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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06 징후는 없다- 현대시의 새로운 징후와 담론의 가능성

징후는 없다

― 현대시의 새로운 징후와 담론의 가능성

 

 

 

이재훈

 

 

 

 

 

1.

 

시는 늘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온다. 무의식적으로 다가와 내면화되었다가 다시 목구멍 밖으로 토해내는 이 목소리들은 늘 무정형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애벌레 주체’들의 목소리는 무의식 속에서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의 목소리를 빌려 온다. 아직 이성적으로 객관화되지 않은 목소리들이, 윤리적이지 않은 날 것의 목소리들이 신기(神氣)의 목소리를 타고 뱉었다 들이켰다를 쉬지 않고 반복한다. 애벌레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쉬지 않고 뱉어내는 애벌레들의 소리는 이 땅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시인은 무당이 아니던가. 애벌레들의 목소리는 주술사의 구음과 같다. 정체를 알 수 없으나 그 소리엔 신탁이 있으며 예언이 있다. 그 소리엔 치유의 부드러움이 있으며 상처를 소환하여 멀리 떠나보내려는 씻김이 있다. 때론 마녀의 목소리가 출몰하며, 때론 그로테스크한 환영의 그림자가 출몰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징후는 늘 예기치 않게 온다. 시의 언어가 늘 먼저였으며, 그 목소리를 재단하고 목소리의 특성을 살피는 일은 늘 뒤에 온다. 징후를 살피는 일은 지금 우리의 현재를 살피는 일이며, 지금 현재를 통해 시가 지나가는 존재의 자리를 다시 되짚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때론 예언적 목소리들이 징후의 그물망에 걸리기도 하고, 때론 그물망에 걸리지 않고 스스로 침묵의 길로 걸어가기도 한다. 징후는 늘 사회적 현상, 역사적 흐름, 현대인의 보편적 특성 등과 함께 재단된다. 시의 목소리는 새로운 개념어를 통해 이리저리 분절되고 재단되어 이러저러한 틀 속에 넣어진다. 그동안 미래, 정치, 윤리, 미성년, 서정과 극서정, 반미학, 환상 등의 개념으로 주체의 표본을 만들고 시의 목소리는 새로운 발성이나 음색으로 표본화되어 전시되었다. 시의 화자는 늘 세계와 화해를 꿈꾸는 이상(理想)으로 간주되어, ‘차이’나 ‘불화’와 같은 다소 불편한 개념어로 자주 뭉뚱그려졌다.

애벌레들이 뱉어내는 무수히 많은 자아들의 목소리는 이구동성으로 중엉거린다. 우리는 화해의 파수꾼도 아니며 불화와 전복의 점령자도 아니라고. 우리는 단지 무의식적 영혼의 소리라고. 화해와 불화를 동시에 뱉어내는 벌레들의 소리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모든 소리가 명창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목소리들 가운데 하나를 건져올려야 한다. 눈 밝은 선자(選者)들과 발견자들에 의해 소리 가운데 하나가 점지되어 새로운 목소리로 발견된다. 이 발견은 이미 징후된 것인지도 모른다. 문명과 사회는 급속도로 변화하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도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에 발맞추어 시의 목소리도 발 빠르게 시대를 대변하리라고 믿었다. 물론 시는 시대를 대변한다. 하지만 시는 가장 넓은 범위의 기억들을 모두 떠안고 있는 기록물이다. 존재 이전과 존재 이후, 문명 생성 이전과 문명 파괴 이후의 시간까지 시는 기억하거나 예견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늘 징후나 예감을 좋아하기에. 시대적 사명 속에 깃발든 시를 늘 발견하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기쁨은 시의 언어와는 늘 상대적인 윤리의 언어를 가장 독실하게 그려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겨워. 발을 차 넣자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꾸욱 삼켰다.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찔끔, 발소리를 냈다. 하루 종일 짧아진 발목으로 기어 다니던 나. 오늘은 그녀의 목구멍에서 내가 차 넣은 발을 찾았다. 깨끗이 닦아 낸 나의 구두를 그제야 입 밖으로 밀어 올리며, 사랑해요. 많은 날 동안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벌레, 그녀

 

배 속을 열어 보니 오래전 내가 씹다 뱉은 말들이 들어 있었다. 당신이 그랬다고요, 내게. 가로줄무늬가 길게 늘어진 그녀의 배가 동그랗게 출렁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보다는 고통에 소리치는 동물들을 더 사랑했고, 헤어져.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녀. 뇌 속에는 이미 벌레가 가득했다. 그건 모두 둥글둥글 그녀를 닮아 꾸물거렸고 찔러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해. 그녀가 사라진 곳에서 천천히 그녀의 남은 영양분을 모두 빨아먹고 나오는 나. 어느 날은 새까맣고 날카로운 눈빛의 내가 죽은 그녀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날갯짓을 하며 날고 있었다. 벌레들. 털어 내도 계속 벌레가 꼬였다. 당신을 사랑했었다고요. 벌레처럼. 그녀들이 벌레처럼, 벌레처럼 속삭였다.

