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의 옹호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1. ‘이후(以後)’의 시학
최근 우리 시에 한 시대를 집약하고 향도하는 시정신의 고갱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는 일부 평자들의 견해는, 이성 중심주의에 견고한 토대를 둔 근대주의적 시선일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그 ‘고갱이’라는 것은 다분히 중앙 집권적인 ‘중심(이성, 이념, 진정성)’에 대한 향수의 표상일 가능성이 높다. 아닌 게 아니라 ‘계몽-이성’이라는 근대적 판관(判官)의 역할이 현저하게 약화되면서 근대 이성이 몰고 온 여러 징후들에 대한 긍정과 불신 그리고 그것의 재구축(결코 ‘폐기’가 아니다)의 열망이 부단히 교차하고 있는 지금, 그 ‘고갱이’는 그야말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원심(遠心)을 형성하면서 확산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시대의 시편들은 미학적 차원에서는 유례없는 다양성을 이루고 있고, 아직까지 대체적 구심(求心)을 암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사에서 가장 확연한 이행기적 속성을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시편들은 정보화, 탈(脫)냉전, 생태론 같은 담론들이 숨가쁘게 대두하고 일정하게 소강 상태에 빠져버린 포스트-포스트의 시기 곧 ‘이후(以後)’의 시학을 보여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동안 출몰했던 근대에 대한 대안 담론들이 과거와의 차별화 전략에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미래적 좌표 설정에는 미흡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속성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국가 사회주의의 현실적 몰락 이후 나타났던 탈근대 담론들은 우리 시로 하여금 엄숙주의와 계몽성을 반성적으로 사유하게끔 하였고, 기존의 언어 권력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게끔 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우리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자질이었던 ‘전망’과 ‘비극성’을 천천히 지워나갔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비현실적 환상으로 치부되었고, 엄숙한 전망보다는 가벼운 현재형이 선호되었고, 시를 통한 인문적 통찰은 낡은 유적(遺跡)을 더듬는 것으로 등치되었다. 또한 열정의 막다른 곳에서 펼쳐지게 마련인 ‘비극성’ 대신 일상적 ‘권태’가 그 틈을 메웠고, ‘절망’이라는 치열한 실존형 대신 낱낱의 사물을 비유기적으로 바라보는 ‘환멸’이 주된 정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심화되면서 펼쳐지는 이 같은 미학적 근시성(近視性)의 양상들은, 이제 우리에게 만만찮은 메타적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 가령 그것은 시 장르의 창조적인 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요청하고 있는데, 후기 자본주의의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인간 존재 형식이 개체적 감각과 대중문화적 감염에 의해 규정되는 힘이 점증(漸增)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우리가 맞고 있는 메타적 요청의 파고(波高)는 결코 간단치 않다.
2. 우리 시대 ‘서정’의 원리
앞에서도 암시하였듯이, 우리 시대의 주류 미학은 사회 변혁에 대한 회의와 자연으로의 침잠 그리고 감각성과 내면 심리로의 경사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 세계가 편제되어가고 있는 추세를 감각적 차원으로 반영한 결과이자 일정하게는 철학적 차원의 대응까지를 아우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경향이 공동체 단위의 이념적 지표(指標)까지는 될 수 없는 까닭은, 그것들이 개체적 감각에는 충실하면서도 인간 존재 형식의 보편성까지 환기하는 데는 그 철학적 기반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른바 탈(脫)중심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우리 시대 시편들의 문제점은, 개체적이고 고립된 단자(單子)들에 의해 목소리가 생성, 소멸한다는 점과 개개 시편들이 상보적으로 소통하면서 한 시대를 표상하는 보편적 공감으로 승화되기에는 현저하게 미학적 에너지가 모자란다는 점에 있다. 그만큼 최근 시편들의 다원화 현상은, 시인들이 타자와 소통하면서 사회적 울림으로 증폭되지 못하고 오히려 소통을 거부하는 유폐감과 난해성의 회로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미학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기 때문에, 다원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에서의 규준 상실에 가깝다. 우리 시대의 시를 가장 어둡게 만드는 것은 이 같은 타자와의 소통 상실 그리고 자기 이해와 표상 방법의 고립성에 있다. 이러한 양상은 최근 양적으로 폭증하면서도 규준은 한없이 이완되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징후들과 그대로 대응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시편들이 기획하고 실천하고 있는 ‘서정(성)’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시대의 시편들이 제기하는 서정의 원리 가운데 하나는 서정의 원리를 실현하는 주체와 관련된 것인데, 우리가 서정을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연관성 아래서 규정하는 데는 근대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서정이란 근대적 주체의 대상 인식 원리인 자기 반영성에 의해 발원되고 실현되는 어떤 원리이고, 근대적 주체의 자기 표현을 강조한 서구 근대 낭만주의에서 완성된 일종의 역사적 개념이다. 