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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04 신생의 사건으로서의 시_ 정과리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한다면 시가 다른 예술 장르와 구별해본다고 할 때, 시는 무엇보다도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다시 한다면, 앞자리에 놓인다는 것을 다른 말로 치환해보건대 시는 시원始原의 자리에 있으려고 한다, 탄생의 자리에 있고자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인 장 뤽 낭시Jean-Luc Nancy의 말을 인용해보면 더 확고해집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의미의 시원에 도달한다면, 그 방식은 ‘시적으로!’라는 방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시가 그런 도달의 수단 혹은 중개를 이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뜻인데, 즉 오직 그런 도달만이 시를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시는 그런 도달이 일어날 때에만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 말대로, 우리가 시를 쓴다는 것은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의미의 시원에 다다르는 행위라는 겁니다. 의미의 시원에 다다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의미의 시원 그 자체입니다. 좀 더 말을 바꿔보자면, 시를 쓴다는 것은 언제나 ‘신생의 사건’이 되려고 하는 충동과 관련된다고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항상 ‘신생의 사건’을 스스로 겪거나 체험하거나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

 

어쨌거나 프로이트가 생각할 때, 아이가 반복적으로 팽이를 던지는 행위는 쾌락원칙 너머에 있다고 봅니다. 쾌락원칙에 충실히 따르면 몇 번 하고 스스로 만족해야 되는데, 만족하지 못한다는 얘기죠.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가 있다, 이게 반복강박이죠. 쾌락원칙 너머의 이 반복강박은 ‘생의 충동’이 아니라 ‘죽음의 충동’과 관계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죽음의 충동’의 현장이 바로 앞서 읽었던 보들레르의 「여행」이라는 시입니다. “죽음이여,…(중략)… 닻을 올리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죽어야 다시 살아납니다. 죽지 않으면, 언제나 낡은 생의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낡은 생의 찌꺼기를 완전히 버려야지만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하잖아요.(웃음) 그러니까 죽되 죽지 않아야 합니다. 죽되 죽지 않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시 쓰기라는 얘기입니다. 시를 쓰는 것, 그게 언제나 ‘신생의 사건’이 되는 거라면, ‘신생의 사건’은 결국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완전히 새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꼭 시에만 있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에 유별나게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왜 유별나게 많은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시는 언제나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이기 때문이죠.

이 신생의 분출은 창조하는 자로서, 창조하는 행위로서, 창조하는 내용으로서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려는 욕망에 밀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은 새로워질 때에야 항상 나다워진다고 느낍니다. 신생은 나의 회복인 것입니다. 즉, 신생에 대한 충동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일성으로의 회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진짜 모습(true identity)의 세움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씀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진면목―진정한 자기 모습으로 도달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여느 시인들보다도 더 시적인 소설을 썼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는 가장 환상적인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언제나 ‘인공적인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다.” 현실에 대한 저항이 뭡니까?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거죠. 즉, 이 말은 시가 ‘자연스러움’(‘당연함’)의 회복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괴테도 이미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순수한 본질 안에서 고려된 시는 말(parole)도 예술―기술(art)도 아니다. 말이 아닌 것은, 시는 완성을 위해서 리듬과 노래와 육체의 운동과 시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이 아닌 것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le naturel)’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은 규칙들을 존중해야 하지만, 장인적 훈련의 억압적인 강제를 따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제나 영감이 피어오르는 고양된 정신이 특별한 목표나 계획도 없이 토로하는 진솔한 표현으로 존재한다.” 그렇습니다, 시는 말로 썼지만 우리는 그것을 쓰는 순간 이미 춤추고 노래하고 몸짓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말씀드렸잖아요.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으세요. 이것이 시입니다. 순수한 본질 안에서 시는 말이 아니니까요. 이미 몸짓이고 운동이고 무용이에요. 더불어 시가 예술이 아닌 까닭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에 근거하기 때문이라고 괴테는 말했습니다. 자연스러운 규칙들, 규칙들이되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있는 이야기는 서로 모순될 수는 있겠으나 크게 두 가지예요. 어쨌든 시는 우선적으로 자기표현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표현은 단순히 있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순수하게 토로된 세계의 창조이자 의미의 시원 혹은 신생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결국 시 쓰기로서의 자기표현은 자기로부터 세계가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다른 것이 되는 것, 이화異化, 독일어로 ‘Entfremdung’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ntfremdung’을 자주 쓰이는 의미대로 잘못 이해하면 ‘소외’가 됩니다만, 소외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버려지는 것이거든요. 헤겔에 따르면 ‘Entfremdung’은 자기로부터 이화될 때 비로소 자기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논지에서 쓰인 용어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정리하자면, 시의 표현은 곧 이화이고, 이화는 곧 창조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이 때문에 시는 언제나 생성의 첫 순간에 늘 있는 것입니다.

왜 시가 ‘쓰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것인지, 그 이유는 이재훈 시인의 시를 통해서 확인해봅시다.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이재훈,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전문

 

이재훈 시인은 여기서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말로 시가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 이유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자인데 절대로 기적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시를 쓰되 온전히 다 이해되고 전부 해석되기를 희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시원의 순간에 있으려고 하는 시적 충동은 시의 존재론적 양태들 중 하나로 들어갑니다. ‘묘사’는 이미 있는 것을 그리는 거잖아요. ‘묘사가 아닌 표현’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수성이 아닌 단수성, 시는 언제나 단수성을 지향합니다. 이것을 황동규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옆놈 모습 닮으려 애쓰지 않는다”(「제비꽃」)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시는 공간적으로는 전개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압축됩니다. 왜냐하면 고밀도로 압축될 때에만 빅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압축되지 않는 것들은 폭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터져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는 시간적으로는 흐름이 아닌 순간입니다. 이재훈 시인의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계속 ‘순간’이 지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는 순간에 대해서만 다루고 순간에 의해서만 다루어질 뿐, 흐름으로 의식화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시는 드러냄이 아닌 암시입니다. 왜냐하면 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는, 우리가 눈을 뜨는 시간에 금방 사라져버려요. 어느 한 순간에 창조되어버렸는데, 눈을 뜨는 그 시간에 이미 사라져버려요. 그러므로 우리는 시의 진지한 창조를 언제나 암시로써만 들여다볼 수 있는 거죠.

 

_ <현대시>, 2013년 2월호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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