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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10 작품론_ <더 많은 햇살을!>_ 강동호

더 많은 햇살을!

 

강동호

 

 


진정성 같은 것 따위는 그야말로 초토화 되어버린 오늘날 시인은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타인의 아픔마저 생중계로 전시되고 교환가치로 변환되는 시대에, 스스로 의식의 최전방에 앞장서면서 세계의 고통을 온몸으로 증언했던 시의 악전고투는 여전히 독자의 폐부에 가닿을 수 있을 것인가.
일상을 도륙하는 악무한의 욕망에 투항하는 현대인의 나날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재훈의 신작시들은 우리로 하여금 또 한 번 그와 같은 난제 앞에 서게 만든다. 이재훈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를 읽어본 독자라면 존재의 시원始原의 자리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공간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놓는 장면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 근대의 도시라는 폐색 지대에서, 시인은 “시대가 없는 거리의 시”(「거리를 훔치다」)를 씀으로서 잘못 태어난 자들의 운명을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아름답게 그려내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현실의 납빛 공간과 모든 존재의 기원의 자리에 가닿으려는 언어의 꿈 같은 운동이 기묘하게 동거하는 장면이 연출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독자가 읽게 된 신작 시편들은 이러한 상상과 현실의 접경지대에서 보다 현실의 편 쪽으로 당겨져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그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하달하는 가르침을 성실하게 익히는 우리들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중얼거릴 수 없다
뱀이 온몸을 감고 있어 숨쉬기 힘들다
언제나 위기가 아닌 적은 없었다
고통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들
늘 속도에 의지했으며
숨 쉬는 것들을 혐오하며 살았다

검은 바닷가 모래 위
구름은 낡았고 파도는 헤졌다
내 고통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멀리서 날 지켜보고 있다
낯설지만 또 낯익은 순간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이 비릿한 고통의 풍경

사람들은 대체로 첨단을 잘 견딘다
그는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던가
울며 흐느끼고 있었던가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비린내도 없이
파도소리만 가난하게 들렸다

칼로 내 가죽을 벗기려 한다
아, 이 극악한 자본의 성실함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이 땅과 하늘
밤이 되면 일하러 간다
삼인칭으로만 불리는 인생 공부의 완성을 위해
― 「숭고한 셀러던트」 전문

직장인(셀러리맨)과 학생(스튜던트)의 합성어인 ‘셀러던트’라는 표현이 적시하는 것처럼 위 시의 시적 화자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더 일을 잘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이 시대 일상인들의 공회전과 같은 삶을 보여주고 있다. “삼인칭으로만 불리는 인생 공부의 완성”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화자는 한 번도 자신의 것, 삶을 소유해본 이력이 없다. 그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삶에 기생하면서 목숨이라도 연명하기 위해, “속도에 의지”한 채 어디론가 방향 없이 불철주야 이동중일 뿐이다. “첨단을 잘 견”디는 삶이란 이처럼 빠르게 내 일상을 몰아가는 가운데 현재의 고통에 무심해지고 오로지 “고통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에만 주관의 지향성을 집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현재를 완벽하게 미래에 저당 잡힌 삶 속에서만 겨우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서 오는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자본이 선사하는 아픔, “칼로 내 가죽을 벗기”고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는 것 같은 느낌이 더 이상 체험되지 않는 것이다. 아픔이 더 이상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 마취된 감각은, 병들었으나 고통을 어느새 망각해버린 현대인들의 고장 난 통각을 증언한다.
이재훈의 시에서 현실로 육박해 들어오는 실재는 이처럼 마비된 주체의 피로한 감각의 파노라마에서부터 비롯된다. 하여 “새소리”도 “물비린내”도 없는 삶, 그저 “검은 바닷가”의 가난한 파도소리만 울리는 인공적인 풍경만이 전경화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의 실존을 ‘현실’과 ‘생존’이라는 이름에 결박시키는 나날들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와 같은 생활의 세계로부터 물러서지 못하고 언제나 삶 속으로 귀환 중이다.

