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 이재훈

 

 

거리의 왕 노릇

 

 

하늘에 다리를 놓고 싶었지

구름이 다리에 걸터앉아 쉬는 풍경을 꿈꾼 거지

속도가 폐부를 훑고 지나가는 아침

햇살은 더 이상 찬란하지 않고

지루한 시간을 못 견뎌 핸드폰을 만지작대지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겐 없지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지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중얼거리는 입술로 거리의 왕이 되지

죄와 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리들이

거리에 둥둥 떠다니고 광장엔 사람들이 자꾸 모이지

새벽녘 농부가 곡괭이를 들고 집을 나서지

새벽녘 회사원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지

느릿하다 때론 떠들썩한 발소리가 거리에 가득하지

문득 신들이 사는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지

 

― <문학사상>, 5월호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

 

 

 

‘왕’과 ‘노릇’ 사이에서의 탈주, 시의 운명

 

 

 

전소영(문학평론가)

 

 

 

 

 

 

명왕성의 사람이 있었지. 아니 그렇게 자처하는 이가 있지. 공전 구역에서, 말하자면 구심력에서 멀어졌다 하여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추방당한 지 얼마간이 흘렀나. 현실 밖의 이데아를 꿈꾸어서가 아니라 내부의 환부를 응시하기 위해, 먼 외부에 고독한 자리를 마련한 누군가는 시인이었지.

빛의 속도만큼이나 기민하게 지구에 닿는 그의 시선은 늘 첨예하게 흐벅져 있었지. 고성능의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들이대는 시인 앞에서 파헤쳐지고 들추어지고 더듬어졌던 현실, 뼈아픈 자리들. 그럼에도 그의 시에서 감상을 강요하는 슬픔의 말들은 탈수되었지. 시인의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기 때문. 음파의 날개를 빌려 시가 지구에 도착할 무렵, 그것은 물기가 없어 더 서글프고 아름다워졌지.

다시 명왕성의 시인이 보낸 시에서 시대는 여전히 격발하는 것들로 웅성대고 있지. 구름이 하늘 다리에 걸터앉은 한갓진 풍경은 꿈결에서나 볼 수 있을 뿐. 도시인들은 하루의 속도가 낙오의 정도와 정확히 반비례하기라도 하듯 제 생 안에서 쉼과 틈을 지워 없앴지. 속도계처럼 몸에 붙은 휴대폰이 징표.

오래 배양되어야 하는 감정마저 옛 나라의 유물처럼 부식되는 중이지. 시인에 따르면 그리움이 유독 그렇지. 그리움이 생겨나는 과정, 지난하고 무료한 탓. 누군가를 만나 각인한다, 어떤 까닭으로 그가 부재한다, 실물은 사라져도 뇌리에 남는다, 그런데도 그를 향한 감정만은 현재형이다, 독할 만큼 선명한 현재형이다. 그리움처럼 절실하게 발아하고 단단해진 끝에 잊히지 않는 감정을 지으며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되지. 시간에 장악되는 대신 시간을 삶 속으로 초대하지. 하여 스스로가 주체임을, 살아 있음을 확인하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겐 없지.”

숙성의 시간을 대신하는 것은 돌진하는 말들. 흡사 심리전 때 나부꼈던 삐라의 언어들과 같은 성급한 권유, 실은 명령의 언사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숙고를 잃고 피동형의 인간이 되었지. 호전적으로 육박하는 말들의 배후에 문명과 시스템을 장악했다 여기는 누군가가 있지. “서로 왕 노릇하려고” 타인의 생명과 죽음, 존재 자체를 간과하는 자들. 자명한 사실은 그들이 왕이 아니라는 것. 그저 왕 ‘노릇’을 하고 있을 뿐.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 「거리의 왕 노릇」 부분

 

시인도 시를 통해 말을 하지만 저들처럼 왕의 언어나 법의 언어, 왕을 심판하는 언어를 바라지 않지. 오히려 그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꾸기에, 그의 말은 ‘왕’과 ‘노릇’의 간극에서 빠져나와 ‘노릇’이라는 허황 자리에서 제 주인을 물러서게 하지. 부끄럽지 않은 시의 언어란 무엇이던가.

시가 노래에서 해리解離되는 것이 활자 시대의 불가피한 운명이라 해도 노래가 되지 못하는 시는 쓸쓸하지. 적어도 음유시인의 목소리가 아직 울림을 지녔던 시기, 속도는 어떤 미덕도 아니었지. 누군가의 입술을 떠난 시가 다른 누군가의 귀에 느리게 가닿을 때, 여하한 시차를 사이에 두고서라도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발견될 수 있었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가닿을 이 없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언술들, 소모적이어서 부끄럽지. 수치를 몰라 일 방향적 연설을 곤두세웠던 독재자 중에는 대개 어리석은 자가 많았지. 플래카드로 대변되는 말들 대신, 시인은 새로운 시의 언어를 찾아가려 하지. ‘나’와 ‘당신’의 공존을 확인하게 하는, 내 시를 읊는 “당신의 입술”에서 완성될 “아름다운 운율”을 발굴하고자.

그럴 때 시인은 왕 노릇하는 가짜와 달라지지. 이것은 시대 안에서 시가 담당해야 할 몫을 환기시키지. 노래의 시, 혹은 운율을 매개로 ‘나’와 ‘당신’, ‘우리’를 절박하게 연결하는 것. “사람들이 자꾸 모이”는 ‘거리’를 ‘광장’답게 하며 억압적인 언어와 폭력적 구심성과 거리가 먼 새 연대의 징후나 징표로 남는 것.

이것이 시의 숙명이라 말하는 명왕성의 사람이 있지. 명왕성이 태양계의 완연한 외부가 된 지 얼마간이 흘렀나. 현실 밖의 이데아를 꿈꾸어서가 아니라 내부의 환부를 응시하기 위해, 가장 고독한 외부에 이냥 자리를 마련한 그는 시인이자 왕이었지. 거리(street)의 왕이었고 거리(distance)의 왕이었지.

 

_ <현대시>, 2013년 6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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