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로부터 오늘, 오늘로부터 내일


류수연(문학평론가)



2. 우리 모두의 생물학적인 슬픔 – 이재훈의 '생물학적인 눈물'

이시영 시인의 세계가 일상에서 문득 포착된 자연의 찰나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고자 했다면, 이재훈 시인의 새 시집 '생물학적인 눈물'(문학동네, 2021)이 응시하고 있는 세계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 그 자체이다. 시인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인간이다.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맑았던 하늘인데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지방 소도시의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가혹하게 막힌다.
모두 저마다 집으로 가거나
외로움을 달랠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저녁 일터로 가는 길일 것이다.
휑한 마음 한구석에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진다.
매일 보따리를 들고 어딘가로 나서는
장사꾼의 저녁이 궁금하다.
언제쯤 집에 당도할까.
쉬어야 할 집은 멀고
목은 더 컬컬해진다.
버스 뒷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사연인지 생각하다
뒤로 가서 가녀린 등을 토닥거려주고 싶지만
모르는 척 그냥 눈을 감는다.
도착할 집은 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가까운 막걸리집부터 찾을 것이다.
컬컬한 목이 바짝 마른다.
- 「퇴근」 전문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는 길, 휴식이 되어야 할 집은 아직 멀기만 하다. 버스를 채운 사람들의 모습조차 크게 다르지 않다. 집으로 돌아가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가거나, 아니면 또 다른 일터로 향하는 길. 시인은 그곳에서 문득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다. 이 외로움은 사실 그리 지독하거나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것은 이미 오래도록 익숙하게, 삶의 매순간마다 마주쳐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목이 바짝 마르도록’ 긴장되고 힘겨운 것은, 그것이 영원히 극복되지 않을 근원적 고통임을 보여준다.
과장되지 않게,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게 시인의 일상에 배어들어 있는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진원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을 운명적인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기원은 아무래도 시인의 이전 시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꽃 속에 산다.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는다.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올 때

지옥을 보려고 온 사람들
예쁘다고 기념할 때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랄 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진다.
- 「벌레」 전문

이재훈의 전작 󰡔벌레 신화󰡕에 실린 「벌레」는 기괴하기보다는 애잔하다. 벌레의 존재가 인지되는 순간은 벌레(혹은 벌레임을 각성한)들이 ‘서로 눈이 마주치며’ 놀라는 바로 그 때이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느 순간에 서로와 조우하는가이다. 그들만의 지옥을 벗어나자 오히려 혐오의 지옥이 펼쳐지는 이 모순된 순간. 시인은 한 마리의 벌레가 된 자신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의 계절이, 세계가 변화한다.

바람은 바닷물을 뒤집고
바닷물을 따라 물고기들이 솟구친다.
햇빛에 몸을 기울이는 수중식물이
바닷물끼리 부딪히는 협곡에 숨어
줄기에 공기를 불어넣는다.
몰락의 길에는 비상구가 없다.
오랜 사랑이 없고 도륙과 생존만이
물속의 시간을 지배한다.
맑은 하늘 아래 아이가 뛰어놀고
씨앗들이 바람을 따라 잉태하는 땅.
순수한 길을 걸었다는 어떤 시인의
추악한 옷가슴을 보았을 때
원시의 바다를 생각한다.
오직 생존만이 도덕인 바다의 꿈틀거림.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계절이 계속되고
가장 알량한 회개가 마음을 헤집는다.
수면 위로 솟구쳐올라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는
눈물벼락.
남몰래 땅속을 흐르는 물주머니가
천둥처럼 얼굴에 달라붙는다.
- 「생물학적인 눈물」 전문

시인이 지옥 바깥에서 만난 또 다른 지옥은 더욱 추악하다. ‘사랑은 이미 사라졌고 도륙과 생존만이 지배한다.’ 순수를 노래하는 시인조차 사실상 이 타락한 세계의 일원일 뿐, 그 어떤 순수도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저 타락과 자조만이 남았을 것 같은 그곳에서, 시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눈물’과 조우한다.
스스로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한 마음의 동요를, 그는 “가장 알량한 회개”라고 지칭한다. 어쩌면 그것은 이성이나 감정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것, 깊은 반성이나 공감이라기보다는 값싼 연민과 동정일지 모를……. 그리하여 오늘이 지나면 금세 잊혀져버릴 것들……. 차마 반성이라고 명명될 수조차 없는 찰나의 것. 
하지만 그 보잘 것 없었던 감정은 이내 그의 모든 것을 헤집는다. 폭풍이 된다. 거센 파도가 된다. 그리하여 온 얼굴을 메운 눈물이 된다. 그리고 이 눈물이야말로 지옥에서 우리를 견디게 했던 유일한 힘이었으며, 지옥 바깥에서 마주친 서로를 향한 지독한 연민과 공감의 언어였음이 다시금 환기된다. 이재훈의 시가 우리에게 속 깊은 위로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눈물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나오종 지닌 것”(김현승의 「눈물」)이므로.

3. 또 다른 위로의 시간을 맞이하며

2021년 12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지난 2년보다 더 암울하다. 2022년 1월, 우리가 마주하게 될 현실은 이보다 더 암울할지 모른다는 우울한 관측이 더 많다. 끝이 보일 듯 보일 듯 이어진 팬데믹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강탈당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도둑맞은 시간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고, 살아내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공백의 시간을 살아야 했지만, 그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는 것은 이전보다 훨씬 쉬운 일이 되었다. 서로를 향한 연민과 공간으로 그 공백을 채우고, 이 지옥의 시간을 함께 살아내었다는 사실 역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진실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좋은 시인이란 그러므로 귀가 쫑긋 솟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잉크병 얼어붙은 겨울밤 곱은 손 불며
이 모든 소리를 백지 위에 칠필로 꾹꾹 눌러쓸 것이다
- 이시영의 「듣는 사람」 부분

풀잎이 너를 쓴다.
멀리서 너를 읽는 소리가 들린다.
네 몸이 조각나 날린다.

우린 모두 피를 만드는 사람.
어떤 사람은 역사를 쓰고
어떤 사람은 일기를 쓰고
어떤 사람은 시를 쓴다.

새벽이 건너가는 소리 들린다.
거울을 보니 흰 수염이 가득하다.
- 이재훈의 「에다」 부분

그러므로 시인의 오늘에서 다시 시작하자.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가를 쓰는 일이며, 때로는 쓰지 않은 혹은 쓸 수 없는 그 무엇을 환기하는 일이다. 시인에게 그것은 그저 주어진 소명일 뿐이다. 그들이 하루를 살아가고 살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어쩌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전하는 위로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어제처럼 오늘을, 그리고 오늘처럼 내일을 살아가는 그 순간들 말이다.
지난 2년,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그리고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는 그런 시간을 살아왔다.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소명으로, 살아낸 어제와 살아가는 오늘과 살아갈 내일을 통해, 우리는 그 무엇보다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공백의 시간에 압도되지 말자. 서로를 향한 위로로 우리는 이미 그 공백을 채워왔으니 말이다. 

_ <현대시> 2022년 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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