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출근하는 폐인

시詩 2007. 12. 18. 15:29


이재훈


1.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 거울 앞의 수많은 표정들. 낯선 얼굴, 낯선 침묵.

2.
다른 말은 없다. 너를 자위케 하던 기호들. 새, 별, 그리고 꽃과 나무. 아무 생각없이 잠들 수 있었던 그대, 라는 말을 향해.

3.
기록하지도 나서지도 않았던 길에 대해. 악마의 다리를 건너는 법에 대해. 꽃의 길이 아닌, 모험의 길목에 대해. 협곡 위 아슬하게 나있는 다리에 대해. 이 땅과 영원히 이별할 수 있는 길들에 대해.

4.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캔맥주병.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냄새와 비둘기똥 냄새로부터.

5.
계곡의 하얀 물보라를 헤치고, 난파된 얼음 위에 올라서 저물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감상하고 싶다. 그러면 아주 쓸쓸하겠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무도 없이 고독하겠다.

6.
애초에 로마는 없었다.
그곳에 이르는 신비한 밤과 방황만 있을 뿐.

7.
바람이 부는 날.
출근길 지하철 입구에 눈 먼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녀의 귀에서 누렇게 익은 곡식 낱알을
새가 쪼아먹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런 소리의 길이
눈을 어지럽힌다.

8.
숭고한 저녁의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다
드디어 주장을 하고
외치고 울부짖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이었다.

_ 2007 문청 동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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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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