― 조혜은, 「벌레―그녀」 전문

 

조혜은의 시는 애벌레들의 자아가 여러 겹을 통해 발화된다. 이미 많은 시를 통해 이성적 자아와 자폐적인 자아를 중첩시킴으로써 개인의 내면을 여러 색깔의 스펙트럼으로 보여준 조혜은에게 벌레의 말은 진실의 말과도 통한다. 진실은 가능한 말이며, 경험적으로 가장 절박한 말이기도 하다. 그녀의 내면은 “나”와 “그녀”의 목소리가 서로 혼융되며 벌레의 정체성을 서로 나누어 가진다. 시의 화자는 그녀에게 “발을 차 넣는” 존재이며,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꾸욱 삼키”는 존재이다. 시의 화자는 시적 대상인 “그녀”와 피학과 자학을 나누는 존재이며, “그녀”는 고딕체의 독백으로 화답한다. “지겨워”, “당신이 그랬다고요, 내게”, “헤어져”, “당신을 사랑했었다고요, 벌레처럼”과 같은 고백과 내면으로 소통하는 말들은 그러한 점을 잘 직시해준다. 하지만 이 가학과 피학의 관계는 서로 다른 몸이 아니며 한 몸이다. 그녀의 목구멍에서 “내가 차 넣은 발을 찾았”기 때문이다. 구두를 밀어올리며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그녀는 “벌레”로 형상화되어 있다. 벌레로 가득찬 그녀의 몸엔 “내가 씹다 뱉은 말들이 들어 있었다”. 시의 화자가 뱉어낸 말들은 그녀의 몸속에서 벌레로 변이(變移)된 것은 아닌가. 결국 시의 화자는 “그녀의 남은 영양분을 모두 빨아먹”는다. 그리곤 “그녀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날갯짓을 하며” 날고 있다. 벌레는 쉬지 않고 그녀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에워싸고 있다.

조혜은이 벌레를 통해 본 현실은 벌레와 싸우고 있는 시적 자아의 분투로 점철되어 있다. 시의 화자와 그녀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한 몸이며, 내면의 일과 바깥의 일 또한 허물어진 경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환(幻)의 공간은 실체를 가지지 않으나, 실체와 같은 극사실의 경험을 우리에게 준다. 시의 화자는 뼈저리게 내면의 일을 현실의 일로 감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겹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일은 현실에서 모두 발생하는 일이지만 이 현실의 감정이 내면으로 습합(習合)되면서 내면의 일로 다시 발화되고 있다. 이 작은 벌레의 말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의 말이며 가장 절박한 자아의 말이기도 하다.

 

2.

 

