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혁
아래의 시 역시 축축하게 젖으며 출구를 찾는 현대인의 영혼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윤의섭의 방식과는 달리 서정적으로, 리얼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음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
현대인의 삶, 즉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을, 끝없이 밀려드는 새로움의 파도에 휩쓸리며 밤낮 없이 지하철을 갈아 타며 출퇴근하는 저 시인의 모습이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하철 안은 평범한 현대인이 거주하다시피 하는, 그래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 공간이다. 문은 새롭게 계속 열리고 있지만, 우리가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할 출구는 지하철엔 없다. 지하철에서의 삶은 ‘터널’ 속의 삶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공간 안에서 어떤 출구를 찾는 주관적인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갈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그가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길은 눈을 감자 “어둠이 긴 불빝을 뱉어” 내면서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질 때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때의 시간은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다. 아마도 이 시공간은 시인의 무의식적 내면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어둠이 불빛을 뱉어내는 공간이면서 기계적 시간과는 무관한 어떤 소리만이 융합되면서 생성되는 시간이기에 그렇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지각을 거둔다는 것이다. 감각은 대상으로부터 철회되어 지각되지 않았던 내면의 움직임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어둠이 뱉은 빛, 시간의 회오리 속에서 섞여드는 소리들의 움직임. 그 움직임들이 무의식적으로 시인을 인도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 시인은 자신이 현대 바깥의 어느 곳에서 온 ‘첩자’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곧 그 생각을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라며 수정한다. “그리운 얼굴”과 “기계음 소리”, 즉 지하철 바퀴가 내는 소리 때문이다. 시인은 무의식적 공가넹 올라타고 있다. 하지만 드러나는 것은 “서서히 물드는” 풍경, 그립지만 “잊혀진 얼굴들”이다. 그 얼굴들은 시인에게 아픔을 느끼게 한다. 아마 시인은 그들과 헤어져야만 했을 것이리라. 터널 속, 지하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삶은 이들과 시인을 갈라 놓았으리라. 현대가 낳은 이 이별의 폭력성은 풍경―얼굴들을 멍의 푸른색으로 물들인다. 멍이 주는 통증 때문일까? 어둠이 낳았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그리운 얼굴은 “노란 불꽅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때, 시인 외부의 사물들이 시인의 감각을 다시 자극하기 시작한다. 바퀴가 내는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기계음이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졌던, 시인이 체험했을 사랑의 파괴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무의식적 내면 공간의 이미지들과 공격적으로 내면에 침투해 들어오는 외부 대상의 감각들이 서로 교차해 얽혀 들어간다. 즉 “내 사랑”은 “저 바퀴”로 여겨진다. 사랑은 바퀴처럼 “사각거리”다가 꼭 바퀴에 깔려 으깨어지듯이 망가져버렸다. 시인이 자신을 “그냥 먼지였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진행된 상념 때문이리라. 으깨어진 사랑은 자신마저도 으깨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일상 공간에서 탈출하여 ‘첩자’가 되고자 한 시인은 결국 자신이 “칵탈당하고 소외되”어 상처받은 ‘먼지’와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탈출의 시도는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한 느낌만을 줄 뿐이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함 모험이었다는” 소문은 “거짓된” 것이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눈을 감았을 때 잠깐 열린 출구는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시인은 그 길에로 “들어갈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이때 또 다른 새로운 문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시인은 이 문으로 나가 또다시 출구 없는 터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 낭만주의자는, 너무나 상처 입고 있어 이 세계를 결국 탈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시는 리얼하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삶을 꿈꾸어보며 산다. 하지만 그 꿈은 곧 현실에 부딪쳐 부서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꿈꾸기는 우리를 더욱 아프게 한다. 그것이 이 터널 속에서의 현실이다. 현재로서는, 사실 무의식적 상상의 세계가 터널의 현실을 이겨낼 수 없다.
시인은 그 비극적인 과정을 일상 속에서 포착하여 솔직한 태도로 드러낸다. 시인은 무의식적 세계로 초월하지 않는다. 꿈이 패배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드러낸다. 그렇다고 시인이 이 ‘터널’의 현실을 수락했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는 그 비극적인 패배의 진실을 기록하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그 터널의 세계와의 또다른 싸움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애지], 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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