. 궁금한 독자 분들은 우선 <나는 시인이다>를 참조하면 될 듯하다.

신동옥 : “1972년 강원도 영월 태생”이라고 약력에 썼다. 그런데 성인이 되기까지 강원도, 경상북도, 충청도까지 이사가 잦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린 시절 겪었다는 폭설에 대한 기억이나, 스무 살의 서울 체험에 대한 기억은 내게 이채롭게 들렸는데.) 자아가 형성되는 예민한 시기에서 막 사회화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잦은 이사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이재훈 : 태어난 곳이 영월이지만, 영월을 고향이라고 말하기엔 내게 고향이 너무 많다. 어쩌면 고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초등학교 때까지의 유년시절은 강원도 일대에서, 중고교 시절은 경북 일대에서, 고교부터 지금까지는 충남 논산이 내가 겪은 공간들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 땅의 산하들이 나를 키웠으니까. 그렇게 어린 시절을 늘 떠돌았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 이전 살던 곳을 그리워했고. 적응이 될 만하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늘 친구들에게 떠나는 사람이었고, 먼 곳에서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연락이 끊기는 사람인 거지. 말이 없었고, 혼자 많이 놀았고, 누군가 먼저 다가와야만 겨우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신 시인께 언젠가 얘기했던 폭설에 대한 기억은 강원도 인제의 깊은 골짝에 살 때였다. 정확히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그 동네는 여름과 겨울밖에 없었다. 9월이면 김장을 시작했고, 너무나 추운 동네였다. 심지어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얼어 죽었을 정도였으니까.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군인들이 눈을 치워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동네였다. 눈이 많이 왔던 날은 방문을 여니 마루 위까지 쌓였던 적도 있었다. 허리 깊이까지 눈이 내려 갇혔던 기억. 대체로 아이들은 동굴을 만들어 놀았다.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산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재미난 추억들이 많다.
   어릴 때부터 공간에 대한 집착은 없었던 거 같다. 떠나면 슬퍼진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쿨하게 떠났던 거 같다.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눈물바람이었고. 나는 이사를 가면 늘 타던 커다란 트럭이 기억에 남는다. 정확하게는 트럭 뒷좌석의 다락방 같은 공간. 이삿짐을 싣던 트럭은 운전석 뒤에 한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동생 둘과 함께 덜컹거리며, 평소에 먹지 못했던 맛난 과자를 먹으며 정말 오래도록 차를 타고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디로 가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걸 보면. 이사를 안가겠다고 떼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대충 어디 먼 곳으로 가는구나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사를 간다는 얘기를 들으면, 또 트럭의 뒷좌석에 탈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철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인지 뿌리의식이 없고, 정처 없는 유랑의식이 날 지배했다. 나중에 어디 조용한 데로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가끔씩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내게 중요치 않다. 내가 가는 그곳이 또 다른 내 고향이 될 테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앉아 있는 자리가 어떤 공간인지가 중요하다. 조용한 다락방 같은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신동옥 : 그래서 그런지 형의 작품에는 공간 내지는 공간성에 대한 예민한 촉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의 경우 그 공간은 첫째 도시와 일상의 공간, 둘째 신성의 거소, 셋째 비밀한 시원始原이 기루어지는 자리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개별 작품들 안에서 시적 공간을 배치하는 스킬이 놀랍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시인으로서 형의 특장이 아닌가 싶은데.

이재훈 : 시를 쓰면서 시적 공간의 배치를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부분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속에서 스스로 운용되어진 것 같다. 시적 공간들이 떠오르고 이동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 것이지. 그래서 시속의 자아가 많이 날아다닌다.(웃음) 시공간이 광활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곤 하는데. 이런 부분은 평소 상상하던 버릇 때문일 것이다. 늘 이곳 현실보다는 현실 너머를 많이 생각하고, 상상했다. 예를 들면, 우주로 날아가 외계인을 만나 놀거나, 내가 칠십 넘은 노인이 되어 새로운 사랑을 한다거나 하는 식의 상상들. 사실보다, 기적 같은 사실이 더 매력 있지 않나. 현실보다 믿을 수 없는 현실 혹은 믿고 싶은 현실에 더 강한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상상들이 현실에 발 디디고 사는 시인의 모습에 투영되어 나온다.
   또한 성인이 될 때까지 잦은 이주와 이별 등의 시간이 유목적 감각을 낳았던 것 같다. 유목적 감각이 묵시적 꿈들이나 환상, 욕망 등과 뒤섞여 내 시적세계를 이룬 것은 아닐까. 신성의 공간이나 시원 등을 탐구하는 시적 세계는 신화나 종교, 고고학 등을 좋아하는 독서습관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관심은 지속될 것이지만, 좀 외롭겠지. 좀 낯선 것일 수 있으니까.