이는 주체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경험으로부터 그것의 통합적 국면을 꾀하고자 하는 성격이 서정에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그것을 인식․수용하는 주체를 이어주는 새로운 결속과 감각의 필요성이 대두한다. 이 감각은 바흐친(M. Bakhtin)이 대화주의를 명명하면서 타자의 의식을 객체가 아니라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가진 주체로 바라본 것과 상통하는 것인데, 세계와 주체가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뜻한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상실된 근원적 감각이나 정서를 회복하는 통로를 주체의 신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물(세계)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선과 방법에서 찾는 것이다. 따라서 현저하게 주체의 소거가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단일한 서정적 주체로의 전일적 귀속성은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시에서 주체의 욕망과 언어가 불화 관계로 공존하는 것 역시 서정의 원리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시는 주체의 다양하고 풍부한 육성으로 그 불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예술의 본래적인 힘인 불온성을 극대화하고 나아가 오도(誤導)된 근대에 창조적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론적 계기가 우리 시대의 서정의 또 다른 원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일성 논리가 균열을 보이며 생겨나고 있는 시의 반(反)서정 혹은 비동일성의 경향을 어떻게 서정의 범주 안에 포섭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최근 ‘미래파’라는 담론적 명명(命名) 속에서 해석되고 평가되는 일군의 시인들이 암시하듯, 강렬한 반(反)서정과 비동일성의 경향을 서정과 어떻게 연루시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들은 기억(과거)이나 인식(현재)에 중점을 두지 않고,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언어적 세계를 보여준다. 가령 황병승이 보여주는 비주류 하위 문화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감각의 환유적 나열 그리고 혼성적 문화 의식은 국민국가의 상상력 안에 갇혀 있던 지난 시대와 날카로운 단층(斷層)을 형성한다. 또한 김민정이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하위 문화적 상상력은 이미지의 연쇄적 나열과 충돌을 통해 메타 시학의 한 가능성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도 다수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반미학의 가능성으로서의 시적 움직임은 매우 광범위한 하나의 시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의 반(反)은유의 환유 원리에 의한 작법은 그동안 서정의 중심 원리로 기능했던 은유 중심의 작법에 대해 방법적 반성을 제기하면서, 자유로운 연상 형식을 통한 말의 난장(亂場)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동일성 논리에 균열을 내면서 구축되고 있는 이 같은 반(反)서정 혹은 비동일성의 경향이 우리 시대의 서정이 가장 원심적으로 확장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화해와 조화의 세계관보다는 길항과 갈등의 세계관이 녹아 있고, 대중문화적 감염이 일상화됨에 따라 시의 표면에 물질로 구체화되는 속도감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환유적 작법을 통해 전통적 서정 원리와 결별하면서, 새로운 서정의 원리를 메타적으로 확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같은 두 가지 경향, 곧 주체 소거의 경향과 비동일성과 환유의 경향이 우리 시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곧 집체적 성격의 ‘우리’에 대한 관심이 개체적 성격의 ‘나’로 옮겨가면서 현실에 대한 성찰과 제언이 급감하게 된 상황, ‘나’로의 시선 이동이 시인들의 개별 체험을 절대화하는 미적 편향을 불러온 상황, 규준 부재와 기율 이완을 다원성으로 착시하는 상황을 깊이 우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 자의식, 환유, 환상, 전복, 엽기, 난해성, 실험 의식 등으로 표상되는 젊은 시인들이 시세계에 의해 우리 시의 미래가 부분적으로 개척되리라고 믿지만, 이와 달리 ‘기억’과 ‘현실’의 접면(interface)을 형성하면서 그리고 특정 담론으로의 귀속이나 환원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서정의 원리를 구축해가고 있는 젊은 시인들을 통해 우리 시의 ‘또 다른 미래’를 시사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3. 기억과 사물의 접점에서 발견하는 인간 존재 형식
