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방송에 나갔는지는 모르겠네. 작년 가을인데.
EBS라디오 <강성연의 시콘서트>에서 아래의 시를 낭송하고 짧게 코멘트 했었다.
이제 불혹에 대해 아무 느낌도 없는 나이가 되었음.^^
불혹
어른은 큰 소리내지 않는단다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겠지
담배 연기만 품어대며, 다 안다는 듯
끄덕끄덕대기만 하겠지
날 어른이라 부르는 손가락들
그 모든 비겁도 눈 감고
어떠한 격정에도 미혹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
이미 네 앞의 시간들은 결정된 것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에게
다리를 까딱거리고 딴지를 걸고 싶더라도
어른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한다
아직도 쓸쓸함을 사랑할 수 없나
차가운 거리를 헤매다 방안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때
내 몸에 남아 있는 허약한 온기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엎드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지만
엎드리는 일은 자신을 잊는 일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
불혹이라는 시는 제가 마흔을 넘어가면서 쓴 시입니다. 어딜 가서 나이 얘기를 잘 안하는데요. 서른을 넘길 때와 마흔을 넘길 때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서른 때에는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는데, 마흔이 되니 달라지더군요. 이제 나이 먹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마흔이 넘어가면서 꼭 ‘마흔’이라는 시간에 대해 시를 써보고자 생각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마흔’이라는 시는 많겠지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마흔의 의미가 또 있는 것이니까요. 마흔이 넘어가니 주변의 모든 분들이 이제 어른이 다 됐네, 라고 말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른이라는 것은 참으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눈물도, 그리움도, 외로움도, 꿈과 희망도 참아야 하고 비겁한 일도 모르는 척 넘기는 게 어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참아야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는 않고 싶습니다. 모두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겠지만 그런 어른이라면 어른이 되기 싫은 거지요. 차라리 엎드리라면 엎드리는 게 낫겠지요. 눈물도, 그리움도, 외로움도, 꿈도 희망도 참지 않는 어른이면 참 근사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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