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숙하면서도 낯선, 우리들의 명왕성
이재훈·신철규
사람 이전부터 지구 이전부터
우주를 떠돌았을 천형의 몸.
―「눈물로 돌을 만든다」
이재훈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시인이다. 그가 시단의 여러 곳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이미 등단을 해서 시인이라는 직함을 얻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그를 마주친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마주쳤다고 해서 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시세계의 경향이나 연배를 막론하고 시를 쓰는 누구나에게 관심과 열성을 가지고 다가가며 호의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시골 동네의 입구에 선 느티나무처럼 그는 굳건하면서도 편안하게 서서 우리를 환대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그의 시를 꼼꼼히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시세계가 서정이나 실험, 전통과 모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거나 묘한 충돌의 지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중간한 자리는 여러 사람을 품을 수 있게 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그 색과 빛을 한눈에 알아보거나 손쉽게 규정하기 힘든 자리이기도 하다. 그는 어쩌면 명왕성처럼 가장 어둡고 먼 자리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언제나 그 경계 바깥으로 밀고 나가는, 다시 말해 경계를 넓히는 명왕성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신: 장마가 물러가고 무더위가 계속됩니다. 무더위 잘 넘기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방학을 맞아 조금은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계실 듯한데 근황이 궁금합니다. 담양에 있는 ‘글을 낳는 집’에서 한동안 머물기도 하셨던 것으로 들었고요. 동네 주민으로만 간간이 뵙다가 이렇게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대면하니 어색하기도 합니다. (웃음)
이: 신철규 시인이 같은 동네 주민이어서 너무 좋습니다. 슬리퍼를 끌고 나와서도 볼 수 있는 사이니까요. 이런 정담의 자리에 함께 해주어 감사드립니다. 방학을 맞아 담양 ‘글을 낳는 집’ 집필실에서 3주간 머물렀습니다. 산적한 이런저런 글을 정리하고 쉬기도 하면서 잘 보내다 왔습니다. 폭우가 많이 내려서 밤새 폭포 같은 빗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시골의 밤은 모든 소리가 선명해지는 시간이었지요.
신: 정갈하고 고요한 곳에서 무더위도 좀 피하시고 글도 쓰시고 부럽습니다. ‘글을 낳는 집’은 저도 언젠가 한번 머무르고 싶은 곳이에요.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곳에서 오래 자라지는 않고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사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한 삶, 그리고 집안의 종교적 배경이 문학을 접하고 흠모하게 된 계기로 작동되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 문학하는 또는 글 쓰는 삶으로의 이행은 자연스러웠습니까. 기독교적 삶의 테두리에 대한 저항도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나요? 가장 강렬했던 시적 경험 또는 시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킨 경험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초등학교 때까지는 강원도 여러 곳에서 가장 완전한 산골소년으로 자랐습니다. 이후 경북을 거쳐 충남 논산에서 가장 오래 거주하였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네요. 어린 시절 자주 옮겨 다닌 탓에 늘 불안했습니다. 적응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적응을 포기해 버렸지요. 돌이켜보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시간들로 채워졌습니다. 늘 현재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옛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으니까요. 편지가 글쓰기 훈련이 된 셈이지요. 사춘기가 되면서 숙명처럼 여겼던 신앙과 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저항이 문학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문학보다 신학과 철학책을 더 많이 읽었으니까요. 시는 스무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무 살 때부터 투고도 시작했고요. 가장 강렬했던 시적 충동은 헤르만 헤세였어요. 헤세의 “시인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는 말로부터 “너는 완벽한 교훈을 동경하지 말고 너 자신의 완성을 동경하라”는 말을 노트에 매번 적으면서 시를 썼어요.