잘 알다시피, 시의 본래적 권역은 주체의 절실하고도 남다른 자기 확인의 욕망에 있다. 그것이 나르시시즘 차원의 자기 몰입이든, 고통스런 반성을 동반하는 자기 성찰이든, 시의 초점이 시적 주체의 자기 검색과 확인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날카로운 균열이나 갈등 양상을 포착하고 드러내는 이른바 비동일성의 미학까지 포괄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서정의 원리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서정의 근원적 자기 회귀성은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같은 자기 회귀성은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와 함께 그것을 자신의 삶의 국면과 등가적 원리로 결합하는 은유적 속성을 곧잘 구현한다. 물론 그것은 사물과 주체의 긴밀한 조응(照應)을 주체의 시선으로 수렴, 해석하는 측면에서는 가장 가까운 ‘시적인 것’의 원리이지만, 사물을 사물 자체의 본성으로 발견하고 묘사하고 재현하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취약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의 자기 회귀성이라는 것이 용인된다면, 주체의 시선으로 사물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그 응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성찰하는 은유적 원리는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힘으로 다시 사물에게 활력과 생명을 불어넣는 시적 상상의 과정 또한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이 같은 회귀와 성찰의 양면성은 우리에게 서정의 원리의 진면목과 이를 통해 확산해가야 할 서정의 몫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데, 여기서는 길상호, 이재훈, 신용목, 김병호 등 1970년대생 시인들의 시세계를 통해 이러한 점을 시사적으로 읽으려 한다.
먼저 길상호는 소멸해가는 시간 속에서 원초적인 인간 존재 형식을 바라보는 시인이다. 또한 그는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결국 그의 시선은 실재와 영혼이 궁극적으로 결속되는 풍경을 향한다.
그 집은 소리를 키우는 집,
늑골의 대문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마루에 할머니 혼자 나물을 다듬거나
바람과 함께 잠을 자는 집,
그 가벼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삐이걱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오는 집,
단단하게 박혀 있던 못 몇 개 빠져나가고
헐거워진 허공이 부딪히며 만드는 소리,
사람의 세월도 오래 되면 소리가 된다는 듯
할머니 무릎에서 어깨 가슴팍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들,
아팠던 곳이 삭고 삭아서 만들어낸
관악기의 구멍을 통해 이어지는 가락들,
나의 짧은 생으로는 꾸밀 수 없는
그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키워온 옹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바람 드나들며
나 또한 소리 될 것 같은데
더 기다려야 한다고 틈이 생긴 마음에
촘촘히 못질하고 있는 집
― 길상호 「소리의 집」 전문(<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문학세계사, 2004)
“소리를 키우는 집” 마당에서 시인은 “마루에 할머니 혼자 나물을 다듬거나/바람과 함께 잠을 자는” 풍경을 기억해낸다. 거기에는 기억 속에서 환기되는 몇 개의 소리가 웅크리고 있다. 할머니의 가벼운 몸이 움직일 때마다 나던 가느다란 소리, 단단히 박혀 있던 못이 빠져나가고 난 후 들리던 헐거워진 허공의 소리, 할머니 무릎에서 어깨 가슴팍에서 들려오던 바람의 소리, 이런 것들이 시인의 기억 속에서 낱낱이 혹은 한꺼번에 호명된다. 그런데 시인은 “나의 짧은 생으로는 꾸밀 수 없는/그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키워온 옹이/하나씩 빠져나가고 바람 드나들며/나 또한 소리 될 것” 같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길지 않은 생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소리의 깊이를 상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길상호는 신생과 소멸의 변증법을 통해 우리의 일상에 편재(遍在)해 있는 불모성과 소통 단절을 치유하고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다. 그것은 신생과 소멸을 존재 양식의 양면성으로 바라보면서, 그 복합성의 시선으로 삶을 관조하고 추동하는 에너지에서 생성되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소리들을 묘사함으로써, 생명 현상의 감각과 그 묘사를 제일의적 기율로 삼으면서도 그는 우리의 몸 안팎에서 잊혀진 실재와 영혼의 복합적 풍경을 두루 복원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재훈의 시는 도시에서의 생활과 자신의 내면을 유추적으로 결합하면서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하는 유목적 발화(發話)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 하지만 상상적인 유목적 감각에 의해 시편 곳곳에 배치된 사실적․환상적 이미지들은 시인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묵시(黙示)적 이미지들로 전이되면서, 그의 시편들을 평범한 환상 시편이나 교조적 종교 시편으로부터 구해내고 있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내가 밟는 유리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 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 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래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것.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난다면, 늦은 밤 가냘프게 흔들리는 마음까지 싹둑 잘라버린다면, 나는 백치가 되리. 내 몸이 된 유리. 너의 촉감밖에, 소리밖에 모르므로 나는 불구다.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 땡볕 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 절정이다,
