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

 

이재훈

 

 

1. ()과 속()의 피안(彼岸)

 

문학과 종교의 관계는 상보적이면서도 대립된 관계에 놓여 있다. 그 성격은 다르지만 구원(救援)’을 열망의 마지막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동지적(同志的)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구원이라는 동질의 지향점이 서로의 세계를 용인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문학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에게 이르고, 종교는 신에게부터 출발하여 인간으로 내려온다. 그 차이점이 경미한 상황으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실상 시인의 의식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문학은 목표가 분명치 않은 세계를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종교에 비해 좀 더 자유롭다. 목표가 분명치 않은 문학은, 작품을 창작하는 개별적 존재자가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대리자(代理者)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작품의 창작자에 따라 구원에 이르는 길이 제각기 다르다. 또한 구원의 방법과 도달점도 다르다. 이렇게 각기 다를 수 있는 이유는 문학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관념화되어 보편적 진리에 이르는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종교는 특수한 목표가 있다. 종교는 경전을 통해 과학적인 분명함이 지배하지 않는 이상적 세계를 보여준다. 그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다른 초월의 세계이지만, 오히려 그 초월의 세계가 현실을 더욱 단단히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종교는 보편적 세계를 특수한 선민(選民)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과 종교가 본질적으로는 상통하는 내력을 가질 수 있으나 그 도달점과 방법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문학 일반에서 로 방향을 바꾸어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시는 보편적 언어를 객관화하고 대리하는 다른 장르와 달리 노래성이 강하다. 그 노래성은 달리 말하면 부족의 언어, 방언을 육성할 때 힘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시의 언어는 여러 비유를 차치하고서라도 언어의 개별성에 많이 기댄다. 이는 종교가 가지는 특수한 세계와 상충되기도 한다. 종교의 모든 목표는 문학을 통해 종교적 진리를 전파하는 데 있다. 물론 각 종교마다 그 성질은 각기 다르지만 본질적인 인식은 그와 같다. 그렇기에 분명한 목적을 가진 종교적 세계를 시로 노래하기란 쉽지 않다. 시는 이미 확정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그 미적 자질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확정적인 세계로 인도하도록 강제받을 경우에 있어서는 그 반발이 더욱 심해지게 된다.

어떻든 속()의 세계에서 성()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게 문학이라면 종교는 이미 성()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를 관리하고 설교한다. 이런 경우, 성과 속이 서로 위무하고 용인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지점이 바로 종교적 상상력이 서야 할 지점이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종교생활을 했으며 그것은 사유의식을 가진 인간의 본성적인 것이다. 폴 틸리히(P. Tillich)종교는 인간 정신 생활의 모든 기능의 심층에서라면 어디나 있을 집이 있다고 했다. 이는 종교가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인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성과 속이 서로 습합되고 위치를 바꾸는 현실의 상황들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것은 문학과 종교가 서로 상충되면서도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1)각주

 

2. ()에 속한 시의 내력과 층위(層位)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교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동방정교회의 전통이 거의 없기에 개신교(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주류로 크게 뿌리내리고 있다. 이십세기 초에 유입된 기독교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쳐 약 천 사백만의 신도수를 가진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미는 이미 기독교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많은 부분 책임지는 사상으로 거듭났다는 데 있다. 그 동안 기독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 전부면에 걸쳐 그 정신이 침윤되었다. 문학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문학 작품들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현재에도 쓰여지고 있다.

한국의 정서에 유, , 선의 종교는 샤머니즘적 전통과 함께 맞물려 일종의 동질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면서 유입된 기독교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기독교의 발전은 한국의 성장 자본주의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물론 한국적인 기독교가 기복신앙(祈福信仰)의 성격을 가진 연유는 종교의 토착화를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에만 보편적으로 행하고 있는 새벽기도회는 정화수를 떠놓고 간원을 비는 한국적 기복신앙의 모습이다. 또한 본질적인 기독교와 다르게 현세의 축복과 상급을 강조하는 측면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기독교 의식, 혹은 기독교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개념과 범주를 들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박이도의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기독교 의식이란 기독교의 목표가 되는 속죄, 구원, 부활, 재림 등의 실현을 위해 일상 생활에서 기도하고 간증하며 신과 교감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의식이 시인의 내부에 심화됨으로써 작품 속에 기독교 의식의 시정신이 드러나게 된다. 2)각주

 

결국 기독교적 상상력이란 기독교 정신3)각주 을 시적으로 잘 구현한 작품들을 의미한다. 문제는 기독교 정신, 혹은 기독교 의식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냈느냐의 문제이다. 기독교가 가진 내세에 대한 단호한 믿음은 많은 부분 상상력을 제한한다. 즉 기독교가 시세계의 사상적 측면에서는 다양성을 준 게 사실이나 그 미적 형상화는 한계점을 드러낸 경우가 많았다. 외형적 측면에서는 성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소재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비유들과 예수의 행적, 제자들의 행적에 관한 소재주의로 빠진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 정신을 깊게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포기한 채 이미 선취된 인간형이나 사상을 그대로 옮겨놓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또한 그 사상적 측면에서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상상력이 시의 근간을 이루는 많은 시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획일성과 교조주의(敎條主義)적 성격 때문이다. 시의 목적이 종교의 정신을 전파하려는 데 있을 때 시는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는 시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종교적인 목표에 부합되는 시편들은 일반의 시와 다른 범주에서 평가되고 인식되고 있다. 이른바 신앙시, 종교시 등의 개념을 들어 종교적 목표가 시의 분명한 목적일 때 일반 문학과의 차이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상상력을 가진 시가 가야 될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말은 큰 의미가 있다.

 

교의는 진정한 시에서는 그 모습을 나타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혹 나타난다 하더라도 교의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환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것은 기독교 문학이 어떤 위치에서 이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적절히 표현한 대목이다. 문학이란 장르에서 기독교적인 것만을 뽑아 그 의의를 상고한다는 것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의 현대 문학 속에 기독교적인 특징이나 정신만으로 된 작품을 고르고 분석하기 보다는 작가의 기독교적인 인스피레이션이 얼마만큼 뿌리박고 있는지를 작품 전체에서 얻어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4)각주

 

우리가 문제삼으려고 하는 기독교 시는 신에 대한 절대 긍정과 함께 인간 역사에 반영된 신의 섭리를 해석하고 그것을 실천의 지평에 놓는 태도를 포괄하는 시편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기독교 시가 지향하는, 일종의 대안적 유토피아주의야말로 기독교 정신 혹은 이념을 가장 충실하게 지칭하는 것이 된다. 5)각주

 

가장 중요한 점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자아의 정신적 현존을 드러내는 것이다. 경험에 대한 관념화와 실천적 의지, 본질에 대한 방황 등이 확실한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뒷모습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길이다. 완료된 해석의 틀을 거부하고 그 해석에 의해서 반죽되어진 자아의 본질적 모습을 통해 성자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시사에서 이런 기독교적 상상력을 미적으로 승화시킨 시인들은 적지 않다. 또한 많은 시인들이 남긴 다양한 사상적 층위와 여정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독교의 신앙적 정신을 시적으로 잘 형상화한 시, 속된 자아와 신앙인으로서의 자아 사이의 갈등과 죄의식을 고백한 시, 기독교 사상이 대상 속에 스며들어 보편적인 정서의 형태로 내재화된 시, 기독교 정신의 올바른 방향을 변론하기 위해 비유나 풍자의 방법론을 택한 시 등 다양한 표출방식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윤동주, 정지용,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 등이 보여준 세계는 한국 시문학의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본 글에서는 이미 다량의 평가를 받아온 위의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가 미흡되었다고 생각되는 몇 시인들의 시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적 상상력을 실천한 다양한 시적 모습을 살펴보겠다.

 

3. 기독교적 상상력의 양상

 

이용도 시인(19011933)은 우리 문학사에서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그가 뛰어난 시편들을 남기고 33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당시 감리교파의 개신교 부흥목사였으며 정열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중학재학 중 1919년 독립 만세를 부른 혐의로 투옥된 이후, 1922년 태평양 회의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는 등 열성적인 독립운동가였다. 1924년에는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 전신) 영문과에 입학하고 이후 부흥목사로서의 활동을 하다 폐결핵으로 이른 나이에 작고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생전에 일기나 서간문 등을 통해 발견된 시편들이다. 그의 시는 기교위주의 형식주의 시보다도 생명력있는 내용을 중시하였다. 6)각주

 

이름없이 지구의 일각을 밟고가! 샤론의 들꽃같이! 피는 줄, 지는 줄 세상이 다 모르되, 다만 하늘만이 빈 들에 속삭이는 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소문 없이 퍼지는 그 향기에 하늘이 웃음 웃고, 자취없이 눈 감을 때 적막한 밤 작은 별의 무리들이 조상을 해- 이것이 값없는 야화의 무상의 영광, 평생 발원이었던 것이로다. , 그러나 저를 낸 조물주는 여기에 가공을 하여 옮겨 놓으니,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합화가 되었구려! 고요히 이름없이 지나갈 고독한 야화! 이제는 소문 놓고 노방(路傍)에 찟길 이름 좋은, 그러나 역시 고독한 백합화로구나!

이용도, <샤론의 들꽃> 전문

 

샤론은 성서에 나오는 지명이다. 구약성경 아가서 21-2절에는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라는 부분이 나온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기술한 책으로 아름다운 노래의 책이란 뜻이다. 아가에는 그리스도와 인간에 대한 거룩한 사랑을 비유하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이로 인간의 엄숙하고 순결한 사랑을 노래한 깊고 고상한 윤리적 도덕성을 엿볼 수 있다.

샤론은 욥바에서 갈멜산에 이르는 지중해변의 평원이다. 이곳은 봄이 되면 갖가지 들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샤론의 들꽃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에서 비범하게 핀 영광된 꽃이 아니라 들꽃처럼 평범한 꽃 한 송이를 의미한다. “이름 없이 지구의 일각을 밝고 가!”라는 단호한 어조는 스스로를 다짐하는 어조이기도 하다. 이 시는 이용도의 삶의 지표와도 맥락을 같이 하는 시이다. 평범한 들꽃처럼 온 가운데 소문 없이 퍼지는 그 향기에 하늘이 웃음 웃는 야화의 삶을 닮고 싶은 의지가 담겨 있다. “고요히 이름 없이 지나갈 고독한 야화!”의 삶은 당시의 상황을 또한 생각하게 한다. 신비주의적인 부흥목회자였던 시인은 마지막에 이단으로 낙인되어 교단에서도 지위를 박탈당한다. 또한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의 7-8년 동안 시작활동을 벌여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의 불우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들에 핀 꽃에 대한 열망으로 시적 자아의 근원적 갈급함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자연의 근원적 원리를 통해 자신의 삶의 지표를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시이다.

이러한 시는 예수의 생애나 사상을 닮아 있다. 위의 시는 당시 우리 문학사를 생각해 볼 때 문학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가편이다. 산문시가 비유와 어울려 이루어내는 세계가 기독교적 상상력을 스스로 체득하여 이루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아, 나무야, 바위야. 나를 가리워 주의 진노의 눈에서 피하게 하여 주고, 모든 인간들에게서 숨기어 수치를 면하게 하여 다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산에서 범죄하여 산을 더럽혔사오매, 나는 산의 원수가 되었고, 나무와 바위 아래서 내가 부정하였으매 저가 나를 멸시한지라, 어찌 나를 덮어 주며 가리워 주랴. 산과 나무가 나를 덮어주지 아니하고, 바다가 나를 숨겨 주지 아니하며, 바람이 나를 듣지 않고, 하늘이 나를 동정치 않는도다.

이용도, <산아, 나무야, 바위야> 전문

 

 

하늘은

헤아려

측량하기 어려운 것.

웅대하고,

한이 없는

이 우주

 

! 그 큰 천체를

한 입에 삼키는

이 작은 마음이여

이용도, <마음> 전문

 

무엇을 깨달을 때 그 깨달음을 지속할 특별한 순간을 담지할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낼 때 더 선명해진다. <산아, 나무야, 바위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용도의 신성 원리가 신과 자아의 교감 속에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과의 물음과 대답을 통해 그곳에서 오는 죄의식과 그것에 대한 회개와 다짐이 함께 존재한다. 속죄는 기독교 정신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일상적 자연이 신의 진노를 피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자아는 자연과 인간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죄를 가리고 싶은 본성을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아담이 뱀의 유혹을 통해 선악과를 먹고 죄의식을 갖게 된 이후부터 가질 수 있는 본성인 것이다. 시인은 또한 자신을 가리워줄 자연과 인간을 자아 자신이 훼손하였고 부정하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죄를 위무받을 수 있었던 대상과 운명적인 대립의 관계가 되어 이곳저곳에서도 위로받을 곳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신과 자아와의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나약한 실존을 보여준다.

마음은 모든 천체를 한 입에 삼키는 것이다. 측량하기 어려운 하늘과 웅대하고 한이 없는 우주조차도 마음 하나에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시가 자연을 순례하며 자연의 비유로 자신의 신앙관을 보여줄 때 그 사상적 풍요로움은 더 깊어질 수 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은 살아야 한다.