스펙트럼은 가시광선을 파장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문학에서도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다양한 파장의 스펙트럼이 존재하듯 문학, 혹은 시에서도 다양한 목소리들을 함께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까. 그저 수많은 시 속에서 선명한 색깔을 하나 건져 올려 특별한 것인 양 자찬한다. 혹은 비슷한 색깔들끼리 묶어 새로운 계열의 색을 발견했다고 자찬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담론이 발생한다. 늘 시는 담론보다 먼저였으며, 담론을 위한 시는 언제든지 즐비하다. 어떤 면에서는 시적 담론이 아니라, 철학의 신기술을 시에 대입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시단에서는 몇 년 동안 담론부재를 걱정하며 새로운 담론을 찾기에 급급했지만, 그 결과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전 담론의 부채를 다 갚기도 전에 새로운 빚을 지고 있다. 시적 담론의 부재가 아니라 시를 재단할 철학의 부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를 재단할 철학적 아이디어의 부재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시가 아주 극명하고 선명한 색을 내는 목소리만 즐비할까. 대부분의 많은 시들은 이 색도 아니고 저 색도 아닌,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닌 색을 가진 목소리들일 것이다. 무슨 색인지 규정할 수는 없지만 오묘하고 매력적인 색을 가진 목소리들이 대부분 아닐까. 하지만 많은 선자들은 가장 극단의 색깔만을 문학사에서 유용한 목소리라고 규정한다. 근대문학에서 어쩔 수 없이 재단했던 이분법적 프레임에서 우리는 아직도 갇혀 있다. 모던과 리얼, 전통과 전위, 농촌과 도시, 현실과 환상 사이의 수많은 스펙트럼을 가진 목소리들은 그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 목소리로 둥둥 떠다닐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늘 딜레마이다. 어떤 시를 평하는 것은 결국 어떤 목소리 하나를 끄집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의 언어는 누군가에게 선택되자마자 어떤 성향과 색깔의 목소리로 규정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발화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붉은 띠를 맨 시인이 되기도 하고, 푸른 띠를 맨 시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명명해줌으로써 시인의 말은 그 사명을 따라가야 한다는 무의식적 다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시인들이 내뱉는 목소리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현실의 어디쯤일까. 지구의 반대편일까. 지구를 벗어나 우주의 어디쯤일까. 아니면 공간이 아니라 환상이 구성되는 미정형의 이미지일까. 그곳이 어디든 시인의 목소리는 바로 이곳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이곳 현실을 우화하거나 비유하거나 대상화하면서 때론 이국으로, 낯선 땅으로, 기억의 먼 곳으로, 우주와 환상이 기억하는 어떤 곳으로 목소리가 날아든다. 어떤 의미에선 현실이 없는 시는 없다. 지금 이 현실이 우리의 언어를 만들고 꿈꾸게 하므로. 또한 그런 의미에서 완벽히 현실을 반영하는 시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곳이 어디든, 이제 그 실존의 목소리를 따라 읽어 본다. 그들의 현실이 어떤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 소요하며 긁적이며. 없는 징후를 만들거나 예감하면서.

 

엘프족을 닮은 여자가 있다

이름 모를 행성과 충돌하고

흩어진 가계를 수습하기 위해

가위 하나만 달랑 손에 쥐고

지구별로 야반도주한 여자

건조한 내 머리에 물을 뿌리며

숙련된 손길로 싹둑싹둑

한 달간의 근심을 가지 치는 여자

웃자란 생각들을 좌우로 보며

마침맞게 중심을 잡아 주는 여자

이따금 새순으로 피어난 꽃말들이

그믐처럼 그윽하게 입가에 스미는 여자

언젠가 여자는 나를 쓸어 담고

그녀가 왔던 행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레이스가 달린 은하수 돗자리를 깔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불러 모아

내가 지금 잠시 무릎에 손을 얹고

그녀의 손길을 따뜻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머―언 작은 별 이야길 해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내 머리 위에

비행접시처럼 떠서 우주의 먼지들을

구석구석 헹구고 있다

― 김산, 「은하 미용실」 전문

 

김산은 이곳의 현실을 화성이라고 한 적이 있다.(「화성 관광 나이트」)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관광 나이트의 공간을 화성으로 비유하여 지구인의 숨겨진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었다. 화성을 불의 별로 지칭하며 욕망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을 이루는 공간이 되는 것은 관광 나이트의 공간이 이곳의 현실과는 다른 욕망의 배설소이기 때문이다. 즉 관습적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공간에서 가장 빨리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이 관광 나이트이다. “가만히 누워 부울, 하고 부르면 온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오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보면 어느새 당도하는 곳”이 바로 불의 별 화성이다. “정열적인 아낙들이 요술공주 밍키처럼 사자로 늑대로 변신하는 곳”은 화성에서만 가능하다.

현실의 공간을 우주의 일로 극화시키는 시적 재기(才氣)는 은하 미용실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은하 미용실은 잘 쓰여진 서정의 구조를 띄고 있으면서, 그 내용의 변주를 통해 새로운 시로 읽히게 된다. 미용실의 여자는 엘프족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일련의 행위는 우주에서의 경험을 수습하는 일로 치환된다. 시에서 은하 미용실의 여주인은 과거 삶의 고통과 역경을 “새순으로 피어난 꽃말들”로 이겨내는 희망의 엘프족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역설적이게도 현실을 더 고통스럽게 느끼게 한다. 은하 미용실의 그녀는 우주에서 온 여인이며 엘프의 요정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꿈꾸는 일들은 “머―언 작은 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이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위의 시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각자의 런던은 영국에 없다.

