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몸들이 자아내는 새로운 우주(Cosmos)
이재훈
(시인)
몸은 우리에게 언제나 끊임없는 충족감과 함께 결핍도 함께 전해준다. 결핍이 또다른 충족을 낳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몸이 표현하는 방식은 결핍으로부터 배태된다. 비만한 몸은 역동성이 없으며, 완미하게 충족된 정신은 비생산적 무기력만 낳을 뿐이다. 주린 몸과 결핍된 영혼은 역동적이며, 삶에 대한 자신의 존재증거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인식하는 몸이 ‘노동하는 몸’에서 자신의 정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영혼의 몸’으로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몸을 통한 상상력은 더욱 감각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새로움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요즘 시대를 가리켜 흔히들 ‘몸’의 시대라는 말을 한다. 정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몸이 이제는 우리의 정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몸소 실현하는 또 하나의 정신적 주체가 된 것이다.
모두(冒頭)에 몸에 관한 잡설로 시작한 이유는 이번 도일의 두 번째 개인전 「Beyond the line」(2008)에서 몸이 가진 역동성이 존재의 근본을 탐하는 어떤 가능성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몸은 비루한 정신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도구이다. 몸은 원시적이며, 즉흥적이고 때론 비유적이며 신화적이다. 이제는 살아서 피가 나는 몸이 정신의 영역에까지 들어와 살아서 고뇌하는 인식의 통점(痛點)으로 확장되어 간다.
우리의 일상에서 몸에 대한 지각은 끊임없이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또한 몸이 표현하는 반응은 정신의 어떤 예민한 지점을 정확히 짚어준다. 도일은 이러한 몸의 근본을 ‘움직임’을 통해 드러낸다. 「한 걸음 한 잔」의 작품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가장 친근한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가장 단순한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하고 있다. 즉 운동성을 통해 희노애락을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감수성의 스펙트럼은 희노애락이라는 네 가지 감정으로 표현하기에 너무 다양하고 섬세하다. 기쁨과 슬픔 사이,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어떤 수많은 감정들의 세목들은 언어의 힘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언어가 가진 지시적 폭력성은 단순한 선(線)을 통한 움직임이 주는 섬세한 감정을 통해 무참하게 깨져 버린다. 이것뿐만 아니다. 더욱 놀란 것은 단순한 움직임으로 감정뿐 아니라, 그 몸이 가지고 있는 인격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과장된 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몸이 여러 다른 몸들과 함께 줄지어 이어나가면서 그 줄은 끊기지 않고 다시 되돌아오는 순환의 원리를 통해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몸이 이어지는 것을 통해 몸 하나가 가진 인격은 주변의 몸을 통해 다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다.
몸의 움직임은 시각적인 영역에서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감정의 섬세함과 그 개별의 감정 속에 녹아 있는 몸의 인격을 상상하는 것을 통해 즐거운 미적 체험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몸의 움직임이라 하더라도 춤의 경우는 움직임이 주는 속도의 합(合)으로 전체적인 감정과 미적 세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전시 공간이 주는 개별 몸의 합은 하나의 움직임을 정지하여 미분화시키는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해준다. 그것으로 우리는 천천히 하나의 개별적인 몸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실제적 모습과 투영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체험에서 가장 특별한 체험은 바로 자신의 현재와 작품의 현재를 동일시해서 보는 즐거움일 것이다.
도일은 이전 개인전인 「저작Chew」에서와 마찬가지로 재료가 가진 친근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대중들은 ‘낯설게 하기’의 오래된 예술적 감흥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며, 작품의 소재 또한 친근성이 강하다.
작품 「Beyond the line」 연작은 몸끼리 서로 투영하여 새로운 몸의 색을 입고 있다. 특히 전시라는 특별한 공간성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한 작품이다. 서로의 몸에서 발산하는 빛이 전시의 조명과 어우러져 오묘한 색감을 얻고 있으며, 이 오묘한 몸의 색은 서로 비추고 반사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낸다. 몸들끼리 서로 어우러져 큰 하나의 담론(discourse)을 생산하고 있다. 이 소통은 ‘Beyond the line’이라는 다소 관념적인 명명(命名)과 만나면서 집중력을 분산하고 있다. 「Beyond the line 2」가 보여주고 있는 터널 속의 미궁. 그 미궁의 공간이 들어가고 나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에로티시즘의 상상력 또한 즐거운 체험이다. 미궁은 모두 뚫려 있다. 미궁은 각각의 작은 공간이 얽혀 이루어진 집합소이다. 뚫려 있으면서도 공기가 빠져나갈 것 같지 않게 밀집되어 있고, 촘촘하다 싶어 가까이에 가면 여유로운 공간 속에서 얽혀 있다.
도일은 근본주의자이다. 「만인보」에서 보여주는 조명을 통한 몸의 ‘그림자’도 그런 의미에서이리라. 하나의 몸짓 속에 또 하나의 인격이 숨어 있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과 인격이 가진 정체 아닌가. 더욱 역동적이고 과장되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만인보」에서 쓸쓸한 삶의 비애를 엿본다. 이번 개인전에서 인간의 본질을 몸이 가진 움직임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냄을 보았다. 재료의 긁히고 할퀸 자국들과 움직임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특별한 세계를 보여주는 이번 개인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낀 것일까. 뒤늦게 점점 큰 무게로 내려앉는 도일의 작품세계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지 더 궁금해진다.
작가 도일의 작품 보기 : dop 조형예술연구소 http://blog.daum.net/yada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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