구상, <오늘> 전문

 

구상은 기독교적 신앙관을 시 속에 잘 형상화한 시들을 많이 남겼다. 이미 많은 종교시편을 써왔으며 스스로 신앙시집이라는 기획으로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라는 시집을 발간한 바 있다. 구상의 시는 복잡한 수사가 없이 쉽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사상의 깊이를 함께 가지고 있는 시에 속한다.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시인의 삶 또한 시의 의미와 덧붙여져서 감동의 무게를 더한다. 위의 시는 현세의 삶 이후의 영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사상인 창조, 부활, 사랑, 심판 등의 개념 속에서 오늘에서 영원을 산다는 부활의 신앙을 담고 있다.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현세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 이 세계의 종말이 닥치더라도 영원을 함께 살 수 있는 신앙의 회복, 영혼의 영원을 말해주고 있다. 구상의 시는 의도적으로 시적 수사를 거세하고 사상적 의미의 핵만을 남겨두는 방식을 취한다. 그의 종교적 시편들이 다수 연작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만월이 떴다

소돔성에 만월이 떠오르자

버들가지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고향에 두고온 깊은 강물도

더 이상 잠자리를 적시지 않았다

이미 문 밖에는

예비된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새벽이 오는 게 두려운 사람들은

이불깃에 이빨을 지그시 깨물며

절망으로 단단히 무장한 다음

가까스로 건진 희망 몇 가닥을

모세의 목에 걸어주었다

가까스로 얻은 희망 몇 가닥이

공동묘지에서 빛나는 아침

모세는 가야 했다

소돔성 떠오르는 만월이 되어

죽음보다 어두운 애급 땅으로

뚜벅뚜벅 사라진 다음에야

희망 몇 가닥에 잎이 돋는다는 것을

우리의 모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가지 않았다

마을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만월이 되는 것은 아득했다

 

문 밖에는 미증유의 적막이 다가서고

승냥이 울음소리 음산하게

빈 벌판에 가 닿았다

고정희, <만월> 전문

 

고정희의 시는 기독교 정신의 올바른 방향을 변론하기 위해 비유, 풍자의 방법론을 택한 시에 해당한다. 그는 많은 시편들을 통해 기독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풍자, 비유 등의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가 신학도이며 또한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은 실천적 의지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의 사상을 육성한 것이 바로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모습이고 그러한 자신의 신념은 기존의 신념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현존하는 기독교적 가치관들을 한번 되짚어보고 자문해 본다. 또한 그의 시에서는 역사적 소명을 자신의 신앙적 경험을 체화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만월>은 깊은 달이 뜬 밤을 배경으로 새로운 역사의 도래나 그것이 오기까지의 정신적 여정을 적고 있다. 그 여정은 새로운 희망과 함께 긴장감이나 두려움을 동반한 감정이다. “소돔성은 지금의 현실적 상황을 말한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으로 이주할 때의 이야기이다. 소돔성은 이미 성적 문란과 도덕적 퇴폐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 유황볼의 심판을 받는다. 소돔성 안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성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의인 10명이 없었다. 죄악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죄악에 빠져 있을 때, 그 죄악 가운데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롯의 아내가 받았던 돌기둥의 형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돔성의 현실 속에서 모세는 구원의 지도자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였다. 그 해방 가운데 백성들과 광야에서 40년의 유랑생활을 하였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현대사는 이러한 광야의 생활과 다를 바 없다. 민족의 상실과 더불어 평화, 자유, 민주의 상실을 거듭 체험한 우리의 현실은 광야에서 고난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도 같다. 이제 새로운 지도자나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문밖에는 아직도 미증유의 적막이 다가서는 현실 속에 있다. 민중의 아픔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함께 존재할 때 그 신앙의 존재 의미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이처럼 고정희의 시에는 신앙인으로서의 종교적 체험이 다양한 시적 방법론에 의해 시화(詩化)되고 있다.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닦고 또 닦으신다

간신히 기동하시는 팔순의

어머니가 하얀 행주를

빨고 또 빨아

반짝반짝 닦아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

 

(낮에 항아리를 열어놓으면

눈 밝은 햇님도 와

기웃대고,

어스름 밤이 되면

달림도 와

제 모습 비춰보는걸,

뒷산 솔숲의

청살모 다람쥐도

솔가지에 앉아 긴 꼬리로

하늘을 말아쥐고

염주알 같은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며

저렇게 내려다보는걸,

장독대에 먼지 잔뜩 끼면

남사스럽제...)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베풀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고진하, <어머니의 聖所> 전문

 

고진하는 기독교 사상이 내재화되어 보편적인 정서에까지 그 시적 진리가 전달되는 시다. 그의 시 속에서 자아는 신앙인과 속인으로서의 가치판단이 분리되지 않은 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한한 신의 섭리를 이끌어낸다. 그의 시편들이 신성과 일상의 만남을 생태적 사유로 구현해냈다는 세간의 평가는 온당하다. 불순한 모든 것 또한 초월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초월의 힘이 보편적 정서로 다다르면 굳이 기독교적 상상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종교적 상상력이 그의 그물망과 함께 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聖所는 교회의 성전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만물이다. 또한 어머니의 세계가 바로 성소이다. 시인이 성소를 발견하는 특별한 순간은 계시의 장소가 아니라 일상의 장독대이다. 어머니가 장독대 항아리를 닦고 계시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 가지는 진실된 마음이 모두 종교적인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세계는 각기 다른 존재로 분할되지 않고 사건의 연결망이며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존재론적 인식이 고진하의 시 속에는 자주 목격된다. 기독교가 가지는 선민의식은 때로 그들만의 성찬식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를 베풀 듯성소를 닦아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진정한 종교적 구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가 기독교적 상상력이 가진 한계에 대한 선입견을 탈각시킬 시의 준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외에도 김남조, 김형영, 신중신, 정호승, 김정환, 박찬일 등의 시에서도 각각 다른 방법으로 기독교적 상상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애초의 계획과 달리 짧은 지면에 이 모두를 묶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다른 지면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4. 맺으며

 

지금까지 기독교적 상상력을 구현한 다양한 층위의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위의 몇 시편들을 통해 기독교 정신이 어떻게 시 속에 습합되고 표출되는지를 일별해 볼 수 있었다. 더 깊은 논의를 위해서는 각 시인들에 대한 개별적인 분석이 더 부가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겨 둔다.

어떠한 길을 통해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지, 혹은 그 길이 목표가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깊고 진정한 사유의 세계는 깊고 오래가며 감동을 준다. 종교적 상상력이 우리 시단의 사상성에 더 깊이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의 오래된 문학 전통이 헤브라이즘의 전통 속에서 나왔음을 생각할 때 그 중요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기독교는 가장 기본적으로 현세의 종교가 아닌 내세의 종교이다. 현세의 기복과 인간의 안위가 아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보증으로서 믿는 종교이다. 모든 영적 행위는 죽음 이후 삶을 담보한다. 기독교가 유일하게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부활은 죽음 이후 다시 사는 세계를 의미한다. 죽음 이후에 다시 소생하는 생성과 소멸의 원리가 숨어 있다. 그것은 꽃이 지고 다시 꽃이 피는 자연의 순환원리처럼 우리 육신과 영혼의 삶도 그러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앞으로 명징한 세계와 그것을 거부하려는 세계 사이의 길항과 모순 속에 기독교적 상상력이 존재해 있을 때 그 미적 형상성을 더 깊어질 것이다. 하늘의 구름 위에서 군림하는 성자가 아니라 인간의 옷을 입은 성자가 시 속에 투영되기를 희망해 본다.

 

각주)

1) 엘리아데는 다음의 글을 통해 성과 속의 관계를 보편적 관계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정황들은 민속종교에서부터 그 기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성속과 구원이라는 말은 아무리 원시인이라 할지라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인 한 종교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명제와 관련된 것이고, 인류의 여명 추기부터 일정한 종교 체험을 해왔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다양한 양상에서 비롯되므로 한두 가지 카테고리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을 든다면 성과 속을 구분하고 가능한 한 성에 가까이 있고자 한다는 것, 인간 조건의 한계를 느끼고 막연하지만 구원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중략) 성은 영속적 혹은 일시적 특성으로서 어떤 사물, 인간, 공간, 시간 등에 두루 퍼져 있다. 어떤 신비적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성이 되면, 그 순간부터 하나의 변질을 겪고 사람들한테 두려움과 숭배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성을 접축하는 것은 위험시되기도 한다. 또한 그 성은 외부로 퍼져나가 마치 물과 같이 번지고 전기와 같이 방출되는 성격을 지닌다. 그에 비해 속은 부정적 성격으로 확인되는데, 빈약한 생명력이나 허무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처럼 민속 종교에서도 성과 속을 구분하고 속의 허무를 극복하고 성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엘리아데, 이은봉역, <성과 속>, 22-23)

2) 박이도, <한국 현대시와 기독교>, 종로서적, 1987, 10-11.

3) 신에 의한 창조, 사랑, 섭리, 구원의 역사를 자신의 사유의 근본 구조로 받아들이고, 그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신학적이념적 원리를 이름하는 것일 터이다.(유성호, <한국학연구> 21, 고려대한국학연구소, 7)

4) 박이도, 위의 책, 57쪽.

5) 유성호, 위의 책, 7쪽.

6) 이용도의 생애나 사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변종호 편저, <이용도 목사 전집>(장안문화사, 1993)과 신규호, <한국 현대시와 종교>(국학자료원, 2003)를 참고.

* 출처 : 이재훈, <딜레마의 시학>(국학자료원)

Posted by 이재훈이
,

징후는 없다

― 현대시의 새로운 징후와 담론의 가능성

 

 

 

이재훈

 

 

 

 

 

1.

 

시는 늘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온다. 무의식적으로 다가와 내면화되었다가 다시 목구멍 밖으로 토해내는 이 목소리들은 늘 무정형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애벌레 주체’들의 목소리는 무의식 속에서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의 목소리를 빌려 온다. 아직 이성적으로 객관화되지 않은 목소리들이, 윤리적이지 않은 날 것의 목소리들이 신기(神氣)의 목소리를 타고 뱉었다 들이켰다를 쉬지 않고 반복한다. 애벌레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쉬지 않고 뱉어내는 애벌레들의 소리는 이 땅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시인은 무당이 아니던가. 애벌레들의 목소리는 주술사의 구음과 같다. 정체를 알 수 없으나 그 소리엔 신탁이 있으며 예언이 있다. 그 소리엔 치유의 부드러움이 있으며 상처를 소환하여 멀리 떠나보내려는 씻김이 있다. 때론 마녀의 목소리가 출몰하며, 때론 그로테스크한 환영의 그림자가 출몰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징후는 늘 예기치 않게 온다. 시의 언어가 늘 먼저였으며, 그 목소리를 재단하고 목소리의 특성을 살피는 일은 늘 뒤에 온다. 징후를 살피는 일은 지금 우리의 현재를 살피는 일이며, 지금 현재를 통해 시가 지나가는 존재의 자리를 다시 되짚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때론 예언적 목소리들이 징후의 그물망에 걸리기도 하고, 때론 그물망에 걸리지 않고 스스로 침묵의 길로 걸어가기도 한다. 징후는 늘 사회적 현상, 역사적 흐름, 현대인의 보편적 특성 등과 함께 재단된다. 시의 목소리는 새로운 개념어를 통해 이리저리 분절되고 재단되어 이러저러한 틀 속에 넣어진다. 그동안 미래, 정치, 윤리, 미성년, 서정과 극서정, 반미학, 환상 등의 개념으로 주체의 표본을 만들고 시의 목소리는 새로운 발성이나 음색으로 표본화되어 전시되었다. 시의 화자는 늘 세계와 화해를 꿈꾸는 이상(理想)으로 간주되어, ‘차이’나 ‘불화’와 같은 다소 불편한 개념어로 자주 뭉뚱그려졌다.

애벌레들이 뱉어내는 무수히 많은 자아들의 목소리는 이구동성으로 중엉거린다. 우리는 화해의 파수꾼도 아니며 불화와 전복의 점령자도 아니라고. 우리는 단지 무의식적 영혼의 소리라고. 화해와 불화를 동시에 뱉어내는 벌레들의 소리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모든 소리가 명창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목소리들 가운데 하나를 건져올려야 한다. 눈 밝은 선자(選者)들과 발견자들에 의해 소리 가운데 하나가 점지되어 새로운 목소리로 발견된다. 이 발견은 이미 징후된 것인지도 모른다. 문명과 사회는 급속도로 변화하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도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에 발맞추어 시의 목소리도 발 빠르게 시대를 대변하리라고 믿었다. 물론 시는 시대를 대변한다. 하지만 시는 가장 넓은 범위의 기억들을 모두 떠안고 있는 기록물이다. 존재 이전과 존재 이후, 문명 생성 이전과 문명 파괴 이후의 시간까지 시는 기억하거나 예견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늘 징후나 예감을 좋아하기에. 시대적 사명 속에 깃발든 시를 늘 발견하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기쁨은 시의 언어와는 늘 상대적인 윤리의 언어를 가장 독실하게 그려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겨워. 발을 차 넣자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꾸욱 삼켰다.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찔끔, 발소리를 냈다. 하루 종일 짧아진 발목으로 기어 다니던 나. 오늘은 그녀의 목구멍에서 내가 차 넣은 발을 찾았다. 깨끗이 닦아 낸 나의 구두를 그제야 입 밖으로 밀어 올리며, 사랑해요. 많은 날 동안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벌레, 그녀

 

배 속을 열어 보니 오래전 내가 씹다 뱉은 말들이 들어 있었다. 당신이 그랬다고요, 내게. 가로줄무늬가 길게 늘어진 그녀의 배가 동그랗게 출렁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보다는 고통에 소리치는 동물들을 더 사랑했고, 헤어져.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녀. 뇌 속에는 이미 벌레가 가득했다. 그건 모두 둥글둥글 그녀를 닮아 꾸물거렸고 찔러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해. 그녀가 사라진 곳에서 천천히 그녀의 남은 영양분을 모두 빨아먹고 나오는 나. 어느 날은 새까맣고 날카로운 눈빛의 내가 죽은 그녀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날갯짓을 하며 날고 있었다. 벌레들. 털어 내도 계속 벌레가 꼬였다. 당신을 사랑했었다고요. 벌레처럼. 그녀들이 벌레처럼, 벌레처럼 속삭였다.