신: 저는 스무 살까지 제가 나고 자란 곳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삶이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적응을 포기해버렸다’는 말이 신기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누그러뜨리고 다른 환경에 스며들었다는 뜻으로도 읽히지만 적응에 대한 열망 없이 자신을 지켜내고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어떤 막연한 갈망과 그리움이 동경을 낫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스무 살 때 시를 시작하면서 투고도 했다니 조숙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시에 투신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지방 소도시에서 대학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압니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와 졸업 무렵 등단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문학 공부를 치열하게 하는 데 영향을 준 스승이 있으신가요? 파란만장한 청춘기를 보내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혹독한 방랑기와 치열했던 수업 시대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부모님께 끌려 내려왔어요. 나또한 더 방황할 명분도 없었고. 지방의 신설 대학에 반강제로 입학을 했는데 적응을 못해 군대로 도망갔습니다. 군 제대 후 복학해서부터 공부도 습작도 가장 치열하게 했었죠. 당시 구수경 교수님, 우찬제 교수님 연구실 방문 밑에 습작시를 매주 밀어 넣었고요. 등단 후 김유중 교수님 수업을 청강하면서 따라다녔고. 도서관의 모든 책에 손때를 묻혀 놓았고 시심문학회를 이끌면서 온몸을 불태웠던 시절이었습니다. 하하.
신: 도서관의 모든 책에 손때를 묻혔다고 할 정도로 책을 잡다하게 그리고 많이 읽으셨다는 것인가요? 습작기의 시에 대한 선생님들의 평가는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칭찬만 받기는 힘드니까요. 너무 열성적인 학생이셔서 선생님들께서 부담스러워 하셨을 수도 있고요. (웃음)
등단을 하면서 서울살이를 시작하신 건가요? 낯선 도시 속으로의 틈입은 신기하면서도 상당히 불편한, 다시 말해 이방인적 자의식을 형성하기도 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최초의 말’을 잃는 것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초의 말’이라는 것을 새롭게 자각하는 경험이기도 했을 것이고요.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려는 사람은 이미 그 뿌리가 없거나 잘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시겠지만 습작 시절은 어떠셨나요?
이: 습작 시절에는 머릿속에 온통 문학밖에 없었죠. 시도 소설도 함께 썼고요. 최근 문예지, 시집, 소설집뿐 아니라 동서양 고전들도 가장 많이 읽었던 시절입니다. 포악하고 왕성한 대식가였죠. 젊은 시절 제게 도시는 신나고 황홀했습니다. 매연 냄새를 맡고 싶어 시내를 돌아다니고 한강에 자주 나갔죠. 온갖 아르바이트와 서울의 모든 험한 주거 형태를 경험하고 도시를 파란만장하게 소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덧 도시에 지쳐갈 때쯤 나의 시원과 최초의 말이 그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신: 첫 시집에는 아득한 시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은 지리멸렬한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겠지요. 그 반대편엔 초원과 사막과 밤하늘, 그리고 공중 정원이 있고요. 현실의 말, 현실에 닿는 말은 공허할 뿐이라는 자의식 때문에 분노로 가득한 현실을 넘어선 예언의 소리 또는 ‘최초의 말’을 찾는 작업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허공에 산화되어 사라지는 말을 만들어냅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말을 배웠습니다.”(「기타가 있는 궁전」) 하나의 믿음을 강요하는 정통 교리를 거부한 이교도, 방황하는 유목민 또는 미아로서의 정체성을 일찍부터 체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밖으로 내뱉지 못해 안으로 “고여 있는 말”을 찾는 것, 그것을 길어 올리는 것, 그 말에 대한 목마름이 주요한 시적 추동력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계가 융화하는 서정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는 자의식이 초기부터 강하게 작동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첫 시집에는 형이상학적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내면화되었던 종교적 기표와 철학적 질문들이 언어로 튀어나왔는데요. 시집을 내고 보니 그런 시어가 많이 쓰였다는 걸 알았죠. 젊었을 때여서인지 현실의 언어들은 뭔가 시시해보이고 재미가 없었어요. 먼 우주에 대고 신나게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보편적인 크리스천입니다. 나이롱 신자이긴 합니다만. 이십대 시절 종교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들이 이곳저곳을 배회하도록 만들었어요. 이단, 해방신학, 에큐메니컬, 그노시즘, 오쇼 라즈니쉬 등을 기웃거리며 동냥했던 지적 체험들이 시적 언어로 나왔지 싶습니다. 하지만 물을 마셔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어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시원에 대한 질문들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죠. 물리적으로 늘 떠돌면서 유목민이나 이방인처럼 살았는데 정신적으로도 늘 방황하거나 떠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척 엄살이 심했던 때이기도 했죠.
