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에 중독된 시대의 시_ 신진숙

 

 

 

 

 

   세계의 비참 앞에서도 시인들은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시인들이 마주한 가장 강력한 현실이다. 낙관이나 전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극과 종말 또한 없으며,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지만 어떤 혁명도 추구되지 않는 세계. 모두가 자신이 처한 슬픔과 자신의 가계(家計)만을 염려하는 세계. 타자 없는 삶.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본질이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알은 체하지 않는.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타자의 삶에 대한 의무나 책무로부터 배제된, 상처받은 존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점에서 용서와 힐링(healing)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 어느 시대에도 힐링이 이토록 중요했던 시대는 없었다. 산업화의 후유증을 앓는 몸을 돌보는 웰빙(well-being) 바람에 이어 힐링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다. 고대 주술사의 치료 방식을 모방한 것처럼 보이는 힐링은 근대 이후의 인간이 느끼는 정신적 폐허감(廢墟感)은 치료한다. 방송에서는 날마다 눈물과 호소, 애도를 결합한 힐링의 주술이 재연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힐링을 통해 심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힐링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해방만을 의미함으로써 나와 타자의 삶을 분리시킨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힐링의 순간, 우리는 세계의 비참을 잊는다. 그 속에는 간단하고 명료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 나는 내 고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에게는 타자의 삶과 고통이 존재한다. 힐링은 상처 때문에 무너진 하나의 세계, 즉 나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세계를 다시 재건하도록 돕는다. 힐링과 나르시시즘이 통합된다. 그리고 우리는 힐링에 중독된다. 

   물론 시인들 역시 그 누구보다 치유를 희망한다. 그러나 시인들의 언어는 주술적이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자기 연민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세계의 비참을 눈감을 수 없다. 시인들은 오히려 힐링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타자에 대한 사유를 중지시키는 힐링이야말로 어떤 것도 힐링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힐링에 중독된 시대에 시인은 힐링의 덫을 벗어나,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시적 치유가 세계의 비참을 망각하는 것도 근거 없는 행복감도 아니라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재훈의 시 〈평원의 밤〉을 읽어 보자.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두통 때문이네. 내 몸에 잡초들을 태우려 했네. 산화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거라 여겼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떠나는 게 배려라 생각했네.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 나는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네. 충만한 마음으로 춤을 출 것이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옷자락에 배었던 냄새 한 다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슬픈 밤이네. 천둥이 음악소리를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것이네.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것이네. 평원에 앉아 바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네.
— 이재훈 〈평원의 밤〉(《유심》 8월호)

 

   자기애(自己愛)에 상처를 입은 존재는 역설적으로 타인의 슬픔에 무감해지곤 한다. 힐링이 주는 위안은 상처받은 이 자기애를 복원하는 것에 집중된다. 핵심은 타인을 어느 정도 무감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슬픔이 제거될 수 있도록 무심(無心)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힐링의 최종 목표다. 그럴 때 우리 모두는 상처받은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타인과 나의 관계 또는 세계 자체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이 시의 한 구절,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라고 말하기 이전까지 화자가 처한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슬픔이 없는 삶을 꿈꾸는 한, 힐링의 주술은 풀리지 않는다. 힐링이 가져오는 거짓 마법에 빠져든다. 진정한 시적 치유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 출발하지만, 나 자신의 슬픔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다른 것이 아니듯. 슬픔이라는 심연은 삶의 외곽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다. ‘힐링’에서 ‘치유’로 나아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재훈 시인은 어떤 계기 속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얻었는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침묵’ 덕분이다. 즉, “천둥이 음악소리마저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그 무렵에서야 발견되는 언어의 심연. 우리 자신은 자신의 언어를 잊을 때 비로소 슬픈 ‘한 사람’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제 슬픔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름다운 슬픈 동물”이 된다.

 

 

_ <유심>, 2013년 9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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