― 조혜은, 「벌레―그녀」 전문

 

조혜은의 시는 애벌레들의 자아가 여러 겹을 통해 발화된다. 이미 많은 시를 통해 이성적 자아와 자폐적인 자아를 중첩시킴으로써 개인의 내면을 여러 색깔의 스펙트럼으로 보여준 조혜은에게 벌레의 말은 진실의 말과도 통한다. 진실은 가능한 말이며, 경험적으로 가장 절박한 말이기도 하다. 그녀의 내면은 “나”와 “그녀”의 목소리가 서로 혼융되며 벌레의 정체성을 서로 나누어 가진다. 시의 화자는 그녀에게 “발을 차 넣는” 존재이며,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꾸욱 삼키”는 존재이다. 시의 화자는 시적 대상인 “그녀”와 피학과 자학을 나누는 존재이며, “그녀”는 고딕체의 독백으로 화답한다. “지겨워”, “당신이 그랬다고요, 내게”, “헤어져”, “당신을 사랑했었다고요, 벌레처럼”과 같은 고백과 내면으로 소통하는 말들은 그러한 점을 잘 직시해준다. 하지만 이 가학과 피학의 관계는 서로 다른 몸이 아니며 한 몸이다. 그녀의 목구멍에서 “내가 차 넣은 발을 찾았”기 때문이다. 구두를 밀어올리며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그녀는 “벌레”로 형상화되어 있다. 벌레로 가득찬 그녀의 몸엔 “내가 씹다 뱉은 말들이 들어 있었다”. 시의 화자가 뱉어낸 말들은 그녀의 몸속에서 벌레로 변이(變移)된 것은 아닌가. 결국 시의 화자는 “그녀의 남은 영양분을 모두 빨아먹”는다. 그리곤 “그녀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날갯짓을 하며” 날고 있다. 벌레는 쉬지 않고 그녀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에워싸고 있다.

조혜은이 벌레를 통해 본 현실은 벌레와 싸우고 있는 시적 자아의 분투로 점철되어 있다. 시의 화자와 그녀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한 몸이며, 내면의 일과 바깥의 일 또한 허물어진 경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환(幻)의 공간은 실체를 가지지 않으나, 실체와 같은 극사실의 경험을 우리에게 준다. 시의 화자는 뼈저리게 내면의 일을 현실의 일로 감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겹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일은 현실에서 모두 발생하는 일이지만 이 현실의 감정이 내면으로 습합(習合)되면서 내면의 일로 다시 발화되고 있다. 이 작은 벌레의 말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의 말이며 가장 절박한 자아의 말이기도 하다.

 

2.

 

스펙트럼은 가시광선을 파장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문학에서도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다양한 파장의 스펙트럼이 존재하듯 문학, 혹은 시에서도 다양한 목소리들을 함께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까. 그저 수많은 시 속에서 선명한 색깔을 하나 건져 올려 특별한 것인 양 자찬한다. 혹은 비슷한 색깔들끼리 묶어 새로운 계열의 색을 발견했다고 자찬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담론이 발생한다. 늘 시는 담론보다 먼저였으며, 담론을 위한 시는 언제든지 즐비하다. 어떤 면에서는 시적 담론이 아니라, 철학의 신기술을 시에 대입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시단에서는 몇 년 동안 담론부재를 걱정하며 새로운 담론을 찾기에 급급했지만, 그 결과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전 담론의 부채를 다 갚기도 전에 새로운 빚을 지고 있다. 시적 담론의 부재가 아니라 시를 재단할 철학의 부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를 재단할 철학적 아이디어의 부재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시가 아주 극명하고 선명한 색을 내는 목소리만 즐비할까. 대부분의 많은 시들은 이 색도 아니고 저 색도 아닌,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닌 색을 가진 목소리들일 것이다. 무슨 색인지 규정할 수는 없지만 오묘하고 매력적인 색을 가진 목소리들이 대부분 아닐까. 하지만 많은 선자들은 가장 극단의 색깔만을 문학사에서 유용한 목소리라고 규정한다. 근대문학에서 어쩔 수 없이 재단했던 이분법적 프레임에서 우리는 아직도 갇혀 있다. 모던과 리얼, 전통과 전위, 농촌과 도시, 현실과 환상 사이의 수많은 스펙트럼을 가진 목소리들은 그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 목소리로 둥둥 떠다닐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늘 딜레마이다. 어떤 시를 평하는 것은 결국 어떤 목소리 하나를 끄집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의 언어는 누군가에게 선택되자마자 어떤 성향과 색깔의 목소리로 규정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발화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붉은 띠를 맨 시인이 되기도 하고, 푸른 띠를 맨 시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명명해줌으로써 시인의 말은 그 사명을 따라가야 한다는 무의식적 다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시인들이 내뱉는 목소리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현실의 어디쯤일까. 지구의 반대편일까. 지구를 벗어나 우주의 어디쯤일까. 아니면 공간이 아니라 환상이 구성되는 미정형의 이미지일까. 그곳이 어디든 시인의 목소리는 바로 이곳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이곳 현실을 우화하거나 비유하거나 대상화하면서 때론 이국으로, 낯선 땅으로, 기억의 먼 곳으로, 우주와 환상이 기억하는 어떤 곳으로 목소리가 날아든다. 어떤 의미에선 현실이 없는 시는 없다. 지금 이 현실이 우리의 언어를 만들고 꿈꾸게 하므로. 또한 그런 의미에서 완벽히 현실을 반영하는 시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곳이 어디든, 이제 그 실존의 목소리를 따라 읽어 본다. 그들의 현실이 어떤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 소요하며 긁적이며. 없는 징후를 만들거나 예감하면서.

 

엘프족을 닮은 여자가 있다

이름 모를 행성과 충돌하고

흩어진 가계를 수습하기 위해

가위 하나만 달랑 손에 쥐고

지구별로 야반도주한 여자

건조한 내 머리에 물을 뿌리며

숙련된 손길로 싹둑싹둑

한 달간의 근심을 가지 치는 여자

웃자란 생각들을 좌우로 보며

마침맞게 중심을 잡아 주는 여자

이따금 새순으로 피어난 꽃말들이

그믐처럼 그윽하게 입가에 스미는 여자

언젠가 여자는 나를 쓸어 담고

그녀가 왔던 행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레이스가 달린 은하수 돗자리를 깔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불러 모아

내가 지금 잠시 무릎에 손을 얹고

그녀의 손길을 따뜻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머―언 작은 별 이야길 해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내 머리 위에

비행접시처럼 떠서 우주의 먼지들을

구석구석 헹구고 있다

― 김산, 「은하 미용실」 전문

 

김산은 이곳의 현실을 화성이라고 한 적이 있다.(「화성 관광 나이트」)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관광 나이트의 공간을 화성으로 비유하여 지구인의 숨겨진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었다. 화성을 불의 별로 지칭하며 욕망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을 이루는 공간이 되는 것은 관광 나이트의 공간이 이곳의 현실과는 다른 욕망의 배설소이기 때문이다. 즉 관습적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공간에서 가장 빨리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이 관광 나이트이다. “가만히 누워 부울, 하고 부르면 온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오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보면 어느새 당도하는 곳”이 바로 불의 별 화성이다. “정열적인 아낙들이 요술공주 밍키처럼 사자로 늑대로 변신하는 곳”은 화성에서만 가능하다.

현실의 공간을 우주의 일로 극화시키는 시적 재기(才氣)는 은하 미용실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은하 미용실은 잘 쓰여진 서정의 구조를 띄고 있으면서, 그 내용의 변주를 통해 새로운 시로 읽히게 된다. 미용실의 여자는 엘프족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일련의 행위는 우주에서의 경험을 수습하는 일로 치환된다. 시에서 은하 미용실의 여주인은 과거 삶의 고통과 역경을 “새순으로 피어난 꽃말들”로 이겨내는 희망의 엘프족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역설적이게도 현실을 더 고통스럽게 느끼게 한다. 은하 미용실의 그녀는 우주에서 온 여인이며 엘프의 요정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꿈꾸는 일들은 “머―언 작은 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이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위의 시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각자의 런던은 영국에 없다.

각자의 런던은 삼례에 있는 술집이다.

검정색 통유리에 빨간색 이층버스가 그려진

각자의 런던은 소읍에서 다소 파격적이다.

소읍만큼이나 사건사고가 없는 이곳,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과 멱살잡이가 없다.

화장실 거울에 붉게 떠도는 립스틱이 없다.

쟁반에 코를 박고 쓰러지는 대머리가 없다.

알코올로 빌어먹고 사는 각자의 런던,

엉덩이 밀고 끄는 의자들의 노동이 없다.

복제화를 진정 사랑하는 화이트칼라가 없다.

각자의 런던은 사장님이 일으킨 제국,

사장님은 제국을 쇠사슬로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각자의 런던은 각자의 대문을 닫은 나라,

퇴근길을 봉지에 담고 들어가는 가장이 없다.

이제는 어떠한 중독자도 없는 각자의 런던,

소읍에서 가장 세련된 디자인을 가졌던

현관이 굳게 잠겨버린 금단의 제국.

― 백상웅, 「각자의 런던」 전문

 

백상웅이 말하는 삼례의 현실은 “각자의 런던”으로 변용되어 우리에게 남는다. 누구나 내면에는 런던이라는 조용하고 세련된 서구의 도시를 가지고 있지만, 시에서 “각자의 런던”은 술집이름일 뿐이다. 시인이 바라본 것은 관습적으로 알려진 런던이 아니라 “현관이 굳게 잠겨버린 금단의 제국”으로서의 술집이다. 이 술집은 이미 멸망한 제국이기에 사건사고가 없는 공간이 된다. 즉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과 멱살잡이”, “화장실 거울에 붉게 떠도는 립스틱”, “쟁반에 코를 박고 쓰러지는 대머리”가 없는 술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중요한 점은 사연이 없음으로해서 노동이 없다는 것이다. 사장님이 일으킨 제국이 없다는 것. 제국이 없으면 노동도 없고 노동이 없으면 “퇴근길을 봉지에 담고 들어가는 가장이 없다”. 런던과 삼례는 공간적 심리적 거리의 문제이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자와 노동을 관리하는 사장과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 가족의 사유가 들어가 있다. 백상웅이 「도계」에서 말한 “여기에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죽는” 공간이 서로 맞물리며 경계를 이루는 것처럼, 지명과 방언도 하나의 경계에 속한 것처럼, 한 술집과 마을과 이 땅의 모든 공동체는 이런 경계를 뛰어넘어 공통의 조건과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

 

3.

 

공간은 늘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구분한다. 바깥과 안의 경계, 시적 자아가 참여한 공간, 확인한 공간, 미지의 공간, 관념의 공간 등으로 구획되곤 한다. 시인은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오가며 경계의 무화를 향해 노력한다. 시간의 경험은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에겐 더할 수 없이 막연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공간의 보고이다. 그 경험은 기억의 방법론으로 실체화된다. 먼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면서 지금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유희경의 시에 드러나는 가족사나 시간과 계절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이런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저녁이 되면 스스로 사막이 되는 방법을 연구한다 더 빨리 늙기 위해 천천히 걷고 뒤로 걷다, 갑자기 돌아서서 잊으려 했던 사람을 떠올리는, 조금 시큰한

 

지도는 조금씩 자라는 동물 같은 것이다 봉투를 뜯는 내 건조한 경력을 생각한다 아버지란 기호에선 캐치볼이 떠오르지만,

 

어느새 나와 아버지 사이 넓게 자리 잡은 이만 헥타르쯤의 운동장 이따금, 몰래 알약 반 개 같은 씨앗을 심지만 자라는 것은, 없다

 

방금 불어온 바람을 등지고 어리고 슬픈 내가 공을 주우러 뛰어간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글러브는 누구의 가죽이고 날아가는 것을 보면 왜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는가

 

계집애가, 오빠를 쫓다 울음을 빙그르르 돌리는 저녁이다 더는 돌릴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참는, 어쩌면 생활의 무늬란 그런 것이지 꼭 다문 입술의 주름 같은 것

 

그러나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날리지 않는다 단단하게 여물어 열리지 않는 길의 가슴을 열기 위해 새빨간 태양이 넘어간다 잡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법 따위는 지운 지 오래

― 유희경, 「지워지는 地圖」 전문

 

지도는 어딘가를 가리켜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기호이다. 지도를 통해 전체를 보거나, 전체 속에 밀집되어 있는 세밀한 공간을 확인한다. 유희경의 지도는 기억의 지도이며, 흔적의 지도이다. 기억의 나침반은 아버지의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향한다. 시의 화자는 “더 빨리 늙기 위해 천천히 걷고 뒤로 걷는” 자이다. 더 빨리 늙고 싶다는 것은 잊으려 했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도가 “조금씩 자라는 동물”과 같다는 생각은 아버지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아버지라는 기호가 자신의 시간을 무력하게 하고, 아버지의 실체로 들어가는 지도도 더 넓어지게 만든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펼쳐든 지도는 “이만 헥타르쯤의 운동장”이다. 그 운동장에서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려면 그 넓은 운동장을 뛰어가야 하고, 숨을 참아야 하고, 전력 질주해야 한다. 시의 화자는 길을 잃어버린다. 시인의 기억술은 특별한 것이어서 아버지에게 가는 길의 지도는 더 넓어진다. 아버지라는 기호는 쉽게 해석되지 않는 암호와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넓어진 생각의 그늘이 시인의 시간을 에워싸고 있다.

