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이재훈
1.
내가 편지를 처음 쓰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 1학년 즈음이다. 나는 낯설고 먼 동네에서 전학온 이방인이었다. 당시에는 전학온 학생이 드문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타향에서 온 얼굴이 희고 키가 작은 전학생을 놀려주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상한 별명을 만들어 내어 놀려대곤 했다. 짓궂은 친구들은 뒤에서 돌을 던지고 도망가기도 했다. 누가 별명을 지어냈으며 누가 돌을 던졌고 누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지 모두 알 수 있는 작은 동네였다.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논둑길을 걸으며 한없이 외로워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엄마가 사서 입혀준 멜빵바지가 창피했다. 친구들처럼 털털하게 아무 거나 입고 함께 풀피리를 불며 소 풀뜯기러 가고 싶었다. 뚝방에서는 늘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집에 가다 말고 뚝방에 앉아 소를 몰고 다니는 친구들을 오래도록 보는 날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얘기지만 당시엔 또래집단에 편입되지 못한 외로움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는 편지를 썼다. 떠나온 곳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혹시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나처럼 너희들도 전학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던 교회 누나에게도 편지를 썼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애들은 시간이 지나면 친해지게 마련이다. 나를 놀려대던 친구들은 친해지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놀려댔던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줄로만 알았던 게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무장해제되었다. 몇 달 동안 외로움에 지쳐있던 나에게 친구들은 샘물처럼 달았다.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미역을 감았고 함께 소 풀을 뜯겼다. 저녁나절엔 친구집 사랑방 아궁이에서 쇠죽이 끓는 구수한 냄새를 오래도록 맡았다. 억센 경상도 욕을 배웠고 친구들처럼 아무 옷이나 입고 동네를 쏘다녔다. 때론 범죄에 가까운 대량 서리를 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편지는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사춘기가 찾아왔다. 밤늦게까지 라디오를 켜놓고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았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유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잡히지 않는 방송이었다. 나는 ‘김희애의 인기가요’를 들었다. 늦은 밤에는 팝음악 방송을 들었다. 공테이프를 걸어 놓고 좋은 음악이 나오면 녹음을 했다. 그리고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번엔 방송국에 편지를 썼다.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한 내 그리움은 대상이 없는 막연한 것이었다. 방송국은 그런 내 그리움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편지지에 썼고, 노트에 썼고, 엽서에 썼고, 은행잎에 썼고, 티슈에 썼다. 내 그리움을 전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이 나의 편지지였다. 펜이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글씨체를 실험하며 썼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전학을 갔다. 그리고 또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편지는 그리움뿐만 아니라 존재의 궁금증에 대한 갈망을 담은 것이었다. 친구들은 답장을 쓰느라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질문들과 존재론적 고민들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망설였을 것이다.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게 중요했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편지를 쓰는 일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되었다. 아마 이십대까지는 계속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 편지들은 몇 개의 상자 속에 오래도록 보관되어 있었다. 시골집 책상 아래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다. 가끔씩 시골집에 들르면 그 편지들을 꺼내 보곤 했다. 아직 설익은 감정을 어찌할 바 몰라 서성대는 문장들이, 열망에 차서 흥분된 문장들이, 열등감에 휩싸여 자책하는 불안한 문장들이, 구원을 꿈꾸는 불가해한 내면의 문장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 편지를 꺼내 읽는 일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2.
스물 하고도 몇 해가 넘어갔다. 문학을 한다고 폼을 잡으며 허둥대던 시절이었다. 문학 쫌 할 것 같은 친구들이나 여학생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시를 썼고 시가 어떻냐고 물었다. 편지에 치기어린 문학론을 펼쳤고 문학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객기를 부렸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등단을 했다. 등단을 했다고 편지를 썼으며, 등단을 하니 더 괴롭다고 편지를 썼다. 시가 내 미래를 무엇 하나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시에 투정을 부렸다. 시 때문에 내가 이꼴이 되었다는 투정을 편지에 썼다. 어쩌면 괜찮다는 위로의 대답을 듣기 위해 투정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관한 편지상자가 불태워진 것은 이십대의 마지막이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명절에도 들르지 않았던 시골집에 오랜만에 들렀다. 그런데 편지상자가 없어졌다. 늘 책상 밑 깊숙이 놓여 있던 편지상자가 없어졌다.
“엄마. 내 편지상자 못 봤어요?”
“그거 다 태워버렸다.”
“뭐라고요? 아니. 그걸. 제게 말도 안하시고 태우다니요.”
“아. 너무 오래 돼서. 필요 없는 건줄 알고 태워버렸지. 중요한 건지 몰랐구나.”
어머니는 그 편지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일기까지도 훔쳐보시는 분인데 그 편지를 안 읽었을 리가 없었다. 아마 과거의 일들에 목매인 나의 모습이 보기 싫었으리라. 옛 추억에 젖어 찔끔거리는 아들의 모습이 안타까우셨으리라. 그리고 어머니의 병적일 만큼 깔끔한 성격도 한몫 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상자를 빨리 치워버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무튼 편지를 잃어버린 그날의 사건은 꽤 오랫동안 나를 옥죄었다. 내 추억의 대부분이 뭉텅 잘려나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편지를 계속 썼다.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꽤 남아 있었다.
내 스무 살은 노래였다. 거리에서 배운 노래가 목청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 여겼다. 천둥소리는 더 크게 들렸고, 몸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단 하나의 권능도 없이 숨소리 없는 거리에 서 있었다. 나는, 가볍게 다른 문을 열 수 있을까. 꿈도 없는 잠을 매일 잘 수 있을까. 내 손가락들이 들러붙어 물갈퀴가 되고 이빨은 사자처럼 송곳니만 사납게 솟아난다. 성 꼭대기에 올라 어둠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새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법을 배웠던가. 노래하는 법 말고는 배운 것이 없다. 눈 먼 한 마리의 새가 내 머리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새의 전생은 자유였다고 평원을 돌보던 파수꾼이었다고, 그 새가 법을 배웠다.
법을 배우는 순간, 나는 풀이 되었다.
하늘을 날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풀,
나는 오래 전 풀의 고독을 기억하고 있다.
― 이재훈,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 부분(<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나의 노래는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전에서 배운 노래를 편지에 옮겨 적었고, 거리에서 배운 노래를 편지에 옮겨 적었다. 내 존재의 고민과 환상의 빛깔과 삶의 고통들을 편지에 옮겨 적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편지 쓰는 일이 뜸해졌다.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성탄절 카드도 신년 카드도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 편지는 내 스무 살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지금은 사라진 어떤 흔적이 편지의 기억을 통해 내 청춘을 증언해주는 것만 같다. 편지로 주고받았던 오랜 기다림과 떨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봄날 비가 오는 밤이 되면 정말 오랜만에 손편지를 써봐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끄러워 부치지 못할 정념의 말들을 맘껏 써봐야겠다. 펜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부끄러운 문장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기다림의 문장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빗소리를 들어야겠다.
출처 : <문학사상>, 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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