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나날

어머니
저는 당신 물속에서
가득 충전되어
이 세상에 나왔는데
이곳은 너무 건조하군요

어머니
이제 방전된 제 몸에
스위치를 올리렵니다
딸깍 딸깍

들리세요?
제 몸에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날이 갑니다
참, 많이 아픕니다


나는 밤이 없다고 했다
밤이 없으므로 당신을 한 번도 뉘인적 없다고도 했다
어느 날 백야처럼 쉼없는 날들이라며
당신은 내게 밤을 주셨다
오로지 나의 안락으로 밤은 하나씩 채워졌다
내 청춘이 지던 때
당신은 그때 기적을 보여주셨다

헤진 모자를 쓴 당신
내게 밤이라는 단어를 주셨다
눈물이 흐르는 걸 잘 가릴 수 있게
작은 흐느낌도 잘 들을 수 있게

밥이란다
먹고 사는 일이란다
눈물이란다
이젠 어느 입에도 들어갈 수 없는
숟가락들이 모여 등을 맞대고 있다
한때는 수많은 입을 받아냈던 몸
기(氣)만 남아 반짝 빛난다

생각해보면 차갑고 완고했다.
무엇을 물고 늘어지기 위해 온몸은 잔뜩 긴장돼 있었다.
예민하고 민첩한 이성은 없었다.
타인의 무게에 반항했다.
언젠가는 악물었던 입의 힘을 빼야 한다.
모든 것을 풀어놓고 바닥에 몸을 눕힌 사람들.
그 바닥에는 타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상처의 흔적들만 가득하다.


_ 글. 사진 : 이재훈
_ 장소 : DOP 조형예술연구소(조각가 도일 작업장)

_ 출처 : <시와반시>, 2009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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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몸들이 자아내는 새로운 우주(Cosmos)

이재훈
(시인)



몸은 우리에게 언제나 끊임없는 충족감과 함께 결핍도 함께 전해준다. 결핍이 또다른 충족을 낳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몸이 표현하는 방식은 결핍으로부터 배태된다. 비만한 몸은 역동성이 없으며, 완미하게 충족된 정신은 비생산적 무기력만 낳을 뿐이다. 주린 몸과 결핍된 영혼은 역동적이며, 삶에 대한 자신의 존재증거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인식하는 몸이 ‘노동하는 몸’에서 자신의 정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영혼의 몸’으로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몸을 통한 상상력은 더욱 감각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새로움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요즘 시대를 가리켜 흔히들 ‘몸’의 시대라는 말을 한다. 정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몸이 이제는 우리의 정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몸소 실현하는 또 하나의 정신적 주체가 된 것이다.

모두(冒頭)에 몸에 관한 잡설로 시작한 이유는 이번 도일의 두 번째 개인전 「Beyond the line」(2008)에서 몸이 가진 역동성이 존재의 근본을 탐하는 어떤 가능성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몸은 비루한 정신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도구이다. 몸은 원시적이며, 즉흥적이고 때론 비유적이며 신화적이다. 이제는 살아서 피가 나는 몸이 정신의 영역에까지 들어와 살아서 고뇌하는 인식의 통점(痛點)으로 확장되어 간다.

우리의 일상에서 몸에 대한 지각은 끊임없이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또한 몸이 표현하는 반응은 정신의 어떤 예민한 지점을 정확히 짚어준다. 도일은 이러한 몸의 근본을 ‘움직임’을 통해 드러낸다. 「한 걸음 한 잔」의 작품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가장 친근한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가장 단순한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하고 있다. 즉 운동성을 통해 희노애락을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감수성의 스펙트럼은 희노애락이라는 네 가지 감정으로 표현하기에 너무 다양하고 섬세하다. 기쁨과 슬픔 사이,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어떤 수많은 감정들의 세목들은 언어의 힘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언어가 가진 지시적 폭력성은 단순한 선(線)을 통한 움직임이 주는 섬세한 감정을 통해 무참하게 깨져 버린다. 이것뿐만 아니다. 더욱 놀란 것은 단순한 움직임으로 감정뿐 아니라, 그 몸이 가지고 있는 인격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과장된 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몸이 여러 다른 몸들과 함께 줄지어 이어나가면서 그 줄은 끊기지 않고 다시 되돌아오는 순환의 원리를 통해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몸이 이어지는 것을 통해 몸 하나가 가진 인격은 주변의 몸을 통해 다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다.