신: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는 이러한 초기시의 주체가 세속도시의 핍박한 현실로 내려앉은 또는 현실에 깊이 밀착하는 시들로 묶여 있는 것 같습니다. 신화적인 낭만의 세계와 궁핍한 현실의 세계를 교차적으로 그려낸 「월곡 그리고 산타쿠르즈」가 대표적일 것 같고요. 미궁처럼 답답한 세계에서 시인은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라며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가늠합니다. ‘첩자’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활동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면, ‘먼지’는 존재감이 없이 부유하는 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카프카적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그것을 버티기 위해 ‘몽상’과 ‘환(幻)’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 도시에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결혼도 했고 생활도 해야 했고 아이도 키워야 했으니까요. 우주가 아니라 도시가 내가 버텨야 할 순례의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현실로 내려오는 시가 쓰인 것이죠. 시는 몸에서 빠져나온 언어로 쓰니까요. 신림이나 월곡이 내가 살았던 동네였는데 골목길을 산책하면서 많은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산책은 육체적인 움직임이지만 중요한 정신적인 움직임이기도 했어요. 시적인 사유는 일상을 벗어나는 경우도 많은데, 제게는 몽상과 환이 그런 경우죠. 월곡의 골목길이 장 그르니에가 알제리의 산타크루즈 골목길로 변화하기도 하고, 신림의 보도블록 아래에서 나무들의 신음이 들리기도 했죠. 「명왕성 되다」는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쓴 시이고요. 도시의 삶을 견디는 시간이 명왕성에서 지구에 파견된 ‘첩자’라는 엉뚱한 생각을 낳기도 한 것이죠.
신: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의 변신 모티프를 지나 작년에 출간된 생물학적인 눈물에 이르러서는 좀더 냉혹한 현실 인식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각적 현실에서 비롯된 연상의 중첩과 연쇄를 거쳐 도출된 선언적 명제들은 ‘허무’를 강하게 내장한 묵시론적 전언으로 집약됩니다. 가령, “몰락의 길에는 비상구가 없다.”(「생물학적인 눈물」)는 것처럼요. 첫 시집 이후 나온 시집들에 실린 거의 모든 시들에는 마침표(온점)가 찍혀 있습니다. 비유에 기대기보다는 간명하고 정확한 진술의 힘이 느껴지는데, 명료하면서도 완결된 문장에 대한 욕망이 그것을 추동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섣부른 관념의 표출이라기보다는 관찰과 응시 속에서 걸러낸 묵직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적 정황들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에 대한 이미지와 사건들이 흘러가다가 어떤 한 문장에서 멈칫하게 만들지요. 그것이 어쩌면 “사제의 언어”(송종원)인지도 모르고요. 감정적 언술로 세상을 뒤덮거나 색칠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경로를 따라가다 맞닥뜨린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마주할 때의 낯선 충격이 매력적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인식이 인간과 세계를 읽는 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생물학적’이라는 것은 어떤 뜻으로 붙이신 건가요?
