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의 봉인

시詩 2008. 1. 30. 10:53

이재훈


햇발에 눈을 뜨면
진흙 속에 누워 있었네
어스름한 구름 사이로
밤새 하늘을 날다 지친듯한
새의 다리가 언듯 보이네
피곤한 탓일까 병일까 생각하다
부드럽고 안락한 흙의 감촉에
자꾸만 잠이 오네
리모컨을 두드려 텔레비전을 켜자
사바나 초원에서 쫓겨난 마사이족이
물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네
피곤한 탓일까 병일까 생각하다
문 밖의 일들이 궁금해 뒤척여보지만
어느새 진흙의 손길이 온 몸을 쓰다듬네
춤이라도 춰볼까 몸을 일으키면
흙의 찰기가 내 발목을 쥐고 날 눕히네
유폐와 어둠의 아침

이집트의 술항아리와 미이라의 관(棺)에는
진흙이 발라져 있었지
앗수르에서 온 편지도 그렇게 봉인되었다지
내 입술은 봉인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고백들을 나불댔네
결국 슬픔이 되고 공허가 될 말들
입술 주위를 차지한 구순 염증들
간지럽고 따가운 존재로 남은
저, 징그러운 말들의 시체

갯벌에는 망울망울 숨구멍이 열려 있었네
풍경이 아니라 목숨을 위한 문(門)
그 구멍을 내 서툰 발로 짓이기곤 했네
진흙은 뜨거울수록 더욱 단단해져
억울한 죽음과 거짓된 약속과
세상을 지배하는 음모들이
진흙으로 마감된 시간 속에 묻히지
약을 먹고 진흙 뻘에서 춤을 추고
아무 고통도 없는 날을 보내고 싶네
암흑 속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싶네
향기로운 흙의 향기가
내 숨을 막을 때
모든 것과 이별하고 싶네

_ <시와세계>,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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