 

거기에서는

죽은 자의 피부를 벗겨 가까운 사람들이 나눠 가진다더군

아끼는 책을 장정하고 이름을 새긴다더군

죽은 자는 책이 된다더군

아기가 태어나 글을 익히면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한다더군

그를 대부로 삼는다더군

거기에서는

몇권의 책을 장정하며 성인이 된다더군

결혼을 서약할 때는 책에 손을 얹고

여기 장엄한 생을 두고 맹세합니다, 말한다더군

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더군

거기에서

죽은 자는 몇권의 책이 된다더군

문자의 외투가 된다더군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

삶에 관한 의문이 드는 저녁에 쓰다듬는

한권의 생이 된다더군

― 유병록, 「사자(死者)의 서(書)」 전문

 

“아무래도 나는 빨강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했던 유병록은 색깔을 통해 자신이 감각한 세계의 일면을 얘기했다.(「빨강」) 위의 시에서는 우리 현실 이후의 세계를 감각한다. 유병록은 죽은 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려고 한다. ‘사자의 서’는 지하세계를 안내하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경험하거나 실증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감각하거나 확신할 뿐이다. 감각이나 확신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방법에 따라 종교적 믿음이 생긴다. 유병록이 감각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현실을 책으로 소통하는 자아가 출몰한다. 이 현실을 문자로 해독하고 이해하고 결국 자신이 책으로 남는다는 것은 시인이 할 수 있는 자의식에 가깝다. 시에서 아기가 태어나 글을 읽히면 “가장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받는다. 또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몇 권의 책을 장정”해야 하며 결혼을 서약할 때에도 책이 필요하다. 이뿐 아니다. 책은 “죽은 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창구역할을 하기도 한다. 죽은 자와 연결할 수 있는 책. 이 책은 죽은 자가 몸으로 남기는 가장 완벽한 유품이 된다. 이 유품은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으로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으로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로 각각 남겨져 인간의 유산이 된다.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자들이 서로 교통하는 매개물로서의 책. 그 책은 죽음을 경험한 한 개인의 실존에서부터 출발하였지만, 우리 모두가 긍정하며 감각할 수 있는 죽음 이후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답장을 쓰다 말고

눅눅한 구들에

불을 넣는다

겨울이 아니어도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고

덜 마른

느릅나무의 불길은

유난히 푸르다

그 불에 솥을 올려

물을 끓인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延音) 같은 것들도

뚝뚝

뜯어넣는다

나무를 더 넣지 않아도

여전히 연하고 푸른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 박준, 「당신의 연음(延音)」 전문

 

환후의 고백을 쓰며 구들에 불을 넣는 시인의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혼자라는 단독자의 시간을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이렇듯 꽉 채울 수 있을까. 덜 마른 느릅나무나 솥에 올려진 물까지도 모두 그리움이라는 시인의 마음에 봉사하고 있다. 이런 먹먹한 시에 무슨 해설이 필요할까. 잊고 있었던 당신의 연음을 함께 되뇌며 나의 그리운 시간을 뜯어 넣으면 된다. 여전히 연하고 푸른 것들이 떠오를 때까지.

징후는 없다. 비바람과 폭풍과 지진의 징후는 있어도 시 언어의 징후는 없다. 다만, 시가 있을 뿐이며, 시 이후에 유포되는 소문이 있을 뿐이다.

 

_ <시인동네>, 2014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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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달콤하기만 한 문명의 정치학

 

이재훈(시인)

 

 


언제부터인가 신혜정 시인은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까다로운 그들만의 금기를 실천하고 있는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되어 있었다”라는 말로 짐작했겠지만 그 이전의 신혜정은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한때 우리의 우상이었던 시인의 말대로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마음보다 몸으로부터 먼저 오는 허무를 그저 받아들였을 것이다. 시인은 살기 위해 몸이 반응하는 솔직함에 더욱 충실했고, 자신의 영혼과 몸에 대한 신념을 보란듯이 지켜나갔다. 그렇게 신혜정은 몸이 반응하는 사유의 길목을 서성거리며 시의 언어를 타진해왔다. 침묵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그녀의 첫 시집은 반문명과 반육식의 외침이 가득한 의분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
현대문명은 음험한 음모를 거느리고 광장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다. 그 질서는 곧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들의 음모에 의해 조종되어진다. 눈에 뻔히 보이는 모종의 담합들이 위정자들의 가난한 머릿속에서 실현되어질 때 우리는 그 공분(公憤)을 억누를 수 없게 된다. 최근 들어 자주 제기된 문학과 정치와의 상보적 관계는, 문학의 역할과 창작자들의 태도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하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신혜정은 이번 시집을 통해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했다. 그러나 신혜정의 시를 단지 작금의 유행처럼 번지는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진단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혜정은 일찍부터 몸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실현해왔기 때문이다. 즉 신혜정의 몸은 사유의 또다른 기관뿐 아니라, 가장 일차적인 육체로서의 몸에 대한 깊은 탐색을 수행해 왔다.
신혜정은 현란한 이미지의 수사를 버리고 자신이 넘나드는 사유의 징검돌을 직접화법의 언어로 성큼성큼 넘는다. 신혜정의 기억술은 공동체적 서사 속에서 희구하는 갈망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선험적으로 감응한 원시적 서사이다. 그렇기에 신혜정의 육체는 문명에 접속한 기계적 감각의 플러그를 빼버리고, 넓은 초원과 대지에 기댄 육신의 기억을 갈망한다. 이것은 많은 시인들이 갈망하고 응시하는 공동선(共同善)의 기저이지만, 신혜정은 원시적 몸의 감각을 이 시간 속에 재소환하여 생태적 정치성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신혜정이 기억하고 있는 육체의 기억은, 문명과 생태의 정치성을 소요하듯 사유하여 이끌어낸 보편적 기억이다. 시에서 자주 보이는 “깍두기와 국물이 뒤섞인 입 속을 왔다갔다”(<숟가락들의 점심식사>)하는 숟가락의 풍경들처럼, 역겹고 느끼하며 불결한 현대사회의 동굴을 탐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의 풍경인 것이다. 신혜정은 자본문명의 일상성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매일 반복하고 있는 음식문화에서부터 찾는다. “21세기 식탁혁명”은 육식을 탐하는 미각뿐 아니라, “엉덩이가 예쁜 아가씨를 보면 따라가고 싶은” 육욕의 욕망에까지 다다른다고 말한다.(<21세기 식탁혁명>) 그러면 우리가 가장 즐겨먹는 라면은 어떠할까. 신혜정이 말하는 ‘라면의 정치학’은 이 시대 문명 진단의 집합소이다.

현대는 엑기스의 시대다
정보의 집합체에 접근하기
혹은 접근 금지의 아고라에 모여들기
농축이 아닌 것들은 천대 받는 시대

젊음은 치기라는 농축 엑기스의 집합체로
술을 마셔도
연애를 해도
미친 듯이,
미칠 듯이
객체와 영혼의 융화를 이루어내는

라면은 현대 식문화의 집대성으로
영양학자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 만들어내는
정치적인 이슈는 스프 속에 감춰진 비밀 레시피
소고기맛 베이스
지미강화육수분말
육개장양념분말
햄맛분말
향미증진제
돈골엑기스……
엄청난 살육의 엑기스를 분말로 만들어내는
물리학의 기적

팔팔 달아오른 냄비는 뜨거운 욕망을 탄생시키고
한 번의 사용을 위해 가지런히 포장된 비닐봉지는
원 나잇 스탠딩
구깃구깃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부패되지 않는 것들을 양산하는 현대의 문명은
한 끼 식사에 30분을 소비하지 않는다
- <라면의 정치학> 부분

현대 문명사회는 가공할만한 엑기스의 시대다. 위의 시는 음모를 꾸미는 배후들로 믹싱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한 데 모아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문명의 제조법을 소개하고 있다. 라면은 20세기 최고의 음식 발명품이다.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최고의 인스턴트 식품이다. 시인은 이 식품의 “비밀 레시피”를 세세히 들려준다. 라면의 레시피는 배후를 가지고 있다. 라면은 빨리 먹어야 하는 음식이다. 늦게 먹으면 불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에서 속도는 새로운 재화를 대량생산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다. 또한 스프의 제조 이면에는 “엄청난 살육의 엑기스”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배후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영양학자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얽혀진 “현대 식문화의 집대성”인 라면은 그 사용법에 있어서도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냄비가 발열해내는 “뜨거운 욕망”과 썩지 않는 비닐봉지는 “원나잇 스탠딩”이며 한 끼 식사시간은 아주 짧다. 결국 라면의 정치학은 속도와 인공의 것들을 가공한 최대의 집합소이며, 이는 우리 현대 물질문명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애초에 시인은 내면의 힘든 시간을 힘들다고 말하기 싫었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절망이 사회적 희망까지 막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인은 사회의 불합리한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실상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다.

살상무기를 제조하는 자들이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상한 시대

용산 미군기지 안을 보면 이해가 간다

그곳은 평화의 눈

모든 평화의 중심에 핀 꽃

이국의 개들이 사람과 산책을 즐기고
중성화 수술을 마친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창가의 볕을 즐기는 곳

사람들에겐 주님의 평화가 임재하는 곳
- <평화의 눈 1> 전문

시인은 음식문화의 정치학뿐 아니라 현실사회의 일면을 예리한 눈으로 포착한다. 평화가 있는 현실의 공간은 실상 평화가 없다. 이 거대한 아이러니를 시인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용산미군기지 안은 이 땅의 슬픔과 분노에는 관심이 없는 공간이다. “광장의 촛불시위”도 “먼 나라 이야기하듯/하품처럼 넘기는 곳”이다. 그렇지만 그곳의 사람들에겐 주님의 평화가 임재하는 곳으로 비춰진다. 용산기지 안은 이국의 권력이 만들어낸 성역이다. 성역 밖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시인은 거리에서 추억을 버렸다고 한다.

추억을 버리는 일은 이 도시에서 흔한 일이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하루를 카메라 속에 주워담는다
추억은 땅을 잃은 빗물처럼 아스팔트 위를 떠다니다 결국
바다로 모여들고
바다에 모인 추억들은 뒤엉겨 들치근해진다
순간의 갈증이
콜라 한 페트로 버려지는
플라스틱 사랑
바다 위를 부표처럼 떠돌다
(어쩌면 등푸른 생선은 기억에만 존재하는 과거가 될지도 몰라)

해는 떨어지고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환경호르몬처럼 지독하게
외롭다
멸종 위기 동물은
뉴스 속에서나 존재할 뿐
콘크리트 위에 견고한
문명의 위기는 밥상에 오른 고기덩이만큼이나
무심히 씹히고……
그뿐
질문이 없는 이 도시에서
추억은 버려지기 위해 태어난다
- <이상기후> 전문

오염된 환경은 인간의 정서도 함께 오염시킨다. 이 세계의 이상기후는 정서의 상실 때문에 발생한다. 이제는 “추억을 버리는 일”이 흔한 일인 것이다. 플라스틱 사랑이 부표처럼 떠도는 세계이다. 시인은 “질문이 없는 이 도시”에서 무언가 말 걸고 싶어한다. 추억이 버려지는 것을 보며, 추억이 흔하게 버려지는 세태를 보여주며 반성적 성찰을 기대한다. 오염된 환경에 실천적으로 반응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은 다른 여타의 시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풍경이다. 풍경이 오래된 기억이 되기 위해서 시인은 근원적 시간을 불가피하게 떠올려야 하는 지 모른다. 저 북방의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기억의 관념적 체험은 시인에게 또 하나의 의미영역에 속한다.

주홍날개꽃매미 유충 한 마리가
아스팔트 위에 선명한 핏자국처럼 멈춰 있었다
검고 날렵한 다리 땅에 붙은 듯, 태곳적 정지 그 고요함 속에
바람이 불었다
발견이 곤충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북태평양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고래가 분기(噴氣)한 습기가
붉은 점 위를
점점이,
점점이, 지나
가고 있었다
고요하던
붉은 점, 바람에 휘청하더니
감춰둔 날개 펴고 유유히
바람 속으로 돌진해 버리는 것이었다

바람은 곤충의 등을 기억에 업고
대륙으로, 멀리, 사막을 향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 <대륙의 기억> 전문

대륙의 기억은 바람으로부터 온다. 그 바람은 유충 한 마리에게 도달한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사건을 통해 원시의 기억을 회복한다. 시인은 회복된 기억을 ‘발견’이라고 말한다. 바람은 습기를 머금고 있다. 북태평양의 고온다습한 습기. 즉 기분이 좋을 리 없는 습기이다. 그 바람이 유충 한 마리의 시신을 지나치고 있다. 어찌 유충 한 마리뿐이겠는가. 이 땅의 온갖 생명체들의 죽음 위를 무수히 통과해 나갈 것이다.
유충의 시신은 바람에 그냥 몸을 맡기지 않는다. “붉은 점”으로 남아, 죽음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날개를 편다. 감춰둔 날개를 편다는 것이 부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죽음으로 새로운 탄생을 예감하는 동양적 세계관과 닮아 있다. 대륙의 기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바라보고 싶은 지점이다. 왜 ‘땅’이 아니라 ‘대륙’이라 했을까. 이 땅, 이 흙이 아닌 좀 더 큰 사유의 밑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차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건 그가
낚아 챈 봉지가 아니라
검은 눈이다
빛을 감지한 동공이
수축하는 소리다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사냥하지 않는 호랑이
새끼를 돌보지 않는 새장 속의 새
도시의 하수구를 돌아다니는
쥐의 꼬리……

밟힐라
긴 것들이여
문명의 말들이여
사전들이여

짓눌린 것은
아스팔트 밑의 땅
스스로 검은 땅을 자처한
불순한 운명

운행을 멈춘 엔진엔
아직 온기가 감돌고
차 밑에 숨은 고양이는
우주의 검은 점처럼
몸을 웅크린다

비가 온다
 
잘린 꼬리가 아픈 건
비단 고양이만이
아닐 것이다
- <꼬리> 전문

‘불구’는 불구자 자체에서 기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부요인이 불구의 존재를 만든다. 원시의 감각은 본능적인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체는 늘 자신의 본능에 충실해왔다. 그 충실함에 균열을 가한 것은 문명이 주는 불구의 훼손 때문이다.
시인은 고양이의 동공이 수축하는 소리를 듣는다. 동공이 빛을 감지하고 차 밑에 숨어 있는 이유는 꼬리가 잘렸기 때문이다. 잘린 꼬리를 운명처럼 던져준 이 문명세계는 말들이 넘쳐나는 세계다. 밟히는 꼬리와 문명의 말들은 서로 은유의 관계를 이루며 사족의 비만함을 설파한다.
문명의 말들은 수많은 규율과 억압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는 땅까지도 “불순한 운명”을 자초한다. “우주의 검은 점”은 고양이를 말한다. 즉 아주 작은 존재를 더 강조하고 있다. 이 작은 존재는 고양이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시는 전해준다.