몸의 움직임은 시각적인 영역에서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감정의 섬세함과 그 개별의 감정 속에 녹아 있는 몸의 인격을 상상하는 것을 통해 즐거운 미적 체험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몸의 움직임이라 하더라도 춤의 경우는 움직임이 주는 속도의 합(合)으로 전체적인 감정과 미적 세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전시 공간이 주는 개별 몸의 합은 하나의 움직임을 정지하여 미분화시키는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해준다. 그것으로 우리는 천천히 하나의 개별적인 몸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실제적 모습과 투영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체험에서 가장 특별한 체험은 바로 자신의 현재와 작품의 현재를 동일시해서 보는 즐거움일 것이다.

도일은 이전 개인전인 「저작Chew」에서와 마찬가지로 재료가 가진 친근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대중들은 ‘낯설게 하기’의 오래된 예술적 감흥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며, 작품의 소재 또한 친근성이 강하다.

작품 「Beyond the line」 연작은 몸끼리 서로 투영하여 새로운 몸의 색을 입고 있다. 특히 전시라는 특별한 공간성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한 작품이다. 서로의 몸에서 발산하는 빛이 전시의 조명과 어우러져 오묘한 색감을 얻고 있으며, 이 오묘한 몸의 색은 서로 비추고 반사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낸다. 몸들끼리 서로 어우러져 큰 하나의 담론(discourse)을 생산하고 있다. 이 소통은 ‘Beyond the line’이라는 다소 관념적인 명명(命名)과 만나면서 집중력을 분산하고 있다. 「Beyond the line 2」가 보여주고 있는 터널 속의 미궁. 그 미궁의 공간이 들어가고 나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에로티시즘의 상상력 또한 즐거운 체험이다. 미궁은 모두 뚫려 있다. 미궁은 각각의 작은 공간이 얽혀 이루어진 집합소이다. 뚫려 있으면서도 공기가 빠져나갈 것 같지 않게 밀집되어 있고, 촘촘하다 싶어 가까이에 가면 여유로운 공간 속에서 얽혀 있다.

도일은 근본주의자이다. 「만인보」에서 보여주는 조명을 통한 몸의 ‘그림자’도 그런 의미에서이리라. 하나의 몸짓 속에 또 하나의 인격이 숨어 있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과 인격이 가진 정체 아닌가. 더욱 역동적이고 과장되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만인보」에서 쓸쓸한 삶의 비애를 엿본다. 이번 개인전에서 인간의 본질을 몸이 가진 움직임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냄을 보았다. 재료의 긁히고 할퀸 자국들과 움직임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특별한 세계를 보여주는 이번 개인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낀 것일까. 뒤늦게 점점 큰 무게로 내려앉는 도일의 작품세계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지 더 궁금해진다.


작가 도일의 작품 보기 : dop 조형예술연구소  http://blog.daum.net/yadan1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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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젓가락,스테인레스 스틸, 660*770*570.2006.

 

생명을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는 몸




이재훈(시인)





가능하다면 나는 이 글을 사양했어야 했다. 글 쓰는 일을 업(業)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예술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글은 아무래도 미술평론가의 몫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좀 문외한인 편이다. 좋아는 하지만 열정적인 전문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가 도일의 작업에 한 마디 거들기로 마음먹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한때 도일 兄과 황산벌 아래 작업실에서 머리를 맞대며 예술운운하던 시절을 겪은 인연 때문이다. 그 당시 조각가 도일은 [당위]라는 독특한 예술집단을 이끌며 일명 ‘연산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스스로를 야단(野壇)이라 칭하며 “나(몸)는 가장 광범위한 역사적 실체다”라고 외치던 한 예술가의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당시 나는 [당위]의 일원이 되어 당위지에 잡문을 쓰고, 그의 작업장 넌출관에서 장작을 패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삶과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그늘 속에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수혜받은 사람 중의 하나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관객이자 마니아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저작詛嚼 Chew] 연작은 이전에 비해 한껏 여유로워진 느낌이다. 이전 작품들은 한 마디로 딱딱한 껍질이었다. 그의 예술 철학이 너무 완고해 어떤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일방향적 전달에 가까웠다. 물론 이런 부분은 다른 측면에서는 아주 좋은 예에 속하기도 한다. 즉 그의 작품은 비교적 주제가 선명하고 강한, 선 굵은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번 [저작詛嚼 Chew] 연작들은 그 단단한 껍질에 구멍을 열어 숨을 통하게 한 느낌이다.