신동옥 : 낭만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박수연, 「내면적 낭만의 순간」, <현대시>, 2005년 12월호) 첫 시집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썼는데.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원始原의 원대한 물음이 있다. 가령 밤하늘의 별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다소 낭만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꽤 고통스러운 일이다.”(「흠의 고백」,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시인의 말 중에서)

이재훈 : 과장된 표현으로 읽혀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겐 정말 절실했다.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은유적인 표현을 썼지만, 내 존재 이전의 먼 곳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일은 내겐 중요한 행위였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나를 여러 번 죽였다. 운명이란 것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이재훈이란 인간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운명적으로 이렇게 타고나서 생긴 거다. 남자이고, 이런 부모와, 이런 종교와, 이런 생김새와, 이런 교육과, 이런 공간들 모두.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은 몇 개밖에 없더라.
   존재탐구나 고행, 미지의 동경 등은 오래도록 나를 치기어린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아직도 미완인 걸. 계속 치기어린 사람으로 살아야겠지. 낭만주의자. 멋있지 않나. 끝까지 낭만주의자로 남고 싶다.

신동옥 : 첫 시집 해설에서 유성호 선생은 형의 시세계에서 종교적인 맥락을 소상히 밝힌다. 김유중 선생의 통찰(「그노시스를 향한 열망」, <시와생명>, 2002년 겨울)과 형 스스로의 고백적 아포리아(「숭고한 그노시스와 연금술사」, <시와반시>, 2007 겨울)도 있었다. 모태신앙이지 않나? 형의 기독교적인 상상력은 묵시록적인 비전보다는, 일종의 영지주의靈智主義(Gnosticism)랄까 그런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 같다. 이런 성향은 첫 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으로 건너오는 동안 더 강해진 것 같고. 형 시에서 종교적인 채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재훈 : 종교적 메타포나 질료가 시속에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내가 생각지 않았는데 언어 속에 들어와 있더라.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니까 그런 부분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까지는 집과 교회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 아주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신앙생활에 대한 다짐과 계획 등으로 모든 삶의 울타리가 쳐졌던 때였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자취를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또 이사 가신 거지. <데미안>에 등장하는 싱클레어의 삶이 시작된 거다. 사춘기가 늦게 와서, 전학을 가지 않겠다고 반항을 했다. 그렇게 혼자 떨어져 지냈는데. 문득, 이 모든 주어진 삶의 굴레에서 이탈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격렬하게 몰려왔다. 그리곤 신앙생활과는 동떨어진 난삽한 생활들을 했다. 그때는 신앙생활 이외의 모든 것들은 난삽한 죄의 생활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아무튼, 정통 기독교 외의 것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에큐메니칼, 해방신학, 중세 비교도, 그노시즘 등등. 기독교의 고집스런 구원관에 대한 회의도 있었고. 그 후로, 성聖과 속俗을 오고가는 철새 신자로 살았다.

신동옥 : 그렇다면, 형을 ‘연금술사’ 내지는 ‘그노시스트Gnosist’라고 불러도 되겠다.

이재훈 : 그렇기도 하다. 그노시스트지. 믿음보다는 앎에 더 관심이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신론자라기보다는 크리스천이 돼야 한다.

신동옥 : 시에서 상징을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다! 첫 번째 시집의 ‘황홀한’ 시리즈와 두 번째 시집의 ‘대황하’ 연작은 이런 생각을 단박에 증명하는 역작이다. 시적 상징에 대한 형 나름의 정의 같은 것이 있을 텐데. 참, 대담이 활자화될 쯤 두 번째 시집이 나올 수도 있겠다. 제목은 어떻게 정하셨는지?