엄마들은 제 상처에 스스로 반창고를 붙이지 못한다 아프면 시름시름 앓다 일어선다 한겨울 시린 갈증에 달콤한 귤 한 봉지 선뜻, 사지 못한다 아이들은 자라고 로맨스는 이미 너무 멀고, 늘어진 남편의 런닝구 추슬러 입고 새벽 댓바람 교회에 간다 이방의 신 야훼는 엄마들을 어루만져 주신다 옷 한 벌, 과일 한 봉지, 새 속옷, 파마 한 번 어치의 욕망을 차곡차곡 모아 제물로 바친다 넙죽넙죽 잘 드시는 이방의 신 엄마들의 얼굴은 사랑받는 여자의 욕망으로 넘쳐나 우리 아이 학업,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게, 해, 주시옵 시, 고……
야매로 일만 원짜리 파마를 하고 촌스런 머리와 독한 파마약 냄새를 받아주시는 야훼 앞에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야훼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며 부자들의 배를 채워주시는 풍요의 신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들려주시는 은밀한 신 엄마들의 처진 마음을 탱탱하게 하시는 오르가즘의 신!
오늘도 엄마들은 붉은 루즈 칠 하고 교회에 간다.
- <외로운 엄마들은 교회에 간다> 전문

엄마는 여성과 다른 이름이다. 시에서는 엄마가 교회에 가는 이유로 외로움을 꼽는다. 시에서의 엄마는 희생과 인고의 엄마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여성성을 잃어버리고 욕망으로 점철된 소욕이 엄마의 모습 속에 가득하다. 엄마에게 이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이방의 신” 야훼라고 말한다. 그러면 왜 “신”이 아닌 “이방의 신”이라고 굳이 말했을까. 이 속에 또다른 상징적 의미가 놓여 있다. 이방의 신에 대한 엄마의 태도는 언제나 같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거나 교회로 새벽기도를 가는 엄마의 태도는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기복신앙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신앙의 맹종은 “야훼”라는 이방의 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방의 신은 가난한 자도 사랑하시지만, 그 이면에 부자들의 배도 채워주시는 신이다. 은밀한 가운데 임재하여 “풍요의 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은밀한 신은 엄마들에게 영혼의 오르가즘을 선사해준다. 이렇듯 “이방의 신”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속성을 띠고 엄마들의 영혼을 위무한다.
신혜정이 일관되게 지녀온 문명에 대한 시각은 결국 삶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적극적인 노력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노력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번 시집의 후반부에는 순환론적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무덤이면서 동시에
집인

새는 이제 곧 날 수 있겠다
- <동거> 부분

고양이가 쥐를 뒤집자 바닥에 붙었던 몸에서 눈물처럼 뚝뚝, 구더기 무리가 떨어졌던 것이다 쥐의 내장이 질질, 흐르지도 못하고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꼬물거리는 구더기에게 고양이가 발길질을 했지만 이내 흥미가 사라진 듯하였다 바람이 불었고 고양이는 이제 냄새나는 쥐 따위에게서 관심이 멀어진 듯, 살아 있는 생을 쫓아갈 발톱을 핥는 중이었고 쥐의 몸은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창(窓)> 부분

다음 생을 위해
우주가 움직이는 것은
참 이상도하지
나고 죽는다는 것 말이야
고게 자꾸 입맛을 당겨
- <참 이상도 하지> 부분

인간의 삶이 죽음에 다다르는 시간의 연속이라면, 반대로 죽음은 삶에 닿기 위한 시간이다. 죽음과 삶이 결핍과 단절이 아니라 서로를 위무하고, 희망하는 소생의 힘이 될 수도 있다. 신혜정은 ‘죽음’의 공간인 ‘무덤’과 삶의 공간인 ‘집’을 함께 부려놓는다. “무덤이면서 동시에/집”인 공간은 신혜정이 도달하고 싶은 인식의 지평에 속한다. 시적 자아의 현신처럼 보이는 “새”는 비상을 통해 죽음과 삶이 함께 존재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공존의 순환론적 세계관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해서도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시 <창(窓)>에서는 죽은 쥐에서 생겨난 구더기를 통해 새로운 시선의 창을 갖고 싶어한다. 고양이는 이미 죽은 쥐의 시체에게 관심이 없지만, 부패된 쥐의 시체 속에서는 우리들이 모르는 새로운 잉태의 순간이 진행되고 있다. ‘추의 미학’을 통해 소생의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창’이 생기게 될 것이다. 우주의 생존 원리는 파괴와 창조의 반복이다. 신혜정은 “다음 생을 위해/우주가 움직이는 것”의 순리를 “참 이상도하지”라는 독백의 말로 이해하고 있다. 무엇을 더 말할까. 존재하지 않는 희망에 대해서 불가능한 말을 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독자들도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만약 낙원이 존재한다면
그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겠습니다

서로가 뿌리째 연결되어 있는 그곳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태양이 대지를 덥히고
생의 뿌리 깊은 맛을 알몸으로 느끼는
그 시간을 나는
기적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월을 견뎌온 나무의 기적을
그저 느끼며 살아도
행복하겠습니다

서양 최초의 사람이 따 먹었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가 있다면
나는 제일 먼저 따서
그대에게 건네겠습니다

달고 쓰고 시큼한
진리의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영원을 맹세해도 좋습니다

신령한 나무 아래서
오래도록 그대와 나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 하며
그 실과를 먹겠습니다

그곳은 모든 세상의 말들이 사라지고 고요히
바람 부는 소리만 들릴 것입니다
- <연가(戀歌)> 전문

신혜정이 닿고자하는 지점이 위 시에 등장하는 “낙원”과 같은 곳이라면, 과연 그러한 곳에 닿고자 하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이다. 시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연가(戀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울창한 숲속에서 사자와 뱀과 인간이 함께 뛰어노는 그 시간들이 “기적”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낙원”은 종교적 신념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존재이다. 선악과의 실과를 기꺼이 따먹겠다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은 “연가”를 통해 “맹세”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신혜정은 연가의 말미에 “그곳은 모든 세상의 말들이 사라지고 고요히/바람 부는 소리만 들릴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떤 소멸을 의미할까.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 소멸에 허무의 냄새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 상기할 수 있다.
“때로 아름다움은 치명적 재앙”(<데드 플라이>)이라고 한 신혜정은 자신이 택한 미학적 결말의 쓸쓸함에 대해 이미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나의 팔은 혀처럼 널름거리며/말라가고 있는 중”이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그것은 신의 축복”이라는 보편적 행복의 가능성을 늘 타진해가는 시인이다.
신혜정은 이번 시집에서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의 아이러니를 경쾌하게 좇다 허무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피곤에 찌든 거리의 일들을 돌봤다. 문명사회의 허기와 오염된 생산품들에 대한 신념의 언어가 뜨거운 김을 뿜으며 고여 있었지만, 그곳엔 새로운 생성의 기운이 엿보이기도 했다.
하늘은 잊을만하면 자신의 푸른 몸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감동이란 말을 선사해준다. 신혜정 시인은 오래 꿈꾸던 먼 이방의 땅으로 곧 떠난다 한다. 그녀는 이방의 시간 속에서 더 오래오래 하늘을 들여다보며 매혹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안개가 가득해 저 앞의 바다가 정말 바다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혼자 남은 섬은 그 의심으로부터 부여받은 고독의 영광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새로운 사유의 텍스트를 찾아 떠나는 그녀가 어떤 말풍선을 옷자락에 가득 달고 올 지 사뭇 궁금해진다.

_ 신혜정 시집 <라면의 정치학>(2009), 북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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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시인)

 

 

1. 공분의 시대

뜨거운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그 몇 달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생각하니, 벌써 너무 덥고 답답하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한 충격과 서글픔은 더 말해 무엇하랴. 북한에서는 핵실험을 강행했고, 한국은 PSI 전면 참여를 선언하였으며 안보리의 북한에 대한 비난은 더 거세어지고 있다.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6.9 작가선언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시국선언을 하기도 했다. 용산참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회 약자인 서민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란 말인가. 디도스(DDOS)라는 이름의 사이버테러가 한국의 주요 사이트에 침투하기도 했다. 여야 간의 대립 속에 미디어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쌍용차 노조 파업 또한 진행 중이다. 비정규직법은 오리무중이다. 연일 장맛비가 내렸다. 전국적으로 장마로 인한 폭우 피해가 속출하였다. 재난피해는 늘 서민들에게 돌아간다. 그래도 우리의 일상은 늘 똑같이 돌고 돌아간다. 밥먹고, 일하고, 술먹고, 잠잔다. 비정규직이라 늘 불안하고, 자식들의 교육비 때문에 한숨 나온다. 젊은 세대들은 결혼을 미루거나,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한다. 그래도 우리의 일상은 늘 똑같이 돌고 돌아간다. 돌고 돌아가는 게 우리의 일상이지만, 한 가지 남는 게 있다면 ‘분노’다. 분노라도 없다면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분노라도 없다면, 더 망가지게 될 우리의 삶은 무엇이 될까.

나라에 큰 슬픔이 있던 초여름이었다
연초부터 벼랑으로 몰린 사람들이
망루를 오르다 불에 타 죽고
죽은 몸은 다시 냉동되어 여름까지도
망각의 상자 속에 갇혀 이승에 방치 되어 있었고
경찰과 깡패가 한 개의 방패 뒤에 저희
그림자를 가리고 발맞추어 지나가고 나면
신문은 무기가 된 활자의 볼트와 너트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다
검게 그을린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는 용역들에게 맞아 성체와 함께 나뒹굴었고
신부님이 두들겨 맞았다는 말에
어머니는 묵주를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수백의 시인들이 다시 조시를 쓴다는 말이 들려왔다
부러진 칼을 필통에서 꺼내 연필을 깎으며 나도
흐느껴 우는 나무들에게 몇 줄 편지라도 쓰고 싶었다
― 도종환, <그해 여름> 부분

위의 시와 같이 여름은 지나가고 있다. 서민들을 쫓아내고 투기꾼들을 불러 모아 관청의 창고를 채우는 일에 서민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죽었다. 용산참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아가는 서민들 모두의 일이다. 당장 내가 사는 집, 당신이 사는 집도 모두 뉴타운이 될 것이다. 시인은 “숲의 나무들은 진종일 허리를 구부리고 울었다”고 했다. “슬퍼하는 이는 넘쳐났으나/ 잘못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이 여름”이 이렇게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망령은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 서성거리고 있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정치철학이지만, 문명사회의 일원인 우리의 ‘생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벌거벗은 인간’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좀 신랄하게 얘기하면 ‘벌거벗은 인간 쓰레기’가 우리의 모습이다. 너무 자학적인가. ‘우리’의 모습은 신자유주의에 매몰당하여 근근이 생을 버티고 있는 우리 ‘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이 우리를 범죄자로 몰고 있는가. 촛불 앞에서 숭고하고 간절하게 촛불의 상징을 가장 현실적으로 재현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자의 모습으로 윤색되고 있다. 애초에 희생물은 예정되어 있었다. 권력과 제도가 만든 허상의 신념 앞에서 모두 맹신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무소부재의 권력은 호모 사케르를 죽이더라도 처벌 받지 않는다. 우리는 늘 호명당한다. 호명하는 주체가 시인이 아니라 주권 권력이던가. 하긴, 역사는 늘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해 왔다. 문학은, 인간은 왜 수없이 되풀이되는 망령을 뒤좇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용산참사는 뼈아픈 생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일상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떤 소설보다 더 허구적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는가. “이 냉동고를 열어라/ 거기 너와 내가 갇혀 있다/ 너와 나의 사랑이 갇혀 있다”(송경동, <이 냉동고를 열어라>)고 울부짖는 시인의 목소리가 거리에서 울린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겨우 살아가기 급급한 시간들의 연속이다. “딸아이가 4학년이라고 했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도우미는/ 탬버린을 잠시 내려놓고 눈치껏 답장 문자를 날린다/ 혼자 있는 딸에게”(윤병무, <노래방 도우미>)라는 구절에 이르면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서민들을 내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은 늘 실패한 혁명가를 꿈꾼다. 문학적인 삶을 꿈꾼다. 진은영은 말했다.(진은영, <문학적인 삶>) “그들은 결정을 서두른다”고. 무엇으로 하여금 결정을 서두르게 하는가. 걸작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노란 조끼를 입은 청년들의 관자놀이에/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기게 할 위대한 한 페이지를” 서둘러 작성해야지만 문학적인 삶이므로. “한 사람의 젊은이가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젊은이를 비탄으로 몰아갈/ 실업의 총알을, 죽음에 못 이른다면/ 비정규직의 주황색 망토에 뚫릴 동그란 구멍이라도” 필요하거나 피해야 한다. 사실, 시인은 비정규직이다. 시인들의 대부분은(교수나 교사가 아닌 이상) 비정규직이다. 비(非)라는 말이 주는 서글픔은 가슴에 서늘하게 남는다. 그렇기에 “폐병장이 시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발자크식 스타일이 되거나 미국에 살지 않는 이상, “폐병장이 시인”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이 시대의 폐병장이가 비단 시인뿐이던가.