이: 허무는 제 시의 또 다른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저는 허무도 긍정적인 정서라고 보거든요. 허무는 의지가 있는 것이고, 가장 힘들 때는 허무에 빠질 때가 아니라 무기력할 때인 것 같아요. 아무튼 현실 속에서 사제를 꿈꾸는 언어로 변화된 것 같고요. 이전보다 이미지가 더 많이 쓰였어요. 마침표를 찍기 시작한 것은 몇 가지 생각이 있는데요. 시도 문장이고 싶다는 것, 완미한 문장으로 리듬을 만들고 싶다는 것, 마침표의 휴지가 주는 침묵을 누리고 싶은 것 등등인데요. 더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안 찍기 때문에 찍는 게 더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마침표를 찍다 보니 안 찍으면 자꾸 중얼거리게 되고, 말이 숨어드는 것 같고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침표를 찍으니 시가 더 잘 써져서겠죠? 생물학적이라는 말을 왜 붙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다만 눈물은 흘리고 싶어서 흘리는 게 아니고 흘리고 싶지 않아도 흘리잖아요. 그런 생물학적이라는 의미를 감정과 사물에도 모두 부표처럼 붙이고 싶었어요. 아직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겠죠. 바다가 침묵하다가 분노하는 이유 같은 것. 그걸 과학적으로 알고 싶지 않고 다른 서사를 알고 싶은 것이죠. 그런 이미지가 벼락처럼 가슴에 와 닿은 느낌이 인간과 세계를 읽는 작은 틀이라면 틀이지 싶습니다.
신: 벼락처럼 와 닿는 이미지를 끌고 가는 사유의 힘이 선배님 시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문체상으로 따지면 관념적이면서도 묵직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유치환, 김구용 등의 시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명징한 언술과 관념적 자의식이 지배적인 유치환, 심오한 언술과 난해한 환상이 지배적인 김구용, 이런 시인들을 나름대로 사사한 것입니까. 이 시인들의 시에 대한 압력이 자신의 시에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자신의 문학에 강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시인 또는 예술가가 있으신지요?
이: 유치환은 정말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생명의 서」는 너무 멋있어서 학창시절 외우고 다니며 술자리에서 낭송도 하곤 했죠. 유장한 관념어를 매력적으로 사용하는 시인이잖아요. 김구용은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들춰보았고요. 하지만 이런 큰 시인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겠지요. 습작 시절에는 헤르만 헤세, 카프카, 릴케, 장 그르니에, 이성복, 정현종, 이승훈, 이승우를 너무 좋아했어요. 또한 매 시절마다 여러 시인들을 한 번씩 짝사랑하며 강한 문학적 동기를 부여받았죠.
신: 시를 퇴고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시를 퇴고하다가 어느 때 ‘이제 됐다’라는 느낌이 드는지요?
이: 모든 시가 다 다릅니다. 퇴고를 하지 않은 시, 퇴고를 여러 번 한 시, 퇴고를 하다가 버린 시 등. 퇴고를 할 때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소리 내어 읽을 때 많은 게 보이거든요. ‘이제 됐다’는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늘 부족하죠. 하지만 지금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신: 요새 저의 가장 큰 고민이기도 해서 여쭤보고 싶은데, 선배님께서는 시집 이후 새롭게 시를 써나가는 과정이실 텐데 시집을 내고 나서 슬럼프 같은 것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그 이전과는 다른 시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을 것이고, 다른 시인들의 시작 방향과의 차별화를 위해 새로운 시적 모험을 감행하고 싶다는 욕망 또한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신철규 시인도 잘 아시면서. 슬럼프는 매번 있죠. 요즘은 슬럼프 없을 때가 없는 것 같아요. 하하. 이삼십 대에는 노트에 손만 갖다 대도 시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밤새 끙끙대며 한두 줄 쓰다가 덮어버리잖아요.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만 앞서니 매번 좌절하고, 또 다시 끄적거리고. 다른 방법이나 방향은 없을까도 매번 고민하고. 시는 평생 버릴 수 없는 나쁜 애인인 거죠.