이재훈 : 과찬이다. 한 편의 시에서 전달할 수 있는 상징은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작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상징은 여러 편의 시 속에서 반복적으로, 혹은 다양한 변주로 전달되어야만 힘을 갖는다고 본다. 특히 ‘대황하’ 연작은 물에 대한 상징을 제대로 밀고 가본 경우인데, 앞으로도 이러한 스타일의 연작들을 생각 중이다. ‘대황하’ 연작은 우연히 시상이 다가왔다. 이십대 초반 시절 쿠스코Cusco라는 밴드의 「대황하」라는 곡을 지겹게 들었던 때가 있었다. 한 평도 안 되는 고시원에 누워 이어폰으로 그 곡을 들으며, 거대한 황토물의 휘몰아침을 생각하면서 삶을 견디던 때였다. 오래전 그때의 감성이 정말 섬세하게 다가오더라. 내겐 행운인 거지. 두 번째 시집은 아직이다. 해설도 아직 안 나왔고. 때가 되면 나오겠지. 제목도 아직 미정이고.

신동옥 : 두 번째 시집, 기쁘게 기다리겠다.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쓸쓸한 날의 기록」)라고 말했다. 이때의 ‘서정시’, ‘서정시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재훈의 정의를 듣고 싶다. 그거 아는가? 가끔 형이 “나는 실패한 서정시인이지”라고 말할 때나 “나 같은 삼류시인이 무얼”라고 할 때면, 콱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다는 거.(웃음)

이재훈 : 편하게 읽으면 되지 무얼. 그 시는 정재학 시인과 내 자취방에서 밤새며 나누었던 얘기들을 시화한 것이다. 그래서 부제를 ‘정재학에게’ 라고 붙였다. 감수성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다는 건데. 그런 면에서 모든 시들은 다 서정시이다. 왜 서정시라 칭하는 것들만 올곧은 정서와 예민한 감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론에서 흔히 말하는 ‘서정시’에 대한 개념도 새롭게 정립해야 될 시점이지 않을까.
    가끔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기부정’은 날 채찍질하기 위해서다. 자기비하, 자기부정 등을 통해 최소한 내가 그런 시인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최고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간혹 있는데, 그 순간 아찔하다. 너무 천박하고 유치한 생각이지 않나. 그 생각을 덜기 위해 끝없는 자기부정을 하는 것이다. 자기부정만이 살 길이다.

신동옥 : 동감同感, 상련相戀이다. 첫 번째 시집의 세계가 노래 특히나 영가靈歌의 세계였다면, 두 번째 시집의 가장 특징적인 무늬는 ‘침묵’과 ‘고요’의 깊고 너른 울림이 아닌가 싶다.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이재훈 : 그렇게 읽히는가. 아마도 침묵과 고요의 시간들을 얻고 싶어서겠지. 요즘 도통 침묵과 고요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수다스러워졌고, 주위는 산만하고 시끄러워졌다. 유폐의 공간과 시간이 부족하다. 그런 열망이 시에 드러나지 않았을까. 또한 첫 번째 시집이 하늘 위에서 부르는 노래였다면, 두 번째 시집은 하늘과 땅의 중간쯤에서 부른 노래이지 않을까. 아마 세 번째 시집은 좀 더 땅으로 내려와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신동옥 : 「新林洞」, 「매일 출근하는 폐인」, 「비비디 바비디 부」,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등등 두 번째 시집에서는 일상의 공간에 대한 재해석이 눈에 띈다. 그 공간을 성찰하는 눈이 깊고 차분해졌고. 청년과 장년, 미혼과 기혼의 차이인가? 시인 이재훈에게 생활인 이재훈의 일상은 어떤 주제인가?