도일은 근본주의자이다. 그의 관심은 시원(始原)이나 진리의 본질에 가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그가 발 디디고 있는 삶 또한 중요한 정신적 발판으로 삼는다. 또한 완성된 어른의 눈이 아닌, 정체성 속에서 여전히 흔들리는 자아를 탐구하길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호성 속에 있는 자아가 작품의 빈 공간 안을 자유롭게 유영하도록 방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공간과 움직임의 연속이 전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통합(Unity)의 정신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 눈에 띠는 것 중의 하나로 질료의 선택을 들 수 있다. 작가, 특히 조각가의 경우 예술가가 선택한 질료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굳이 뒤샹이나 팝아트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대미술에서 질료 선택이 예술가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오래된 역사이다. 도일이 택한 매체는 철이다. 철은 도일의 초창기 작업에서부터 등장하는 재료이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일련의 Gun 연작을 발표해 왔으며 1994년 발행된 [징후SYPTOM] 그룹전에서도 [M-16A1 사격방법]이라는 작품을 통해 숟가락, 젓가락, 나이프, 포크 등으로 제작된 작품을 발표했다. 아상블라쥬 기법을 통해 제작된 이러한 작품들은 식량전쟁에 대한 경고이자 그 위험성을 알레고리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준 매체들 또한 일상의 공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숟가락, 젓가락, 포크, 밥그릇이나 국그릇 등이다. 이런 점은 재료의 공공성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작품에 그대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시도라고 본다. 숟가락, 젓가락 같은 식도구들의 경우 개인만이 사용하는 개별성의 차원에서보다 가족, 지역, 사회 나아가서는 한 나라의 문화적 공공성을 띠는 특성을 지닌다. 많은 사람들의 몸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즉 먹는 것이나 쉬는 것의 용도를 가진 사물들은 기(氣)가 센 재료들이라 하겠다. 작가는 이런 재료들을 고물상이나 폐업하는 가게를 통해 재료를 확보했다고 한다. 이들 재료는 제철소로 가서 또다른 재료의 철로 윤회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술가 도일이라는 용광로를 만나면서 하나의 예술품으로 환생한 것이다.

이러한 재료, 즉 매체지향을 가진 도일의 작업은 재료가 가진 공공성을 바탕으로 두드리고 붙이고 녹이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꽃으로 탄생한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또한 생명을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는 몸이다. 작가는 꽃을 잉태하고 있는 줄기나 뿌리를 기(器)라는 형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기(器)의 공간은 막혀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뚫려 있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하나의 그물망처럼 보인다. 그물망은 공(空)과 허(虛)를 담은 순환과 윤회의 세계를 지향한다. 하나의 열려 있는 공(空)에서 꽃으로 화(化)한 모습들은 다양한 파장으로 변주된다. 그것은 스텐을 두드려 만든 나뭇가지로, 혹은 오묘한 색감의 몸을 지닌 넓은 동판으로 확산된다. 순환이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작품은 숟가락, 젓가락과 청주잔으로 제작된 사람의 형상들이 여덟팔자(字) 모양을 그리며 설치된 작품이다. 이 작품 또한 108개의 인간상을 통해 백팔번뇌를 연상케 하고,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이어지고 순환하는 무한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번 작품들 속에서 또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은 작품의 디테일한 부분들이다. 예를 들면 스텐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작품에서 숟가락과 찻수저로 만든 작은 나비 같은 것들이다. 그 작은 나비는 자아에 잠깐 스쳐 앉았다 간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 존재들은 건강한 생명력을 얻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아가기를 기원하고 있다. 또한 철을 용접하며 얻은 접합점의 반짝임 같은 것들은 작품을 더욱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디테일한 부분들이다.

도일의 이번 작품은 여러 사물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는 세계, 즉 전체성에 대한 커다란 상징으로 읽힌다. 그의 작품은 철이라는 매체와 전체성의 의식, 공간과 선과 붙임을 활용한 형태가 모두 조화롭게 이루어낸 세계이다. 그는 언제나 진지한 열정으로 작품을 생산해내는, 오로지 작품 속에 자신의 영혼 전체를 밀어 넣는 예술가이다. 이제 그의 다음 작품은 어떨지를 상상하고 기다리는 관심이 우리들에게 남겨진 몫일 것이다.


인사아트센터 2007.6.27일부터 7.3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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