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향(歆饗)

시詩 2008. 1. 11. 17:14

이재훈


1.
신음이 들렸지. 햇살이 벌판에 누워 피를 쏟고 있었지. 땅 위가 흥건했지. 나는 새의 꿈을 꾸었어. 길들여지지 않은, 몸의 꿈. 시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지. 깃털의 자유, 먼지의 자유. 세상을 유랑하며 흙 위에 앉아 붉은 핏물을 빨아먹고 싶었지. 핏자국이 덕적덕적한 햇살의 겨드랑이에 달라붙어 먼 생애를 생각했어. 나는 나를 죽일 수 없을 거라고. 그리워서 울었던 것은 아니라고.

2.
풀숲에 소리가 고여 있다.
잎사귀를 헤치니 소리가 서로 머리를 깨물고 있다.
가련한 밤.
사각사각,
머리를 뜯어먹는 소리.
살곰살곰,
살인자를 찾는 발자국 소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고
빗방울도 없는
소리의 환幻.
향기를 빨아들여
영혼을 훔치는 아우성들.

3.
그냥 그런 바람이었지.
탄생도 구원도 없는 검은 소리가 내 몸에 와 잠겨.
싹이 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법궤를 들고
저 신산의 땅으로 걸어갔지.
징기스칸의 대초원으로, 무굴제국의 타지마할로
잉카의 마추픽추 언덕으로 모두 떠나가.
이제 세속적으로 살기 위해
가벼운 날개를 달 것이야.
물렁해져 가는 몸에
단단한 근육을 만들 거야.
슬픈 짐승의 뼈를 고아 먹고
십자가 가득한 도시의 밤을 먹을 거야.
아무 것도 거둘 수 없는 몸.
냄새나는 몸.
위로할 것 없는 몸.
깊숙한 어둠 속,
엉킨 조명 아래에서
단 한 번의 후회도 없이
내 몸에 불을 지르겠지.
훨훨 불타 벌판에 누워
노을이 되겠지.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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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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