이재훈 : 두 번째 시집의 십여 편 정도는 내 일상 공간들이 시에 직접 드러난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내게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스무 살 때 처음, 서울을 와봤다. 물론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영락교회에서 초청한 강원도 오지마을 어린이탐방단에 뽑혀 서울에 온 적이 있긴 하다. 그때 국회의사당과 KBS를 견학했었는데. 스무 살 때 본 서울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너무나 큰 한강과 책으로만 보던 63빌딩, 아파트, 수많은 차들. 시골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 괜히 도시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멀리 서울의 빌딩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땐 알싸한 도시의 매연도 좋았으니까.
   이런 서울이 지금은 부정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숨이 막히고, 날 옥죄는 공간으로. 하지만 어쨌든 내가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할 공간이지 않나. 아마 서울에서 인간처럼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통과제의일 것이다. 시에서는 몽상하는 산책자로 남고 싶다. 도시 속의 은둔자로 살아가고픈 욕망 때문이다. 욕망의 서울 속에서 겨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러한 도시성찰이라도 있어야 하니까.
   청년이건 장년이건 별 생각이 없다. 결혼을 했으니, 그저 고맙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에 많은 게 담겨 있다. 가장으로서 책임이 있기 때문에 밥벌이를 해야 하고, 그런 일상들이 시속에 스며들지 않았겠나 생각한다.

신동옥 : 두 번째 시집 원고를 읽으면서, 소재나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진 것을 보았다. 호흡과 리듬이 첫 번째 시집보다 더욱,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 시 속에서 이재훈은 젊음 쪽으로 역진逆進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재훈 : 정신연령이 낮아서일 거다. 그런 평가가 기분은 좋다. 젊음 쪽으로 역진이라니. 하하. 그런데 나이는 먹어가고 있지 않는가. 올해로 사십이다.(웃음) 두 번째 시집은 첫 번째 시집에 비해 좀 더 다양한 시편들을 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동옥 : 난 여전히 형이 사십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각설하고) 현재 월간 <현대시> 부주간이다. 국가대표 편집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 그만큼 성별과 연령, 시력詩歷을 불문하고 유연한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문학 현장에 있었는데, 그간 어떤 변화를 지켜봐 왔나? 시단이 달라진 점과 형 스스로가 달라진 점은 무얼까?

이재훈 : <현대시> 1999년 12월호부터 편집에 이름을 달고 일했다. 발행인 원구식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대학원 공부와 병행하며 일하기 시작했다. 그새 만 십년이 훌쩍 넘었다. <현대시>에 내 청춘과 삼십대를 고스란히 바쳤다. 억울한 건 없다. 좋아서 한 일이니. 나 같은 시인도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좋은 문학지를 만들기 위해 나름 바닥부터 고생했다. <현대시>는 한국 시단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대표적인 시전문지이다. 많은 시인들이 아끼는 잡지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또한 가장으로서의 내 생활을 걱정해주는 분들이 많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최근 시단의 변화는 젊은 편집진들로 세대교체가 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으로의 시단을 위해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단은 아직까지 다른 집단에 비해 권위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 자유로울 것 같지만 위계를 중요시한다. 그런데 젊은 세대의 시인들은 이런 부분을 견디지 못한다. 어른들이 뭘 시키거나 가르치려드는 게 싫은 거지. 또 윗세대들은 달라진 젊은 세대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선생 노릇 안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 같은 어른들이 젊은 시인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은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차이는 언제나 있어 왔던 것 같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랫세대들이 윗세대가 되면 또 이해하겠지. 원래 시인은 제각각 하나의 공화국 아닌가. 이형기 선생은 “시인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고 했다.
   유연한 교우관계는 따지고 보면 외롭다는 말과도 같다. 인간관계는 깊이가 중요하지 않나. 아무래도 시전문 월간지에 있다 보니 대부분의 시인들을 한 번씩은 보게 된다. 신동옥과 같은 시인이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깊고 청명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길 위에 영혼의 동반자인 문우들이 있다는 게 고맙고 든든하다.
   내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얼까. 잘 모르겠다. 내 꿈은 멋있게 늙는 것이다. 나잇값 못하고 추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지도.

신동옥 : 이재훈이라는 ‘첫정’ 선배가 있어 든든하다.(웃음) 형은 소문난 독서광이기도 한데. ‘이재훈이 꼽은 책 베스트 3’을 부탁한다면.

