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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미아

시詩 2007. 11. 15. 13:27


이재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궁창이 열렸습니다. 저는, 그 작은 골짜기에서 푸른 씨앗을 주웠습니다. 그때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간은 망각을 가져다주더군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았는데, 저 그만,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푸른 씨앗을 한 자궁 속에다 잃었습니다. 이 땅의 푸른 날숨과 들숨들은 모두 광년을 넘어왔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서기 이천 년도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이 아닌가요.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저, 가난한 뱃속에서 막걸리 찌꺼기로 취하며 이 작은 몸뚱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쁘시죠? 태초부터 저와 함께한 그대들, 정말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왜 하필 이 늙은 땅에서 저를 잃으셨나요?
쇠지랑물과 땅더껑이 속에서 벌레들이 슬금슬금 기어나옵니다.
숨소리가 들리세요?
거북이처럼 엎드려 살아도 자꾸 병들어갑니다.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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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뒷말은 아마도 축복이 아닐까. 어미의 자궁을 빠져나온 신생아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기쁨의 박수와 함께 덕담을 보낸다. 그러나 산모의 통증보다, 빠져나오느라 더 많이 아팠던 아기는 여전히 울고 있다. 탄생을 신비와 경이,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시인은 외로운 미아로 부르고 있다.

가난한 뱃속에서 막걸리 찌꺼기로 취하며 제 몸을 만들고 푸른 씨앗을 잃어버린 죄 값으로 병들어간다. 탯줄이 끊어지고 첫울음이 터지는 순간부터 나는 미아다. 어미가 손을 놓고 나를 잃어버린 거다.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전도서 1:9)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 늙은 땅에서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혼자뿐이다. 탄생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이미 정한 바 되어 있었으니, 속수무책으로 나는 태어날 수밖에 없다. 태중에서 나를 잃어버린 어미를 탓할 수도 없다. 벌레들이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땅바닥을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도 거북이처럼 엎드려 살아야한다. 잘려진 탯줄을 궁창에 던지고 살아 팔딱여야 한다. 적어도 살아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얻어먹은 막걸리 찌꺼기 값을 갚으려면 병든 몸으로 신음소리라도 팔아야 한다. 찬바람 부는 새벽 병든 미아들의 쿨럭이는 기침소리로 골목 안이 술렁인다.  (허은희 시인)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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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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