2. 심미성

사실, 일상성은 광의의 개념이어서 모든 문학에는 기실 일상이 내포되어 있다. 범박하게 말해 일상성의 현대성과 심미성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어떠한 방식으로 내면화시켜 새로운 언어의 성채로 만들어내는가 하는 방법론에 방점을 찍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문학의 변용과정은 각 주체가 처한 이성적 토대의 상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현대성과 심미성을 일상의 차원에서 밝혀내기란 요원한 일임에 틀림없다. 광의의 개념으로도 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시론에서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있듯이 시가 ‘일상적 진실’과 ‘당위적 진실’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면, 대부분의 문학은 ‘진실’의 차원에서 시적 의미를 거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진실성은 현실을 그대로 노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해 재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어떠한 내면을 통해 동화하거나 투사하여 비춰지느냐에 있다. 또한 이러한 시적 변용이나, 방법적 드러냄을 어떠한 미학적 방식으로 수용하는가가 문제이다. 우리의 일상은 지리멸렬이며 생존을 위한 공간인 돼지 울타리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 문명인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 담아내는 풍경은 이제 새롭지 않다. 어차피 문명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공간인 문명의 삶은 분명 성찰해야 할 난관인 것이다.
신문을 보며, 그것도 하루 지난 신문을 보며 “분노할 줄도 슬퍼할 줄도 모르는 짐승” 같다고 말하는 일요일의 어느 시간이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다.(김안, <일요일들>) 가난하기 때문에 “천천히 당신을 만난다”라고 생각하며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어느 일요일이 가장 현실과 가까운 일상의 풍경이다. 무기력하고 너저분한 일상의 순간들은 자아의 존재를 무화시켜버린다. 그것은 무서운 결과다. 시인은 “내가 낳은 자식들은 모두 액체”라고 한다. 이 액체는 시인의 말대로 죽은 시체의 즙이다. 제 존재의 시원을 망각하고 있다는 자아의 태도는 일상의 현실에서 더 건조한 이성을 가지겠다는 느낌을 준다. “그 많은 자식들 중 단 한 명의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아버지는 片肉이” 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제 난 뒤로 말하리라”고 한다.
토요일은 어떠한가. 사실, 월요일이건 수요일이건 중요하지 않다. 일상은 늘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김참은 “수요일엔 술을 마시러 시내에 갔는데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는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불을 덮고 잠을 잤는데 그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모른다”고 한다.(김참, <토요일>) 이유는 습관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는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시에서의 자아는 “달력이 없고 시계도 멈춘 지 오래라”고 말한다. 이미 시간에 대한 개념을 벗어버렸다. 일상은 늘 시간에 쫓기며 사는 순간의 연속이다. 이 쫓기는 시간의 연속선상에 문명인들은 발을 올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이탈자가 되어 불안을 느끼게 된다. 시인은 이탈자이다. 오늘이 혹은 내일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가끔씩 오는 전화도 한 통 없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잠을 잤고 TV만 봤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공간은 늘 무덤 속에서 숨쉬는 것과 다름없다.(김언, <숨쉬는 무덤>) 문이 열리면 “아무도 없는 마루”가 보이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우리의 빈방 체험은 시적 자아가 이 시대의 유령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현대인은 누구나 자신이 유령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시인은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김언, <유령-되기>) 중요한 것은, 아니 문제시되는 것은 “내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람인데 시적 자아는 유령이다. 유령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라 흘러다닌다. “돌, 나무, 사람들의 데모 행렬”에 슬쩍 몸을 맡기고 흘러다닌다. 공기를 의지해서 “공기가 움직일 때 나도 따라 걷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 자아가 겪는, 혹은 되고 싶은 “유령” 되기이다.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이 시대에 유령이 된 시적 자아의 모습은 현재 여기 존재해 있는 것이다.

3. 초월의 세계

언제나 일상을 쉽게 다룬다는 것은 ‘쉬운 시’ 혹은 일상시로서 폄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소재의 차원에서 일상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일상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실존의 허망함과 존재의 역설을 시적으로 승화한 작품들을 가지고 있다. 이천년대가 넘어서면서 일상이 담지해 줄 수 있는 가능성들이 하나씩 무너지면서, 우리가 일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의미는 허무적일 수밖에 없다. 있다면, ‘나르시시즘’이나 ‘멜랑콜리’ 정도겠지만, 그 또한 비겁한 합리화처럼 자꾸 느껴진다. 그럼에도 일상을 포기하고, 추상적 이상의 공간만을 탐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의 일상은 너무 사실적으로 거칠고, 허구를 뛰어넘는 사건의 연속이며, 실존의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계속되는 죽음의 공간이다.
현대인이 살을 부비고 살아가는 도시의 공간은 문명인이 폐허 속에서 건축한 타인의 나라가 아니다. 그 공간은 현대인에게 자연과 똑같은 공간이다. 정재학은 거리에서 태어나고 거리에서 일하는 문명인의 길에 대해 말한다.(정재학, <微分-길>) 시인에게 거리는 자연과 같은 공간이다. 오래 걸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저 길들은 내게 강줄기와 같아요”라고 한다. 도시의 길도 강줄기가 될 수 있다. 길을 강줄기로 인식하려면 새로운 문명인의 피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도시에서의 아이들은 “기침이 그치지 않는 점액질의 아이들”이다. 그들은 공기로 숨쉬지 않으려고, “가슴에 칼집을 내어 아가미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우리에게 다정한 세계일까.(김행숙, <다정함의 세계>) “이곳에서 발이 녹”고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곳은 다정함의 세계이다. 이곳은 우리 일상의 세계이다. 일상은 거대한 역설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역설을 기정사실로 간주하며 살고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이다. 이곳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를 간절히 기다린다면 어떨까. 오은은 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는 가짜 어른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보여준다.(오은, <보카 델라 베리타(Bocca della Verita)) 가짜 어른들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학생들이다. 하지만 이 학생은 어른보다 훨씬 성숙하다. 아직은 소녀라고 말하면서도 “차근차근 작은 일부터” 하는 게 순리라는 걸 안다. 착한 학생이다. 느지막이 학교에 가고 “꼰대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철부지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연애 말고도 즐거운 일은 많”다는 것을 아는 소녀의 일상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시에 등장하는 소녀에게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요할 순 없다. 소녀는 자신의 성정과 자아가 가진 품격대로 다짐을 하고 살아가는 거리의 또다른 어른이다.
문명인에게 초월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먼저 문명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배한봉은 그것은 문명이 먹어치우는 “식욕”이라고 했다.(배한봉, <문명의 식욕>) 마치 오은의 “식충이들”이 물질이건 정신이건 모든 것들을 “처먹는” 모습과도 비견된다. 옷의 식욕은 이제 본능의 것보다 앞서 있다. “성욕보다 수면욕보다 힘이” 센 옷의 식욕은 문명인이 만들어낸 물질의 대표격이다. 물질이 없으면 안 되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아의 존재를 물질에게 먹혀버린다. 자아는 “살아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끊임없이/ 소비된다”고 한다.
초연한 자리에서 일상으로 내려오면 늘 불편하고 메스꺼워 다시 일상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진다. 문명인들에게 탈출과 무관심을 합리화해 줄 대체 공간이 나타난 것 또한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것은 가상현실의 공간이다.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는 광경은 이제 우리에게 현실이 되어버렸다.(이원, <거리에서>) 이원이 말한 이러한 거리의 공간이 지금은 이미 현실화된 공간이다. 詩에서는 소위 ‘인공육체’라고 불리우는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빠져나와 있”는 몸의 상상력이 등장했다. 이러한 육체는 이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에얼리언>을 비롯한 영상문화를 통해 시각적 상상력으로 재현되었으며 더 거슬러서는 ‘프랑켄슈타인’의 몸에까지 올라간다.
이러한 몸의 상상력이 지금은 일반화되어 예술뿐 아니라 광고에까지 넓은 영역에 걸쳐 퍼져 있다. 그 동안의 몸이라는 개념은 ‘살아 있는 몸’, ‘피가 나는 몸’이었다. 그러나 이제 플러그를 매단 몸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인공적인 몸의 등장은 자본주의와 컴퓨터가 상징하는 물질문명의 영향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의 상징인 살과 피를 가진 몸이 분열되고, 해체, 복제되는 인공의 몸으로 그 상상력이 바뀐 것이다. 지금은 이런 실험이 문학의 언어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이미 이러한 육체는 지금 현대에 자연스러운 몸의 일종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일기는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를 방황하는 시간, 즉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하는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 가고 있다.(박해람, <낡은 침대>) 우리의 육체를 쉬게 해주는 것은 “낡은 충전기”이다. 우리는 배터리의 힘으로 충전한다. 우리는 안락한 휴식을 침대에서 보낸다. 침대를 충전기로 인식하는 시적 자아는 문명의 발전소에 저당잡힌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상은 욕망하는 장소이다. 먹고 싸고 자고 싸우는 본능적인 공간이 일상이라면, 고매한 정신적 충족의 공간이 초월의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을 서로 왕래하며 우리는 고단한 삶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일상이 본능적인 공간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확연한 사실은, 결국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며 먹고 싸고 자기 위해 평생 동족들끼리 싸워야 하는 존재임을 증언한다.

4. 욕망

문명이 인간에게 전해준 것이 인간 본성의 박탈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문명이 전하는 즐거움도 있다. 오로지 생산만하는 인간에서 유희와 휴식을 즐기는 인간이 된 것은 문명 때문이다. 문명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주권과 인권을 생각하게도 했다. 그럼에도 문명이 주는 축복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적 자아가 처한 정서적 본연성 때문일 것이다. 시는 과학이나 경제가 아니고 교양도 아니다. 시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바쳐지는 구원의 노래이다.
일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일상의 순환관계,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순환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는 바로 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의 관성이 내재해 있다. 이 일상의 관성과 힘을 무시하고는 그 어떠한 ‘사건’이나 ‘역사’도 일어날 수 없다.
쉽게 말해 시에서의 일상성은 우리 주변의 흔한 생활사를 시적 공간 안에 끌어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재로서의 생활사를 탐색하는 일이 어떠한 의미를 갖느냐에 대한 회의에 이르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생활사를 통해 어떠한 근본적인 의미를 도출해내는가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이미 90년대 ‘도시시’라는 개념어가 자리잡히기도 했다. 우리의 일상은 이제 대다수가 도시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문명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아주 특별한 예에 해당한다. 도시시 또한 소재의 문제가 크겠지만, 그 소재를 통해 문명을 소화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주체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상은 무엇인가. 매일 쳇바퀴 돌듯 흘러가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탈출하고픈 자의식이 발돋움하여 보려는 곳은 과연 어떤 풍경인가. 그 발돋움은 어떠한 모습과 양상으로 언어의 결에 흠을 내는가. 이러한 두서없는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일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한 없을지도 모른다.

_ <시인시각>, 2009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


소외와 말줄임의 수사학

 

이재훈
(시인)

 

 

본성 회복을 반증의 어법으로 표출하는 ‘소외의 시인’

소외를 말하는 자에게는 늘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외적 혹은 내적 동인動因의 그물망이 논평의 뒤를 따라다니곤 한다. 가령, 소외의 언어가 거느리고 있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늘 자본과 인간의 상하관계 속에서 타진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오래된 얘기지만, 소외는 결국 물질 획득을 위한 사회적 교류와 유대 속에서 발생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한 생산물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가치를 위해 쓰여진다는 것을 안다. 이 객체화 현상(objectification)은 노동하는 인간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객체화가 주체의 소외를 낳을 때, 시의 언어는 인간 본성에 폭력적으로 가한 권위를 응전의 태도로서 드러낸다. 이것이 소외가 창조를 낳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소외를 말하는 일련의 언술들은 인간 본성의 회복을 반증의 어법으로 표출한다. 또한 소외의 현상이 발생하는 언어적 파장은 소외 이외의 것들을 생각지 못하게 하는 정서적 자장磁場을 함유含有하고 있다. 그만큼 소외는 절실한 삶을 생각하게 하는 충격적 반응이며, 존재 자체를 무화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실존의 무기이기도 하다. 다만, 소외의 언어를 바라보고 내면으로 체화하는 과정 속에서 윤리적인 각성으로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조현석은 소외의 시인이다. 그가 구현한 소외의 언어들은 정서적 카오스 상태에서 방금 빠져나와 더운 김을 내며 수런거리고 있다. 수사적 치장을 하지 않은 언어들은 서로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충혈된 눈으로 낯선 말을 중얼거린다. 새벽이슬이 내릴 때까지 사물거리는 감정의 편린들은 너무 큰 무게로 시인에게 연속적으로 떨어져내려, 시인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또 다른 말을 이어간다. 그의 시편들 대다수에 차지하는 말줄임의 어법은 소외로 얽힌 내적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는 방법론이다.
그럼 먼저 소외의 언어를 가지게 된 내면적 상흔과 그 내력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현대사회는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관료제를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들었다. 즉 합리적 원칙에 의해 조직되는 관료제는 사회의 모든 구조를 원활하게 지탱해나가는 가장 편리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 조직화된 관료제는 개인을 소외시킨다. 굳이 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문명도시 속에서 개인이 가지는 소외와 고독과 절망은 자본 문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혹독한 정신적 부산물이다.

도시 이방인의 소외와 절망적 인식, 그 외연의 확장

조현석은 혹독함을 이겨내는 힘으로 살아간다. 그 혹독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문명인의 운명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억울하다면 인간을 잡아먹는 이 거대한 문명도시를 버리면 그뿐이다. 그의 울분은 문명인이기 이전에 혼돈의 내적 상황을 시로 옮겨 적어야 하는 시인의 운명과도 일부분 결부되어 있다. 조현석은 일찍이 스스로를 ‘불법체류자’라고 지칭하며 도시 속에서 이방인임을 자처해왔다. 또한 1990년대 초 발간한 두 권의 시집을 통해 도시의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구체적인 일상의 세목을 통해 표출하였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불법, …체류자>는 그러한 시인의 정체성을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의 삶을 하나의 허구로 인식하는 시적 테마를 통해 표출하였다.
그가 첫 번째 시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 <불법, …체류자>를 통과해 이어져온 도시인의 소외와 절망적 인식은 이번 시집을 통해 더욱 그 외연이 확장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나이로 불혹을 넘긴 시인이 이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면서, 더욱 시인으로서 가지는 본질에 대한 갈망이 큰 실존의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흩어져 있는, 함부로 뱉은 욕지거리와
근사하게 포장된 칭찬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 움찔거린 청탁請託과
떼로 굴러가게 만들었던 밀어密語들이여

화려한 수식어 덕지덕지 늘여 붙이며
공포스러운 백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쩌지 못하고 써내려갔던
마구 갈겨온 단어와 문장들이여

뒤흔들면 한 자도 남김없이 떨어져나갈
비곗덩어리 살점들로
수만의 밤과 낮을 태워도 이젠 쓸모없다

볼펜 쥐어야 할 손에 다시 든
술 한 잔 또 한 잔에 늘어나기만 하는
이 검은 오물들, 냄새나는 말 쓰레기들
― 「지껄이다」 전문

그가 삶 속에서 터득한 것은 지껄임이다. 그 지껄임은 현명한 구실을 하는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반성적 도구일 뿐이다. “함부로 뱉은 욕지거리”와 “근사하게 포장된 칭찬들”, “청탁請託”과 “밀어密語들”, “마구 갈겨온 단어와 문장들”은 모두 시인의 내면과 삶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부정적 지껄임의 증거들이다. 시인은 이 “냄새나는 말 쓰레기들”을 태우기 위해 볼펜을 쥐어야 할 손에 ‘술 한 잔’을 든다. 시집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 지껄임에 대한 반성은 시인이 계속해서 시의 언어를 망설이게 만드는 내면적 이유이기도 하다.