각자의 런던은 삼례에 있는 술집이다.

검정색 통유리에 빨간색 이층버스가 그려진

각자의 런던은 소읍에서 다소 파격적이다.

소읍만큼이나 사건사고가 없는 이곳,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과 멱살잡이가 없다.

화장실 거울에 붉게 떠도는 립스틱이 없다.

쟁반에 코를 박고 쓰러지는 대머리가 없다.

알코올로 빌어먹고 사는 각자의 런던,

엉덩이 밀고 끄는 의자들의 노동이 없다.

복제화를 진정 사랑하는 화이트칼라가 없다.

각자의 런던은 사장님이 일으킨 제국,

사장님은 제국을 쇠사슬로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각자의 런던은 각자의 대문을 닫은 나라,

퇴근길을 봉지에 담고 들어가는 가장이 없다.

이제는 어떠한 중독자도 없는 각자의 런던,

소읍에서 가장 세련된 디자인을 가졌던

현관이 굳게 잠겨버린 금단의 제국.

― 백상웅, 「각자의 런던」 전문

 

백상웅이 말하는 삼례의 현실은 “각자의 런던”으로 변용되어 우리에게 남는다. 누구나 내면에는 런던이라는 조용하고 세련된 서구의 도시를 가지고 있지만, 시에서 “각자의 런던”은 술집이름일 뿐이다. 시인이 바라본 것은 관습적으로 알려진 런던이 아니라 “현관이 굳게 잠겨버린 금단의 제국”으로서의 술집이다. 이 술집은 이미 멸망한 제국이기에 사건사고가 없는 공간이 된다. 즉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과 멱살잡이”, “화장실 거울에 붉게 떠도는 립스틱”, “쟁반에 코를 박고 쓰러지는 대머리”가 없는 술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중요한 점은 사연이 없음으로해서 노동이 없다는 것이다. 사장님이 일으킨 제국이 없다는 것. 제국이 없으면 노동도 없고 노동이 없으면 “퇴근길을 봉지에 담고 들어가는 가장이 없다”. 런던과 삼례는 공간적 심리적 거리의 문제이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자와 노동을 관리하는 사장과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 가족의 사유가 들어가 있다. 백상웅이 「도계」에서 말한 “여기에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죽는” 공간이 서로 맞물리며 경계를 이루는 것처럼, 지명과 방언도 하나의 경계에 속한 것처럼, 한 술집과 마을과 이 땅의 모든 공동체는 이런 경계를 뛰어넘어 공통의 조건과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

 

3.

 

공간은 늘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구분한다. 바깥과 안의 경계, 시적 자아가 참여한 공간, 확인한 공간, 미지의 공간, 관념의 공간 등으로 구획되곤 한다. 시인은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오가며 경계의 무화를 향해 노력한다. 시간의 경험은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에겐 더할 수 없이 막연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공간의 보고이다. 그 경험은 기억의 방법론으로 실체화된다. 먼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면서 지금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유희경의 시에 드러나는 가족사나 시간과 계절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이런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저녁이 되면 스스로 사막이 되는 방법을 연구한다 더 빨리 늙기 위해 천천히 걷고 뒤로 걷다, 갑자기 돌아서서 잊으려 했던 사람을 떠올리는, 조금 시큰한

 

지도는 조금씩 자라는 동물 같은 것이다 봉투를 뜯는 내 건조한 경력을 생각한다 아버지란 기호에선 캐치볼이 떠오르지만,

 

어느새 나와 아버지 사이 넓게 자리 잡은 이만 헥타르쯤의 운동장 이따금, 몰래 알약 반 개 같은 씨앗을 심지만 자라는 것은, 없다

 

방금 불어온 바람을 등지고 어리고 슬픈 내가 공을 주우러 뛰어간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글러브는 누구의 가죽이고 날아가는 것을 보면 왜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는가

 

계집애가, 오빠를 쫓다 울음을 빙그르르 돌리는 저녁이다 더는 돌릴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참는, 어쩌면 생활의 무늬란 그런 것이지 꼭 다문 입술의 주름 같은 것

 

그러나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날리지 않는다 단단하게 여물어 열리지 않는 길의 가슴을 열기 위해 새빨간 태양이 넘어간다 잡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법 따위는 지운 지 오래

― 유희경, 「지워지는 地圖」 전문

 