신: 나쁜 애인에게 더 끌리기도 하니까요. 편안하고 무난한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이 시를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웃음) 이번에 발표하신 신작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지요. 세 편의 신작과 두 편의 근작, 그리고 시론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최근작들의 중심 소재는 한눈에 보아도 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눈물로 돌을 만든다」는 돌-인간-시인을 한 자리에 놓는 유비적 사고가 모티브가 된 듯합니다. 눈물이 사람을 만들고 그 눈물이 사람이 갈 길을 만들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니 결국 시인은 눈물의 사제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 눈물은 몸 안을 돌고 영혼을 살아 있게 하는데 돌은 ‘천형의 몸’으로 상처를 안으로 품으면서 더욱 단단해집니다. 태초에 돌이 있고 눈물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돌은 별의 사체나 유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바뀌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우리 곁에 언제나 가난하게 머무릅니다. “죽기 전까지 함께할 것들이 나를 살린다.”(「극빈의 돌」) 시인은 그런 돌을 껴안고 품고 그 곁에 있으면서 돌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돌’ 연작은 어떤 뜻에서 시도하게 되신 건가요?
이: 돌을 소재로 한 시편들이 이전에도 많이 있었죠. 어쩌면 흔한 소재이기도 하고, 흔하기 때문에 가장 쓰기 어려운 소재이기도 하고요. 자연스럽게 몇 편이 써졌는데 자꾸 할 말이 더 생기는 겁니다. 돌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 하고 감탄사가 터질 때가 있어요. 돌이라는 소재에 제가 하고 싶은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죠. 그래서 실패할지도 모르는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퐁주처럼 사물시를 제대로 한번 써보고 싶었거든요.
신: 저도 사물시에 대한 욕망이 있는데 적절하고 간절한 소재가 잘 다가오지 않아서 시도를 못 하고 있어요. 저 또한 프란시스 퐁주의 「비누」나 「양파」 같은 시를 보면서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대한 길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돌’ 연작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그리고 마무리될지 관심 가지고 지켜보겠습니다.
요즘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늙어감의 기미는 조금씩 다가오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려는 충동이 순간순간 치솟을 때마다 이제 난 그럴 때가 아니야, 라며 다독거리게 되지요. 그리고 뭔가 더 싸우지 못하고 일종의 타협을 하게 되는 내 자신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육체적으로는 힘이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괜한 조바심이나 걱정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마흔 살 무렵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의 자서에서 “이제 내 바람은 멋있게 늙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멋있게’ 늙고 계신가요? 멋있게 늙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흔히 사십대를 기우는 나이라고 합니다. ‘기면서 울고 울면서 기는’(「아직 사십대」) 나이가 사십대인지도 모르겠어요.
이: 멋있게 늙는 바람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아직 멀었고요. 욕망이 아직 많아요. 아직도 기면서 울고 울면서 기고 있어요. 삶도 매번 불안하고, 지치고, 평화의 시간이 잘 없습니다. 평화를 누리는 어른이 진정한 어른일 것 같아서요. 그런 늙음에 다다르고 싶습니다. 아직은 먼 이야기인 것 같아요. 더 나이가 들면 키케로의 늙음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않을까요. 골목길에 있는 슈퍼 평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시간. 그 시간을 가장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물론 이것도 모두 비유이긴 합니다.
