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패스

시詩 2008. 1. 24. 11:34


이재훈


어떤 경우, 시험이 아닌 고통도 있다.
겪지 않아도 되는 재해 같은 것.
악창 같은 것.
발바닥까지 닿는
나의 괴로움은 오늘로 족하다.
반지를 낀 여인의 손가락을 보면,
잘라버리고 싶다.
애인은 왜 이렇게 늦게 오는가.
폭포처럼, 떨어지는
고통을 질겅질겅 씹고,
엉겅퀴 줄기로 피부를 문지르고,
오늘도 슬럼가에 있는 작은 공장으로 가야 한다.
꺾인 무릎을 또 꺾어야 하는 게 삶의 지혜인 줄을 몰랐다.
먼지 풀풀 날리는, 공장 바닥에 앉아
나를 위해 기도한다던 개척교회 목사를 생각했다.
영생의 권태로움을 겪을 자신이 없다.
바닥을 긁어대는 저항의 소리 한 번 못내 봤다.
언제나 꿈처럼 저 혼자 빛나는
별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목이 따갑다, 목에서 쇳소리가 난다.
느린 전자오르간 소리에 맞춰
아주 성스럽게 한 여인의 피부를 도려낼 것이다.
난,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다.
사방엔 바람만 남아 있다.
바람이 분다.
차가운 혀가 내 뒷덜미를
슥 핥고 지나간다.

_ <다층>, 200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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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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