이재훈 : 소문났다니 무슨 말인가.(동옥 : 내가 소문냈다) 독서광은 신동옥 시인을 따라갈 자가 없는데. 옛날 말이다. 헌책방을 돌며 책을 모을 땐 좀 읽었었지. 지금은 많이 읽지 못한다. 책 베스트는 통과하자.

신동옥 : 마지막으로, 시인 이재훈으로서 생활인 이재훈으로서, 형 스스로에게 하는 당부와 다짐은 무언가? 이 자리에 명문화시켜서 남겨놓자.

이재훈 : 그러지 말자. 명문화라니. 명문화시켜 놓아도 내일이면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시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의 생각들이 자주 바뀐다. 특히 삶의 무게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요즘은 더욱더. 결국 시인과 생활인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것을 알면서도, 두 마리 토끼를 쫓아가야만 하는 운명 아닌가. 다만 내 시에 등장하는 “나는 백 년의 무명을 견딜 것이다” 같은 철없는 폼은 계속 재고 싶다.

신동옥 : 그 다짐 함께 간직하겠다. 오랜 시간 고생 많으셨다.

이재훈 : 고맙다. 오늘이 기억날 것이다.

2002년 이즈음, ‘현대시동인상’ 시상식장이다. 머리는 삭발을 하고 붉은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는, 커단 화분에 앉아 호프를 먹었다. 대학로 비어할레 3층 화분 위에서 형과 첫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돌아가고 술집 불이 꺼지고 보도블록에서 새벽 훈김이 올라오는데, 무슨 열병에 들떴는지 근처에 여관을 잡기로 한다. 함기석, 김태형, 김참, 정재학, 김언, 이재훈 형들 틈에 함께였다. 태형 형이 앞장섰다. 모두들 아스팔트 한 가운데로 스크럼을 짜듯 나란히 허청허청 느릿느릿 폴랑 폴랑 걸었다. 그러고는 서울대병원 뒤쪽 여인숙 2~3인실에 들었다. 재훈 형과 재학 형과 나는 카운터 밑으로 주인 몰래 기어들어간다. 염소 똥만한 방에 장정 일곱이 ‘빤쓰’만 덜렁 입고 앉아 할 말은 무에 그리도 많은지. 새벽 어스름 재훈 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가 막 뜨는 좁은 골목길로 재훈 형이 나서자 ‘빤스’만 입은 장정 몇이, 어디 먼 길 떠나는 사람 보내는 모양 술기운에 아득한 손을 오래 흔들고 섰던 거다. 재훈 형은 이 날의 멤버들을 일러 ‘첫정’이라고 부른다.
내가 형을 처음 만나고 함께 밤을 지새운 다음날, 형은 전농동 시립대 후문 ‘관방’에서 또 어디로 집을 옮긴 거다. 그리하여 내게 남은 형의 첫인상은, 해가 뜰 무렵 혼자 떠나는 사람, 무시로 집을 옮기는 사람, 좁은 어깨에 하늘같은 것을 잔뜩 얹은 사람, 그러고도 내처 흔들리며 걷는 사람…… 형이 좋아하는 헤르만 헤세, 헤세가 쓴 ‘크눌프’ 같은 사람. 형이 어디서 어디로 방을 옮기고 서가를 옮기는 동안 내가 함께 한 셈이 된다. 형은 형대로 아우 녀석이 어디서 어디로 옮겨서 빌빌대는 내내 함께 한 셈이 된다. 세포가 자라고 커서 소멸하는 저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시공간 감각으로 그렇게 형은 ‘부동의 포에지’를 짊어지고 또 옮기며 사십 세에 이른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와 지난 십년 동안의 형을 돌이킨대도 형의 장난기 가득한 빙그레 웃음 한방이면 내사 와그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 그러니 내편에 실재하는 형이라는 품 넓은 웃음―실재의 포에지를 가만 가만 들여다보는 수밖에. 부디 이재훈이라는 그노시스엔 바닥없이 천공이 깊어라. 이재훈이라는 연금술사에게는 촉매 없이 치환이 자재하라. 기도를 더하며 함께 하는 것. 함께 할 수 있어 내내 고맙고 든든한 것.



신동옥 | 시인. 1977년 전남 고흥 출생.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가 있음.


_ <현대시> 2011년 6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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