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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8 비상
  2. 2008.01.28 난장

비상

시詩 2008. 2. 18. 13:45

이재훈


1. 겨울
이후, 꽃봉오리는 망울지지 않았다
나는 땅바닥을 기며
가만가만 숨 죽였다
딱딱한 땅에서 몇 오라기
풀을 지나칠 때
비로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짐작하지 마라
기어가다 만난 돌의 시간도
훔쳐보지 마라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에겐 연혁이 없다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권태로운 계절에
그렇게 한 백 년은 기다렸다

2. 오늘
이후, 아무 것도 태어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소멸하지 않았다
어떤 하늘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을 주었고 어떤 밤은 공중이 없는 하늘을 주었다 새벽녘 술이 깨어 일어나 보면 사방이 꽃천지고 앉은 자리마다 꽃자리일 때가 있다 그곳에서 연꽃 위를 기어가는 뱀을 지켜보다 혼절한 밤 다시 깨어 보면 뱀이 내 목을 휘감고 있다 휘영청 뜬 달에 내 몸을 비추어보며 깔깔 웃고 난 밤 아무 것도 태어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죽지 않았다

3. 유폐
이후, 누구에게 밟히거나
공중에 던져져도 괜찮았다
나는 자꾸 진화한다
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
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
썩은 내가 풀풀 날린다
죄 지은 손 하나 빌려
하늘에 돌을 힘껏 던진다
메아리 하나 아득하게 들리다가
하늘로부터 빙폭(氷瀑)이 서서히 내려와 깔린다
나는 배꼽을 움켜쥐고
아프고 흐트러진 머리를 움켜쥐고
차가운 흙 위에 앉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갇혀 있었다

4. 서울
이후, 한 어미의 뱃속을 만나기 전부터
기다렸다 내 머리에 깃털을 꼽고
부싯돌을 따각따각 친다
발가벗은 몸으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도솔천인가 연옥인가
이 도시는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한겨울에도 태풍이 오는 곳
일찍 배운 증오로
뼈와 살을 태우는 곳
나는 죽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차가운 흙 위에 앉아
새들의 노래를 부른다

_ <시평>, 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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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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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

시詩 2008. 1. 28. 14:34

이재훈


1. 골짜기
빛의 동네다.
도로 위에 빛의 뼈들이 달그락거리고
뭉텅한 안개 몸을 뒤엎으며 흐느적거린다.
아무리 먹고 먹어도 배가 고프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달빛 교교한 언덕으로 올랐다.
하늘에 혀를 내밀었다.
달콤한 달빛으로 목을 축이는데
뒷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어떤 손.

2. 달
고요히 체념한 얼굴이다.
익숙한 손짓으로
제 눈과 코를 짓누른다.
애꾸눈이 된다.
먼지로 만들어진 얼굴.
아름다운 그림자를 가진 얼굴,
마지막 숨을 남겨 놓고 있다.
동살에 얼굴이 문드러져도
저렇게 늙어갈 수만 있다면.

3. 꼽추
새벽이 오면 늘 목이 막힌다.
내 등껍질에는 냄새가 난다.
고깃덩이가 익는 냄새.
빠른 걸음에 허벅지가 맞닿아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난다.
얼굴을 가린 채 희미한 빛을 바라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공기를 매만진다.
푸석푸석하고 누렇게 변한
빛의 몸.
달의 핏물이 배어 있다.

4. 묘지
날이 밝았다.
아침을 메우는 발자국 소리들.
귀가 따갑다.
귀를 막고 무릎을 꿇었다.
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구멍난 뼈에서 벌레가 기어나왔다.
깊은 땅 속에 박힌 손 하나.
골짜기에서 합창이 들렸다.

_ <시평>,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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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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