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 이재훈, <남자의 일생> 전문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울고 웃고 부대끼는 삶. 언뜻 언뜻 비추는 따스한 햇살 같은 행복감이 삶의 순간을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삶은 지난한 불행과 고통을 경유할 때만 생의 화려한 날개 짓을 허락한다. 언구렁청에 빠져 허우적이는 삶.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야 하는 삶. 생은 고통의 극한을 체험한 자에게만 혹은 생에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자에게만 삶을 비약시켜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이입시킨다. 살아남기. 기고 또 기어 뱃가죽이 다 헤지고 뜯어져도 생을 부여안고 살아남기. 애벌레에서 고치로의 변성. 고치 속에서 우화를 꿈꾸기. 화려한 날개 짓으로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이재훈의 「남자의 일생」은 나비의 우화과정을 시적 모티브로 하여 이 시대에 남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지치고 고단한가를 우회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아니 시인은 나비 알레고리 속에 생에의 과정 전체를 담아내고 있는데, 그것은 처절한 생존게임과 유사하다. 풀잎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지기. 안온한 세계에서 나락으로 추락하기. 떨어져 추락한다는 것은 한 세계(좋은 환경)에서 또 다른 세계(열악한 환경)로 던져지는 순간인데, 시인 이재훈은 추락하는 것들 속에는 항상 날개가 있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아름답다. 추락하는 것은 비상이다. 추락은 존재의 심연에 이르는 아름다운 영혼의 몸짓인데, 그것은 생살 뜯어가며 극한의 고통을 인내한 연후에 찾아지는 안식이다. 몸 편안히 쉴 안식처인 그늘을 찾아 평생을 기고 옮겨 다니다가 생은 의미를 찾고 안식을 찾는다. 이제 더 이상 언구렁청을 기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 고난과 시련을 견딘 후 비로소 꿈꾸는 우화. 고지가 바로 저기다. 몸의 변성과 견고한 의지. 고치 속에서 변태變態. 돋아나는 날개. 한 마리 화려한 나비가 하늘로 자유롭게 비상 중이다.

인간의 삶도 나비의 그것과 같지 않겠는가. 생이란 진창 속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연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기다리고 또 기다린 후 고통에 고통이 더해진 후 인내하고 또 인내한 후 생의 날개 짓은 더 높고 더 아름답고 더 숭고하지 않겠는가. 이재훈의 「남자의 일생」은 생에의 형식과 삶을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의식을 치밀하게 내파시키고 있다. 밀랍으로 만든 이카로스의 허망한 날개 아니라, 추락하는 고통 속에서 견고한 생에의 의지로 키워낸 날개로 하늘 저 높이 날아오르고 있다.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8년 3-4월호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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