지도는 어딘가를 가리켜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기호이다. 지도를 통해 전체를 보거나, 전체 속에 밀집되어 있는 세밀한 공간을 확인한다. 유희경의 지도는 기억의 지도이며, 흔적의 지도이다. 기억의 나침반은 아버지의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향한다. 시의 화자는 “더 빨리 늙기 위해 천천히 걷고 뒤로 걷는” 자이다. 더 빨리 늙고 싶다는 것은 잊으려 했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도가 “조금씩 자라는 동물”과 같다는 생각은 아버지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아버지라는 기호가 자신의 시간을 무력하게 하고, 아버지의 실체로 들어가는 지도도 더 넓어지게 만든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펼쳐든 지도는 “이만 헥타르쯤의 운동장”이다. 그 운동장에서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려면 그 넓은 운동장을 뛰어가야 하고, 숨을 참아야 하고, 전력 질주해야 한다. 시의 화자는 길을 잃어버린다. 시인의 기억술은 특별한 것이어서 아버지에게 가는 길의 지도는 더 넓어진다. 아버지라는 기호는 쉽게 해석되지 않는 암호와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넓어진 생각의 그늘이 시인의 시간을 에워싸고 있다.

 

거기에서는

죽은 자의 피부를 벗겨 가까운 사람들이 나눠 가진다더군

아끼는 책을 장정하고 이름을 새긴다더군

죽은 자는 책이 된다더군

아기가 태어나 글을 익히면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한다더군

그를 대부로 삼는다더군

거기에서는

몇권의 책을 장정하며 성인이 된다더군

결혼을 서약할 때는 책에 손을 얹고

여기 장엄한 생을 두고 맹세합니다, 말한다더군

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더군

거기에서

죽은 자는 몇권의 책이 된다더군

문자의 외투가 된다더군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

삶에 관한 의문이 드는 저녁에 쓰다듬는

한권의 생이 된다더군

― 유병록, 「사자(死者)의 서(書)」 전문

 

“아무래도 나는 빨강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했던 유병록은 색깔을 통해 자신이 감각한 세계의 일면을 얘기했다.(「빨강」) 위의 시에서는 우리 현실 이후의 세계를 감각한다. 유병록은 죽은 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려고 한다. ‘사자의 서’는 지하세계를 안내하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경험하거나 실증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감각하거나 확신할 뿐이다. 감각이나 확신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방법에 따라 종교적 믿음이 생긴다. 유병록이 감각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현실을 책으로 소통하는 자아가 출몰한다. 이 현실을 문자로 해독하고 이해하고 결국 자신이 책으로 남는다는 것은 시인이 할 수 있는 자의식에 가깝다. 시에서 아기가 태어나 글을 읽히면 “가장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받는다. 또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몇 권의 책을 장정”해야 하며 결혼을 서약할 때에도 책이 필요하다. 이뿐 아니다. 책은 “죽은 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창구역할을 하기도 한다. 죽은 자와 연결할 수 있는 책. 이 책은 죽은 자가 몸으로 남기는 가장 완벽한 유품이 된다. 이 유품은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으로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으로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로 각각 남겨져 인간의 유산이 된다.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자들이 서로 교통하는 매개물로서의 책. 그 책은 죽음을 경험한 한 개인의 실존에서부터 출발하였지만, 우리 모두가 긍정하며 감각할 수 있는 죽음 이후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답장을 쓰다 말고

눅눅한 구들에

불을 넣는다

겨울이 아니어도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고

덜 마른

느릅나무의 불길은

유난히 푸르다

그 불에 솥을 올려

물을 끓인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延音) 같은 것들도

뚝뚝

뜯어넣는다

나무를 더 넣지 않아도

여전히 연하고 푸른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 박준, 「당신의 연음(延音)」 전문

 

환후의 고백을 쓰며 구들에 불을 넣는 시인의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혼자라는 단독자의 시간을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이렇듯 꽉 채울 수 있을까. 덜 마른 느릅나무나 솥에 올려진 물까지도 모두 그리움이라는 시인의 마음에 봉사하고 있다. 이런 먹먹한 시에 무슨 해설이 필요할까. 잊고 있었던 당신의 연음을 함께 되뇌며 나의 그리운 시간을 뜯어 넣으면 된다. 여전히 연하고 푸른 것들이 떠오를 때까지.

징후는 없다. 비바람과 폭풍과 지진의 징후는 있어도 시 언어의 징후는 없다. 다만, 시가 있을 뿐이며, 시 이후에 유포되는 소문이 있을 뿐이다.

 

_ <시인동네>, 2014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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