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성


서정시에서 회상(Erinnerung)은 일상적인 기억과는 다르다. 그것은 경험이나 대상,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경험으로 구축된 기억을 시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재구성하는 시적 사유와 상상의 방식이다. 시적 회상은 현재의 것, 과거의 것, 심지어 미래의 것도 서정시의 어떠한 상태성 속에 펼쳐 보일 수 있다. 그러한 시적 회상의 영역에는 현생뿐만 아니라 전생과 내생까지 포함된다.

시적 회상의 가장 전통적인 방식은 근원에 대한 사유와 상상이다. 여기에서 근원은 존재방식에 있어서 근원적인 영역이지, 과거나 현재, 미래로 구획될 수 있는 시간적으로 제약된 특수한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흔히 근원은 과거의 형상으로 회상된다. 오랜 세월 동안 시인들은 결여된 지금-여기의 현실의 배후에 근원적인 영역을 설정하고, 그것을 회상해 들임으로써 결여를 충당하여 왔다. 그러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회상은 결여된 현실에서 부유하는 자아의 정체성 설정과 관련된다.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과 이재훈의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그러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시적 회상의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양자는 근원적인 것의 회상을 통해 자아의 시적인 정체성을 설정하는 방식에서는 유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우 상반된 지향성을 드러낸다. 가령, 권혁웅 시의 시적 주체는 자신의 근원을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이라는 달동네로 내세우고 있는 반면, 이재훈 시의 시적 주체는 ‘이방의 신화’로 설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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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시적 회상은 이 셋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지닌다. 이재훈 시의 시적 주체는 근원적인 것을 경험적 과거가 아니라 선험적인 과거로서 신화적인 영역에 상정한다. 그는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의 맨 앞에 수록한 「사수자리」라는 시에서 자신의 고향이 저 밤하늘의 사수자리임을 고백한다. 시적 자아에게 별자리의 신화에서 떨어져 나온 지상에서의 삶은 이방인의 생(生)이다. 그리하여 그는 「빌딩나무 숲」에서 자기 사신을 빌딩 숲에 갇힌 이교도라고 말한다. 「수선화」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러한 시적 회상은 “나르키소스”적인 것이다. 권혁웅이 경험적 과거를 동화적인 것, 만화적인 것, 영화적인 것과 뒤섞어서 세속적인 축제의 분위기를 마련하여 지금-여기의 시적 주체의 공허한 내면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과 달리, 이재훈 시의 시적 주체는 자신의 고향을 신화의 영역에 설정하여 자아를 신비화하면서 지금-여기의 공허함을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로 충만하게 한다.

이재훈 시의 이러한 나르키소스적인 자아의 신비화는 자칫 과대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시집 곳곳에 그러한 함정에 빠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여기의 자아의 상황이다. 황사가 불어오는 거리의 풍경(「공중정원」), 아침도 거른 채 빌딩으로 출근하는 세일즈맨(「세일즈맨의 오후」), 시청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신촌 네거리에서 찬송으로 전도하는 신도(「당신은 가짜다」) 등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경험적 현실의 이미지이다. 시적 자아는 그러한 이미지로부터 신화를 상기한다. 시적 자아에게 신화의 환기는 곧 파편화된 선험적 기억의 복원이다. 「시인 세헤라자데」에서 시적 자아는 “빼앗긴 내 기억들을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시적 자아는 구체적인 현실을 배회하면서, 비루한 거리의 이미지들로부터 신성한 과거의 기억을 호출해내는 것이다.

그러한 시적 회상의 방식은 비록 신화적인 영역을 근원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지상으로부터 초월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시적 주체는 세속 도시의 이미지들로부터 신성한 기억을 환기하고 그것을 통해 세속 도시를 성화한다. 그리하여 자아를 에워싼 세속 도시 자체가 성화된다. 그와 함께 세속 도시에서의 삶 또한 “순례”라는 신성한 여행으로 인식된다. “순례”는 물론 일상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혹은 성스러운 곳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구조적인 측면을 주목할 경우 “순례”는 세속과 신성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재훈의 시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라기 보다는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는 세속 도시의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이재훈 시에서 “순례”는 신비화된 혹은 성화된 세속적 삶 자체라고 이해할 수 있다.

_ [시인시각], 2006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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