시: 선배님을 만나면 항상 최근에 나온 시집이나 오래 전에 나온 희귀한 시집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가 느낀 것은 시를 보는 안목이 젊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어느 정도 시를 보는 눈이 고정되어버려서 적당히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여지는 것은 내팽개치는 쪽인데도 선배님은 여전히 그것들과 함께 가려는 책임감으로, 그리고 읽는 기쁨으로 젊은 시들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당함’은 시에서 가장 피해야 할 덕목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젊은 시는 깨부수고 깨지고 폭발하고 자멸하는 지점이 있어야 하는데 제 시는 좀 나이 들어 보여요. 최근의 젊은 시들이 한편으로는 장형화되면서 연상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데 조금은 소모적이거나 설명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평한 언어로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사소하고 내밀한 취향을 드러내면서 미묘한 기분을 표출하는 데 그치고 만다는 생각도 듭니다. 큰 울림이나 낯선 지각을 끌어내기에 오래 걸리는 시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최근 시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시를 읽는 일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기도 하지만 ‘시 읽는 것을 생활화하자’라는 생각으로 읽습니다. 제가 학기 중에는 지방을 매번 오가다 보니 주로 이동하면서 많이 읽고요. 소파에 누워서도 읽고. 지하철에서도 읽고요. 지하철에서 시집 읽는 분을 만나면 손잡고 인사라고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리고 제가 ‘상상스콜라’라는 창작반을 운영하고 있어서 더욱 최근의 많은 시를 읽으려고 노력하죠. 감각이 뒤떨어지면 안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가장 빨리 변화하는 언어적 감수성이 시인 것 같아요. 젊은 시인들의 시는 그런 게 재미있죠. 그런데 저도 이제 아재가 되었는지 이런 것도 시가 되는구나 하고 중얼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의 고정관념을 깨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시 언어의 스펙트럼은 일반적 언어와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니까요. 함께 가려는 책임감보다는 그냥 좋아서 하는 겁니다. 제가 뭘 또 책임지겠어요. 너나 잘하세요, 란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시인의 가장 큰 고급 독자는 시인들이니까요. 독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죠. 그리고 신철규 시인의 시는 절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으니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하하.
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작년 연말에 비평집이 묶여 나오기도 했지만 또 다른 책이나 시집 등도 준비하고 계신 것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이: 올 하반기에는 책이 세 권 나올 예정입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출간이 몰리게 되었어요. 모두 연기가 불가능해서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연구서, 에세이, 시집이 연이어 나올 예정입니다.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강의하고, 글 쓰고, 걷고. 그렇게 가을이 오고 겨울을 맞을 것 같습니다. 신철규 시인과 이런 자리를 해서 잊지 못할 큰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시를 꼼꼼히 읽어주시고 깊은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받고 자세를 고쳐 않았습니다. 우매한 답이라도 잘 받아주셔서 또 감사하고요. 이제 한잔 하러 가시죠. 하하.
신: 올해는 결실이 풍성한 해가 되겠습니다. 책 출간을 핑계 삼아 또 동네에서 몇 번의 술자리를 예약해야겠습니다. 정말 축하드리고 잘 마무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목이 컬컬하네요. 얼른 시원한 술로 목을 좀 축여야겠습니다. 긴 시간 시와 삶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무더위 시원하게 나세요, 선배님.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명왕성 되다」
이재훈 시인은 자신의 빛을 꺼둘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빛을 과시하거나 자랑하기보다는 은은하게 빛나면서 다른 이들이 서 있는 자리를 돋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그의 시도 화려하기보다는 묵직하게 내리누르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빛을 드러낸다. 그는 ‘부패해가는 말들’과 싸우면서 ‘사람의 말’을 찾고 말의 배후에 오래 시선을 두면서 직절적인 문장을 길러낸다. 그는 이 세계와 인간에게 미련 없는 그리움을 던진다. 그것이 돌아오지 않는 혼자만의 호소로 그칠지라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직업’인 시인이라는 소명을 한시도 놓지 않을 것이다.
늦은 밤, 그는 뜬금없이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철규야, 고맙다.’ 나는 그런 문자를 받으면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해서 덜컥 놀라면서 전화를 건다. 그 문자가, 늦었지만 혹시 시간 되면 동네 놀이터에서 캔맥주나 마실까, 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 거라 예상하면서도. 그는 볼 일이나 약속 때문에 서울에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그냥 생각나서, 라고 답을 한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통화를 하면서 우리 집 근처 골목에 계신가 하고 창밖을 본다. 아니야, 집에 다 왔어. 우리의 즉석 만남이 성사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나는 그가 아무 일 없이 집에 잘 들어가시기를 빈다. 다음에 뵈어요, 선배님. 흐린 밤하늘에 첩자처럼, 먼지처럼 별 하나가 희미하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