줄 세운 바지와 와이셔츠만 입은
한 사내가 담배를 연신 물고
입에서 내뿜는 연기의 꼬리가 잘릴 때마다
용틀임하는 바람의 반대로 뒤틀려 사라지고
덜컹대는 길이 그 끝에 끌려온다
기다리는 버스는 도무지 오지 않는다
시간은 담배를 쥔 손가락에 붙들려 있고
계속 피워대는 담배에 살 없는 볼만 더 패일 뿐
간혹 마른기침 커억, 컥 대고
피 섞인 침을 길바닥에 내뱉는다
버스 정거장 뒤편 대리석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면 끌려온 길이
그리로 꼬깃꼬깃 접혀 들어오고
감옥 같은 오피스텔에서 석방된 사람들은
폐병 걸린 버스에 실려 서울로 나가고
사내가 기다리는 통근버스는 오지 않는다
먼지 쌓인 구두 앞에 필터 끝까지 탄 수북한 꽁초들
해는 어느새 현기증 나는 정수리 위로
또다시 담배를 피워 문 사내의 몸은
신문지 뒤로 길처럼 자꾸 오그라지고
하얀 와이셔츠는 검은 먼지만 들러붙고
아침부터 그림자 길어지는 퇴근 시간까지
곯은 그 사내의 키는 아침보다 작아지고
사내가 앉은 정거장 길 건너로 라이트를 켠 버스들이
쏜살같이 달려간다, 곧 하루가 저물 것이다
통근버스는 언제 오려는지, 사내는 궁금하지 않은 듯
더 넓게 펼쳐진 신문 뒤에서 머리를 내밀거나
애처로운 눈빛도 보여주지 않는다
― 「출근하다」 전문

조현석은 많은 시편에서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적 삶의 모습을 영화를 찍듯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의 시도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내의 고독과 소외, 불안을 그리고 있다. 출근하는 모습의 “한 사내”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내의 모습이다. 피로에 찌든 모습의 사내는 결국 일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범속한 문명인이다.
문명인의 실상은 “계속 피워대는 담배”로 피로를 참으며, “피 섞인 침을 길바닥에 내뱉”는 건강을 지니고 있다. 출근하는 자들은 “감옥 같은 오피스텔”에 갇혀 있다. 버스는 “폐병 걸린” 병든 물건이다. 오지 않는 통근버스도 마찬가지이다. 하루는 곧 저문다. 사내는 통근버스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즉, 일상으로 다시 매몰될 시간을 벗어나고픈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러설 수 없어… 다가서는 아찔한… 노란 벽
받아들일 수 없어… 긴, 타인에 의한 쉼이라니
지난 이십 몇 년보다 길었던… 오늘… 하루, … 기나긴
회색 손때와 볼펜똥 덕지덕지한 책상 한가운데 덩그라니
던져진 희디흰… 봉투, … 한 일 년쯤, 푹… 쉬라는 말씀
볼썽사나운 불순물처럼 생활 위를 떠다니던 만성…, 피로
언제쯤 푹 쉬어보나 수없이 되뇌이며 쳇바퀴 돌았는데
번개처럼 내려온 강…, 제… 무급휴직

…(중략)…

새벽… 같이, 오래 묵은 습관으로 떠지는
말똥말똥한 눈과 정신…은, 아 어…쩌란 말인가
식은 새벽밥 우겨 넣고 내일도 출근할 거야, 변함없이!
정말 물러날 수 없어… 제일 먼저 사무실 문 열며
출근하는 꿈,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받아들일 수 없어…
지난 이십 몇 년보다 길었던… 오늘… 퇴근하는 하루
― 「아른거리다」 부분

문명사회의 한 개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수적이다. 무직으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삶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특히 우리 사회 중년의 실업은 청년 실업 못지않게 큰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위의 시는 무급휴직으로 불안한 중년의 모습을 신랄하게 담고 있다.
시에서는 중얼거림의 어법을 말줄임의 수사를 통해 표출한다. 끊어지는 말들과 말들 사이에서 불안의 심리적 상태가 더욱 강렬하게 작용되어 느껴진다. 말줄임을 통해 불안한 감정적 편린들이 시 속에 고스란히 모여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출근하다」의 그 사내는 불안한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평범한 직장인일 것이다. 「아른거리다」는 그러한 평범한 사내가 실직의 과정을 통해 겪는 심리적 불안을 그려내고 있다.
사오정, 오륙도 등의 단어가 이른 나이에 정년을 겪는 중년을 상징하는 신조어가 된 것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45세에 정년을 하고 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는 이 말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인정을 받는 한 단면을 반영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도 강제 무급휴직을 당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외의 또 다른 원인은 ‘시인으로서 가지는 자의식’

새벽같이 눈이 떠지는 오래된 직장인의 습관을 토로하는 시적 자아의 자의식 속에는 다른 심오한 이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직 정당한 노동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사실 노동 말고는 먹고 살아가는 재화를 획득할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휴직이나 실직은 이 사회 구조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 사회라는 공동구성체 속에서 이탈된 상황을 의미한다. 이탈된 자가 느끼는 불안과 소외의식은 위의 불안한 심리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실내를 휘젓던 음악마저 죽여 버리면
더욱 커지는 침묵… 웅크렸다가 머리 드는
아니, 고요함을 뛰어넘는 정적
그 무게에 짓눌리기 싫어
30촉짜리 갓등 켜고 앉는다
…(중략)…

남들 출근하는 이 새벽에는
정말이지 갈 곳은 없다는…
생각에… 깊고 깊은 자괴감이 밀려든다
이 우울 어디다 벗어놔야 할까…
사람 붐비는 지하철 역사를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가니
어느새 태양은 머리 위에 있다…
― 「타고 싶다」 부분

시인(시적 자아)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나날 속에서 침묵을 견뎌야만 한다. 더욱 고독한 내면과 현실로부터의 소외가 현실임을 경험해야 한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고요함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30촉짜리 갓등 켜고 앉는” 일이다. 이번 시에서도 말줄임표와 쉼표들이 반복되면서 혼잣말과 끊지 못하는 언어 사이를 종횡으로 옮겨 다니고 있다. 도시를 살아가는 한 개체의 고독과 우울은 “남들 출근하는 이 새벽”에 “정말이지 갈 곳은 없다는…” 고백을 통해 드러난다. 마지막에 “어느새 태양은 머리 위에 있”는 장면을 통해 한 개인의 소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모든 것은 어제처럼 굴러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출근하는 자도 출근하지 못하는 자도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소외의식이다. 문명사회에서 인간이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이나 세계, 공동체 집단, 사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불안한 상태를 언제든지 느끼는 것이다.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원인과 이유는 문명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겠지만 또 하나의 원인은 시인으로서 가지는 자의식 때문이다.
시인은 출근길처럼 “늘 소화불량”이며 “분주하다”(「뒤틀리다」). 현실은 상황이 어찌되었든 “소화불량은 계속”되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을 제공해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시인이 맡는 공기는 “비린내가 진하고 역한 도저히 맡을 수 없는 냄새”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현실 또한 “역시 바깥은 치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는 “발을 떼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진한 피비린내”(「덤벼든다」)라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사회에 살아가면서도 종내에는 편입되지 않고 이탈하고 싶은 생각에 휩싸인다. 시인은 한밤내 “세상의 온갖 말”을 듣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뿌리 내리지 못한 공중의 나무들”이 시인이며 “밤이 되어서야” “얼어붙었던 입을 푸는” 나무들 같은 존재이다. 시인이 가진 “해독할 수 없는 지하의 언어들”(「되피우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침묵을 통해 말을 참는 법을 배우지만 긴 침묵은 또 다른 발화의 욕망만을 낳을 뿐이다. 참지 못해 뿜어져 나오는 시인의 발화는 정상적인 문장이 되지 못하고 불편한 문장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방법을 통해 표출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까지
앞뒤가 떠오르지… 않는다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천연색 꿈이 꾸어지던… 그날도
검은… 것이… 나를 지배했다
만약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다면
…태양도 검고 …건물도 검고
타들어 가는 피부마저… 검을까
하나밖에 없는… 거울도 검고
거울에 비치는 눈의 흰자위도 온통
검을까… 검은… 슬픔과 고독
검은 비애… 검은 울음은 어떨까
어떻게… 이런 곳에까지
앞뒤가 떠오르지… 않는다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숨을 잠시 멈추었던 것뿐인데
머리… 속은 온통 검은 것뿐
검은 과거만… 떠오르고
검은 현실 난데없이 펼쳐지고
돌아갈 수 없는, 아 피할 수 없는
검은 미래만이 여기에서…
― 「검다」 전문

대표적으로 말줄임의 수사를 보여주고 있는 위의 시는 불안하고 절망적인 자아의 심리를 표현한 시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중얼거림은 시적 자아의 분열적이고 황폐화된 정신을 나타내는 것만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내면의 상흔과 정서를 토로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언어 표출방식이다.
말줄임표 사이에 숨어 있는 행간은 더욱 중요한 시인의 삶의 이력이 될 것이다. 말줄임의 정서가 배태되기까지 구체적 삶의 예증은 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에는 정서의 드러냄만 보일 뿐이다. 소외가 가져다준 분열적 상황을 극복할 만한 방안이 시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외를 극복하고 내면을 치유할 방안을 찾았다면 굳이 시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통과 우울 계속 진행된다는 암시의 ‘서술형 제목들’

조현석은 이번 시집에서 독특한 시제 짓기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몇 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로 끝나는 서술형을 시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서술의 제목이 시집의 통일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서술형의 제목을 통해 소외를 감싸안는 내면의 고통과 우울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암시이다. 과거에도 진행되었으며 현재에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진행되고 있다는 암시는 시제의 서술형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좀 과장된 해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조현석의 시를 윤리적 해석의 그물망에서 자유롭게 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한 조현석은 시집의 4부에서 다수의 연시戀詩를 선보이고 있다. 그대에게 보내는 연서 혹은 편지를 날것의 언어를 통해 보여준다. 자칫 4부에 놓인 연시의 시편들이 소외 극복의 방안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연시는 또 다른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적인 아픔과 절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 더 보태어지는 것이다. 그가 깨우친 사랑은 이별의 방식을 통해서이다. 즉 기대하지 않는 것, 절망을 일찍 깨우치는 것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대략 짚어보는 것이다.
조현석이 시 속에서 내놓은 소외 극복의 방식을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성찰의 방식을 통해서일 것이다. 성찰의 방식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화들짝 놀란다
사방이 겨우 1미터도 안 되는 샤워부스 안
알몸으로 서면 온몸에 닭살이 돋아난다
이제 성수聖水를 맞으며 고백할 시간이다
오늘 안일했지만 무사함에 역시 감사해하며
눈앞을 가리며 사각斜角으로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차디찬 물은 이미 낡은 축복이다
차고 넘치기에, 혹여 분에 넘친 저주일지도 모른다
정수리 끝에 덕지덕지 묻혀온 반나절 동안의 비굴과
머리카락에 껌처럼 매달린, 나머지 반나절의 위선과
조금 살찐 목살에 들러붙은 구역질나던 욕지거리와
토실한 견장뼈 위에 내려앉은 능청스러움 따위가
거품에 스며들어 부풀어 오르다가 하수구로 쓸려갈 것이다
비릿한 장마처럼 퍼붓는 세찬 물줄기에도 등 뒤에 달라붙은
물이끼 같은 치욕은 떨어지지 않아 움찔움찔 사타구니가 지린다
가끔 심장이 멈출 만한 회한이 왼쪽 가슴을 짓누르고
부르르 몸을 끓게 하는 상대를 모를 적대감에 놀라기도 하지만
잠깐 생각을 멈추면 다시 속은 냉랭해진다
물방울 뚝뚝 흐르는 유리문 열고 전신거울 앞에 서면
소화되지 못한 욕정에 불룩해진 뱃살이 건드릴수록
더 출렁거리는 욕심이 가슴을 마구 짓눌러온다
비쩍 말라버린 비정상의 두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건하기도 고통스럽기도 한 샤워로 몸은 말끔해지지만
늘 불안한 마음은 씻어지지 않는다
― 「말끔하다」 전문

조현석에게 반성의 시간은 몸을 닦는 행위를 통해 가시화된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성찰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한다. 샤워 부스에서 쏟아지는 물을 ‘성수聖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지금 현실의 삶을 고백하고 싶은 내면적 욕망 때문이다. 차고 넘치는 샤워기의 물은 “이미 낡은 축복”이라 말한다. 그의 몸에 매달린 것은 무엇인가. “비굴”과 “위선”과 “욕지거리”와 “능청스러움 따위”가 몸 구석구석에 붙어 있다. 잘 떨어지지 않는 “물이끼 같은 치욕”도 벗겨낸다. 그럼에도 “소화되지 못한 욕정”은 남아 있다. 더 출렁거리는 욕심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다.
샤워를 통해 몸을 씻어내는 행위는 시인이 터득한 성찰과 고백의 시간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명인이 가지는 지난한 삶에 대한 모든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거행한 샤워는 “경건하기도 고통스럽기도 한” 사건이다. “몸은 말끔해지지만/ 늘 불안한 마음은 씻어지지 않는” 굴레 속에 또다시 들어가야 하는 운명을 아는 것이다.