햇살이 창가에 와서 눕는다
우리는 저 찬란한 햇살을 의지하지 못한다
강의실은 학생들로 빼곡하다
사육당하는, 사육당하고 싶은 청년들
먼 대양의 꿈도
격정적인 연애의 꿈도 잊었다
따닥따닥 볼펜이 책상을 찧는 소리
얼굴 모두에 수상한 간판이 붙어 있다
강사는 얘기한다
꽃잎 떨어지는 날들을 탐하지 말라
햇살보다 형광등이 우리에겐 더 소중해
― 「꿈꾸는 강의실」 부분

사정이 이러하거니와, “사육당하는, 사육당하고 싶은” 인간들, 그저 “수상한 간판”만을 달고 활보하는 인간들의 틈에서는 설사 무엇이 씌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책상을 찧는 소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펜의 머리를 눌러야만 중심이 나오는/ 저 결박의 세계/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종이와 펜으로 묶는/ 상생의 세계”라는 표현이 냉소적으로 꼬집고 있듯, 위 시의 화자가 처해 있는 세계는 ‘상생의 세계’라는 미명으로 치장된, 그러나 실상은 모든 이들을 숨 막히게 만드는 결박과 구속의 끈으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 극도의 강박적인 자기 결박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햇살보다 형광등”이다. 꿈마저 사육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저 잔인한 공간, 장밋빛 미래를 인질 삼아 인간의 열정을 삭막한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저 끝 모르는 욕망의 세계를 휘감는 근본 기분은 지루함과 무기력함이다.
이러한 권태와 무력함은 일상의 나날들을 파르마콘pharmakon으로 바치는, 거짓된 번제燔祭의 풍경으로도 빚어진다. 이를테면 그의 또 다른 시 「번제燔祭」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내 모독을 치유”하고 “타인을 용서”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지는 어떤 속물적이고 반윤리적인 장면이다. 때로 우리는 현실을 위한 알리바이로 신성을 도용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니 신앙으로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눈물의 산물”인 것이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엄숙해지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숫양을 학대하고 태”울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널브러지고, 피가 솟고, 사나운 개들이 짖고, 젊은 남녀들이 허리를 돌리며 춤을 추”는 시적 광경을 보고 어딘지 모르게 머쓱해진다면, 그것은 저 광기어린 이미지들이 바로 우리의 삶 자체를 저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재훈의 냉소적이고, 다소 비극적인 세계 인식이 온전히 검은 페이지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그의 시편들에는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던 우리의 죽어 있는 삶을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햇살이다.

늘 어두웠다. 구석진 곳으로만 들고 났다. 대지가 아닌, 동굴의 습한 곳이 내가 꿈꾸는 곳. 어스레한 어둠 사이로 햇살 한 줄기. 길게 뻗어 내 눈을 찔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은 안압眼壓을 느끼다 이내 평온해졌다. 뒷덜미가 서늘해 만져보니 가늘고 날카로운 칼끝. 한 줄기 칼이 머리를 관통했다. 박힌 칼을 뽑아냈다. 뜨겁고, 살 타는 냄새가 나고, 나는 혼절했다.

다시 절벽. 아래엔 검은 물이 흘렀다. 구름은 빠른 속도로 바위를 훔치고 달아났다. 나는 절벽에 달라붙어 기어올랐다. 저 아래의 검은 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가기 위해. 등허리가 따끔따끔했다. 먼 산에서 몇 줄기 햇살이 긴 협곡을 빠져나와 내 등에 박혔다. 절벽의 난간에 동굴이 있었다. 나는 패배한 것일까.

온몸에 박힌 햇살을 하나씩 뺐다. 고통스러웠으며 황홀했다. 동굴을 나가 하늘을 봤다. 파란 하늘 가득,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얼른 옷을 벗었다. 알몸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햇살이 내 몸에 박혀 반짝반짝 빛을 냈다.