비어 있던 속, 기름기 없던 뱃속으로
푹 삶아진 염소가 갈기갈기 찢겨져 들어왔다
술 몇 잔과 더불어 신선한 공기도 몇 됫박
소독되지 않은 단양 하선암 생수도 몇 컵
해체된 염소 몸이 남긴 갖은 부속물을
소주 반 잔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어
배 속 깊은 곳에 가두었다
밤새 되새김질하는 염소가 운다
울음이 깊을 때마다 몸이 요동쳤다
속 편해지려고 되지도 않은 되새김질을
나도 여러 번, 하고 또 했지만
날카로운 뿔에 받혀 상처가 난 듯 꾸르르륵…
더부룩했다, 밤새 염소가 풀밭이 아닌
융단 같은 위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놀았다
낮에 몸 부딪는 축구를 해서인지
왼쪽 어깨가 아파 오른쪽으로 돌아눕고
등이 배겨 배를 깔고 돌아누웠던, 아침이
다가오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그놈이 울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먼동 무렵에
잠 깨어 물안개 피어오른 계곡을 거닐 때
예전에 잠시 그곳에서 뛰놀던 염소가
세차게 방파제를 때리던 태풍 속 파도처럼 요동쳤다
빠르게 달려간 구식 화장실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시끄럽게 괴롭히던 염소를 끄집어냈다
쫘르르 쏴아아아아아… 자신이 놀던 곳으로 염소는
회오리 물살에 묻혀 돌아가려던 것이다
찬바람 불고 찬비 내리는 단양 하선암 계곡
물가에 자리 잡고 앉아 몇몇이 두런거렸던 그날
― 「울다, 염소」 전문

시집의 시에서 염소는 죽은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죽은 고깃덩이에도 영혼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살아 있는 염소와 음식을 구분하지 않는 시적 자아는 결국 시원始原을 갈구하는 영혼을 지닌 자이다. 시인은 염소의 부속물을 뱃속에 ‘가두었다’고 했다. 그것은 자아가 타자인 염소를 장악하는 방법이다. 좀 더 의미를 넓혀 말하면 시인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 그것을 음식물로 섭생하는 인간의 폭력성을 스스로의 몸을 통해 느끼고 있다.
이러한 육식의 폭력성은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본능적인 것은 인간의 이성 속에서는 늘 불편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죄책감은 인간의 몸을 통해 이성으로 전달된다. 위 속에서 염소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다. 염소의 원래 자리는 “풀밭”이며 “물안개 피어오른 계곡”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시인의 뱃속에 들어찬 염소의 살점을 참지 못해 한다. 결국 배변을 통해 염소를 배출해낸다. 이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배변’은 생리적인 현상을 넘어 본성의 지점,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고픈 시인의 지향점과 욕망을 잘 표현해준다.
조현석은 이번 시집을 통해 문명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아의 내면을 말줄임의 수사를 통해 보여준다. 눈여겨볼 것은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을 해부하듯 그려내고 있는 소외의 발화가 점차 사물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말하고 있는 자는 여전히 시인이지만, 말하는 자가 그려내는 대상은 ‘안’에서 ‘바깥’으로 옮겨가고 ‘자아’에서 ‘타자’로 이동된다. 자아가 바라보는 풍경 또한 자아의 심적 상태와 세계관으로 삼투되어 발현하고 있다.
“다디단 잠을 청해야 하는 새벽 4시”(「뒤뚱거리다」)의 시간에 깨지 않고 있는 시인의 뒷모습이 시집의 곳곳에 스며 있다. 시인은 이 거대한 도시를 “허옇게 녹아내린 도시”라고, “그날 얘기는 누구나 할 것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숨막힌 연무煙霧 속에서/ 녹아들었던 희망”을 슬쩍 얘기하는 시인은 시 때문에 비로소 꿈꿀 수 있는 것이다.

 _ 조현석 시집, <울다, 염소>(한국문연, 2009) 해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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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몸들이 자아내는 새로운 우주(Cosmos)

이재훈
(시인)



몸은 우리에게 언제나 끊임없는 충족감과 함께 결핍도 함께 전해준다. 결핍이 또다른 충족을 낳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몸이 표현하는 방식은 결핍으로부터 배태된다. 비만한 몸은 역동성이 없으며, 완미하게 충족된 정신은 비생산적 무기력만 낳을 뿐이다. 주린 몸과 결핍된 영혼은 역동적이며, 삶에 대한 자신의 존재증거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인식하는 몸이 ‘노동하는 몸’에서 자신의 정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영혼의 몸’으로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몸을 통한 상상력은 더욱 감각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새로움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요즘 시대를 가리켜 흔히들 ‘몸’의 시대라는 말을 한다. 정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몸이 이제는 우리의 정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몸소 실현하는 또 하나의 정신적 주체가 된 것이다.

모두(冒頭)에 몸에 관한 잡설로 시작한 이유는 이번 도일의 두 번째 개인전 「Beyond the line」(2008)에서 몸이 가진 역동성이 존재의 근본을 탐하는 어떤 가능성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몸은 비루한 정신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도구이다. 몸은 원시적이며, 즉흥적이고 때론 비유적이며 신화적이다. 이제는 살아서 피가 나는 몸이 정신의 영역에까지 들어와 살아서 고뇌하는 인식의 통점(痛點)으로 확장되어 간다.

우리의 일상에서 몸에 대한 지각은 끊임없이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또한 몸이 표현하는 반응은 정신의 어떤 예민한 지점을 정확히 짚어준다. 도일은 이러한 몸의 근본을 ‘움직임’을 통해 드러낸다. 「한 걸음 한 잔」의 작품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가장 친근한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가장 단순한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하고 있다. 즉 운동성을 통해 희노애락을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감수성의 스펙트럼은 희노애락이라는 네 가지 감정으로 표현하기에 너무 다양하고 섬세하다. 기쁨과 슬픔 사이,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어떤 수많은 감정들의 세목들은 언어의 힘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언어가 가진 지시적 폭력성은 단순한 선(線)을 통한 움직임이 주는 섬세한 감정을 통해 무참하게 깨져 버린다. 이것뿐만 아니다. 더욱 놀란 것은 단순한 움직임으로 감정뿐 아니라, 그 몸이 가지고 있는 인격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과장된 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몸이 여러 다른 몸들과 함께 줄지어 이어나가면서 그 줄은 끊기지 않고 다시 되돌아오는 순환의 원리를 통해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몸이 이어지는 것을 통해 몸 하나가 가진 인격은 주변의 몸을 통해 다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다.

몸의 움직임은 시각적인 영역에서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감정의 섬세함과 그 개별의 감정 속에 녹아 있는 몸의 인격을 상상하는 것을 통해 즐거운 미적 체험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몸의 움직임이라 하더라도 춤의 경우는 움직임이 주는 속도의 합(合)으로 전체적인 감정과 미적 세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전시 공간이 주는 개별 몸의 합은 하나의 움직임을 정지하여 미분화시키는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해준다. 그것으로 우리는 천천히 하나의 개별적인 몸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실제적 모습과 투영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체험에서 가장 특별한 체험은 바로 자신의 현재와 작품의 현재를 동일시해서 보는 즐거움일 것이다.

도일은 이전 개인전인 「저작Chew」에서와 마찬가지로 재료가 가진 친근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대중들은 ‘낯설게 하기’의 오래된 예술적 감흥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며, 작품의 소재 또한 친근성이 강하다.

작품 「Beyond the line」 연작은 몸끼리 서로 투영하여 새로운 몸의 색을 입고 있다. 특히 전시라는 특별한 공간성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한 작품이다. 서로의 몸에서 발산하는 빛이 전시의 조명과 어우러져 오묘한 색감을 얻고 있으며, 이 오묘한 몸의 색은 서로 비추고 반사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낸다. 몸들끼리 서로 어우러져 큰 하나의 담론(discourse)을 생산하고 있다. 이 소통은 ‘Beyond the line’이라는 다소 관념적인 명명(命名)과 만나면서 집중력을 분산하고 있다. 「Beyond the line 2」가 보여주고 있는 터널 속의 미궁. 그 미궁의 공간이 들어가고 나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에로티시즘의 상상력 또한 즐거운 체험이다. 미궁은 모두 뚫려 있다. 미궁은 각각의 작은 공간이 얽혀 이루어진 집합소이다. 뚫려 있으면서도 공기가 빠져나갈 것 같지 않게 밀집되어 있고, 촘촘하다 싶어 가까이에 가면 여유로운 공간 속에서 얽혀 있다.

도일은 근본주의자이다. 「만인보」에서 보여주는 조명을 통한 몸의 ‘그림자’도 그런 의미에서이리라. 하나의 몸짓 속에 또 하나의 인격이 숨어 있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과 인격이 가진 정체 아닌가. 더욱 역동적이고 과장되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만인보」에서 쓸쓸한 삶의 비애를 엿본다. 이번 개인전에서 인간의 본질을 몸이 가진 움직임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냄을 보았다. 재료의 긁히고 할퀸 자국들과 움직임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특별한 세계를 보여주는 이번 개인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낀 것일까. 뒤늦게 점점 큰 무게로 내려앉는 도일의 작품세계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지 더 궁금해진다.


작가 도일의 작품 보기 : dop 조형예술연구소  http://blog.daum.net/yadan1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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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젓가락,스테인레스 스틸, 660*770*570.2006.

 

생명을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는 몸




이재훈(시인)





가능하다면 나는 이 글을 사양했어야 했다. 글 쓰는 일을 업(業)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예술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글은 아무래도 미술평론가의 몫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좀 문외한인 편이다. 좋아는 하지만 열정적인 전문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가 도일의 작업에 한 마디 거들기로 마음먹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한때 도일 兄과 황산벌 아래 작업실에서 머리를 맞대며 예술운운하던 시절을 겪은 인연 때문이다. 그 당시 조각가 도일은 [당위]라는 독특한 예술집단을 이끌며 일명 ‘연산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스스로를 야단(野壇)이라 칭하며 “나(몸)는 가장 광범위한 역사적 실체다”라고 외치던 한 예술가의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당시 나는 [당위]의 일원이 되어 당위지에 잡문을 쓰고, 그의 작업장 넌출관에서 장작을 패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삶과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그늘 속에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수혜받은 사람 중의 하나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관객이자 마니아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저작詛嚼 Chew] 연작은 이전에 비해 한껏 여유로워진 느낌이다. 이전 작품들은 한 마디로 딱딱한 껍질이었다. 그의 예술 철학이 너무 완고해 어떤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일방향적 전달에 가까웠다. 물론 이런 부분은 다른 측면에서는 아주 좋은 예에 속하기도 한다. 즉 그의 작품은 비교적 주제가 선명하고 강한, 선 굵은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번 [저작詛嚼 Chew] 연작들은 그 단단한 껍질에 구멍을 열어 숨을 통하게 한 느낌이다.

도일은 근본주의자이다. 그의 관심은 시원(始原)이나 진리의 본질에 가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그가 발 디디고 있는 삶 또한 중요한 정신적 발판으로 삼는다. 또한 완성된 어른의 눈이 아닌, 정체성 속에서 여전히 흔들리는 자아를 탐구하길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호성 속에 있는 자아가 작품의 빈 공간 안을 자유롭게 유영하도록 방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공간과 움직임의 연속이 전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통합(Unity)의 정신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 눈에 띠는 것 중의 하나로 질료의 선택을 들 수 있다. 작가, 특히 조각가의 경우 예술가가 선택한 질료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굳이 뒤샹이나 팝아트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대미술에서 질료 선택이 예술가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오래된 역사이다. 도일이 택한 매체는 철이다. 철은 도일의 초창기 작업에서부터 등장하는 재료이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일련의 Gun 연작을 발표해 왔으며 1994년 발행된 [징후SYPTOM] 그룹전에서도 [M-16A1 사격방법]이라는 작품을 통해 숟가락, 젓가락, 나이프, 포크 등으로 제작된 작품을 발표했다. 아상블라쥬 기법을 통해 제작된 이러한 작품들은 식량전쟁에 대한 경고이자 그 위험성을 알레고리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준 매체들 또한 일상의 공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숟가락, 젓가락, 포크, 밥그릇이나 국그릇 등이다. 이런 점은 재료의 공공성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작품에 그대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시도라고 본다. 숟가락, 젓가락 같은 식도구들의 경우 개인만이 사용하는 개별성의 차원에서보다 가족, 지역, 사회 나아가서는 한 나라의 문화적 공공성을 띠는 특성을 지닌다. 많은 사람들의 몸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즉 먹는 것이나 쉬는 것의 용도를 가진 사물들은 기(氣)가 센 재료들이라 하겠다. 작가는 이런 재료들을 고물상이나 폐업하는 가게를 통해 재료를 확보했다고 한다. 이들 재료는 제철소로 가서 또다른 재료의 철로 윤회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술가 도일이라는 용광로를 만나면서 하나의 예술품으로 환생한 것이다.

이러한 재료, 즉 매체지향을 가진 도일의 작업은 재료가 가진 공공성을 바탕으로 두드리고 붙이고 녹이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꽃으로 탄생한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또한 생명을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는 몸이다. 작가는 꽃을 잉태하고 있는 줄기나 뿌리를 기(器)라는 형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기(器)의 공간은 막혀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뚫려 있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하나의 그물망처럼 보인다. 그물망은 공(空)과 허(虛)를 담은 순환과 윤회의 세계를 지향한다. 하나의 열려 있는 공(空)에서 꽃으로 화(化)한 모습들은 다양한 파장으로 변주된다. 그것은 스텐을 두드려 만든 나뭇가지로, 혹은 오묘한 색감의 몸을 지닌 넓은 동판으로 확산된다. 순환이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작품은 숟가락, 젓가락과 청주잔으로 제작된 사람의 형상들이 여덟팔자(字) 모양을 그리며 설치된 작품이다. 이 작품 또한 108개의 인간상을 통해 백팔번뇌를 연상케 하고,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이어지고 순환하는 무한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번 작품들 속에서 또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은 작품의 디테일한 부분들이다. 예를 들면 스텐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작품에서 숟가락과 찻수저로 만든 작은 나비 같은 것들이다. 그 작은 나비는 자아에 잠깐 스쳐 앉았다 간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 존재들은 건강한 생명력을 얻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아가기를 기원하고 있다. 또한 철을 용접하며 얻은 접합점의 반짝임 같은 것들은 작품을 더욱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디테일한 부분들이다.

도일의 이번 작품은 여러 사물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는 세계, 즉 전체성에 대한 커다란 상징으로 읽힌다. 그의 작품은 철이라는 매체와 전체성의 의식, 공간과 선과 붙임을 활용한 형태가 모두 조화롭게 이루어낸 세계이다. 그는 언제나 진지한 열정으로 작품을 생산해내는, 오로지 작품 속에 자신의 영혼 전체를 밀어 넣는 예술가이다. 이제 그의 다음 작품은 어떨지를 상상하고 기다리는 관심이 우리들에게 남겨진 몫일 것이다.


인사아트센터 2007.6.27일부터 7.3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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