몸은 뜨겁게 허물어져 갔다. 저 아래 검은 물을 향해 햇살 한 줌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밝고 뜨거운 칼이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계곡을 날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몸이고 싶었다.
― 「햇칼」 전문

“햇살보다는 형광등”(「꿈꾸는 강의실」)에 길들여진 채 그저 풍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셀러던트의 감관에 순간 “햇살 한 줄기”가 드리워지자 그야말로 극도의 고통이 수반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저 기계에 지나지 않았던 시적 화자의 마비된 의식을 쪼개는 “한 줄기 칼”과 같은 것이다. 햇볕을 쬐는 ‘나’의 의식이 마치 칼로 관통당한 것 같은 환상통으로 허덕이고, 도처에서는 “뜨겁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하면서 저 무료했던 시적 공간이 일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로 변모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눈치 채야 하는 것은 이 극심한 감각적 고통을 견디는 과정에서 시적 화자가 일대 존재의 전환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온몸에 박힌 햇살”을 하나씩 빼면서 화자는 “고통스러웠으며 황홀”하다고 고백하는데, 저 고통이 황홀을 동반한다는 것은 이 아픔에 시적 화자의 지향성이 개입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이때의 아픔은 그저 즉자적으로 우리에게 내던져 있는 질료적인 수준의 감각이 아니라, 시적 화자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사태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어떤 의식의 계기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 속 수인囚人이 동굴 밖을 나서는 순간 진리의 태양빛 때문에 고통과 경이를 동시에 느꼈던 것처럼, 오로지 형광등 빛에 의거하여 사태를 파악하던 내가 실재의 풍경을 맞이했을 때 눈멂에 가까운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이 전환은 나의 전부를 바꾸는 과정에 가까워서, 실로 내 온몸을 태우고 살가죽을 벗기는 작업(“얼른 옷을 벗었다”)으로 느껴진다. 그 경험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 고통에 의존하여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어떤 희망 또한 비로소 스며들기 시작한다(“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몸이고 싶었다”).
3연을 기점으로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떠받들고 있는 정조에 어떤 반전의 계기가 스며드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일견 기쁨으로 가득해 보이는 이러한 어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죽어 있는 고통이 아니라, 신선하게 살아 날뛰는 고통의 전조를 듣게 된다. 고통이 살아 있다고?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을 온전하게 감각하는 와중에 ‘나’의 존재론적 쇄신이 일어나면서, ‘나’의 있음이 분명하게 인지되기에 이른다. 물론 그러한 고통은 시적 화자는 온전한 행복을 선사하지는 못하지만, 나로 하여금 고통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아의 살아 있음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게 만든다. 이 비약에 가까운 긍정으로 인해, 시의 화자는 삶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햇살로 고독하자
햇살과 마주치자
햇살 따라 걸어가면
풀꽃을 만나고
햇살이 몸 누이는 곳에 뒤엉키면
과거를 잊고 슬픔을 잊고
햇살 따다 술 빚어
맑고 투명하게 발효되고 싶다

햇살이 새들의 길목을 마련하고
비쩍 마른 소나무의 몸을 어루만지는
사월의 오후
햇살이 만든 평평한 산 위로
빨간 구두의 여인이 앉아 있다
― 「전위적 풍경」 부분

그러므로 시인에게 ‘햇살’은 우리의 인공적인 삶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자연’을 표상하고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감한 감각 기관 자체를 곤두서게 만드는 모든 ‘충격 체험’(벤야민)들의 총칭을 일컫는 것이다. “햇살로 고독”하고 “햇살과 마주치”며, 그 햇살로 내가 “맑고 투명하게 발효”될 때 비로소 신생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은 천지가 개벽하는 놀라운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것에 대한 범속한 각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의 눈에 비친 ‘전위적인 풍경’은 햇살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적층되어 있는 셈이다. “햇살이 만든 평평한 산 위로/ 빨간 구두의 여인이 않아 있”는 이 기묘하고도 동화적인 풍경 또한 시적 화자의 상상력이 빚어낸, 어떤 환시의 풍경이다. 그의 눈에 이제 세계는 그저 무기력하게 내던져 있는 것이 아니라, 미약한 잠재성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체의 형상을 지니지 않은 ‘햇살’이 수도 없이 낮게 축적되어 이루어진 “평평한 산”은 실상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감각적 잠재성을 비유하는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무료한 일상 속에서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린 그와 같은 비가시적인(invisible) 가능성을 감지하고 드러내려는 예민한 시인의 촉수 덕분에 우리의 무딘 일상이 조금이나마 아픔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바라건대 시인이여, 우리에게 조금 더 많은 고통을, 더 많은 햇살을!

_ <현대시> 2011년 6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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