― 이재훈 「순례」 전문(<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고 있는 시인은 그 유리가 발바닥을 찢는 소리를 동시에 듣는다. 그의 몸은 마치 고행을 거듭하는 “수행자”처럼 모든 땅을 다 밟아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땅이 너무 넓어 그가 겨우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곧 도시의 낯선 꿈들뿐이다. 여기서 ‘유리’는 근원적 고통과 날카로운 깨달음을 동시에 포괄하는 순례의 길을 상징한다. 시인이 밟고 가는 유리에는 온기가 간직되어 있는데, 시인은 그 뜨거운 감촉과 군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신비로움을 기억하면서 자신만의 상상적 축제를 연다. 도시의 방 안에서 벌어지는 그 축제에서 유리는 사각사각 몸 안에서 춤을 춘다. 그래서 생의 두려움도 분노도 잊은 채 시인은 “백치”가 되어 자신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을 절정의 도시의 유목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 시편은 이렇듯 먼 신화적 상상력과 가장 구체적인 사물들을 결합시킴으로써, 회귀와 성찰의 양면성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존재의 내밀한 곳에서 피어나는 영혼의 미동(微動)에 귀기울이면서 꿈과 현실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은, 그의 시가 “꿈의 사제가 들려준 묵시의 소리들, 로고스의 자기 발현 과정에 대한 응시와 관찰의 기록들”(유성호, 「해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임을 다시 한번 웅변해준다.
그런가 하면 신용목의 시편들에는 자기 자신의 젊은 날의 흔들림에 대한 뼈아픈 기억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섬세하게 되살려지는 ‘기억’과 따뜻하게 재현되는 ‘사물’이 쓸쓸하고도 아름답게 결합되어 각인되어 있다.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신용목 「갈대 등본」 전문(<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2004)
시인은 이 작품에서 바람의 지층을 몸 속의 뼈로 두고 살아가신 아버지를 선연한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이때 시인의 ‘기억’은 아버지의 삶 속에서, 마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유추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시는 세상에 충일한 ‘바람’ 모티프로 시작되어, 시인이 평생을 두고 그 바람 속을 다 걸어야 한다는 운명적 자의식으로 매듭지어진다. 특히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라고 했을 때, 그러한 고백은 이러한 운명적 자의식을 예감한 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년기의 상처의 내력과 그것을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비애로 넘어서려는 시인의 의지가 아프게 다가온다. 이처럼 신용목의 언어는 끝없는 ‘기억’으로의 회귀와 그것을 인간 존재 형식에 대한 ‘성찰’로 연결하려는 욕망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사례로 기록할 만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병호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망각의 의지와 기억의 불가항력 속에서 시를 길어올리고 있다. 오래 전에 지워버렸다고 믿었던 흔적이 되살아오는 순간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얼굴에서 떠오를 때의 역설(逆說)이 환하게 나타난 다음 시편을 주목해보자.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
밤마다 강 건너에서 손사래를 치던 그 몸짓이
날 물리치던 것이었는지, 부르던 것이었는지
어둔 꿈길을 막니처럼 아릿하게 거스르면
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은
그제야 깊고 낡은 날갯짓을 한다
불온한 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至極이
강물에 닿기 전,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
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
가지 끝에 문신처럼 옮아오는 앙상한 길
내 몸을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
모두가 한 물결로 펄럭인다
변방의 밤하늘은 마른 저수지마냥
외롭고 가벼웠다
어둠 저편에서 절벽처럼 빛나는 녹슨 닻
生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
나는, 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
차마 墓石처럼 깜깜하지 못했다
― 김병호 「강가의 墓石」 전문(<달 안을 걷다>, 천년의시작, 2006)
시인은 아이의 얼굴에서 오래 전에 지워버렸던(혹은 지워진)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것이 격세유전의 한 국면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시인은 아이의 얼굴에서 오래 전에 지워진 아버지의 기억을 보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버지와의 거리(距離)를 꿈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니처럼 아프게 꿈 속을 거스르는 순간 겨울 철새들이 깊고 낡은 날갯짓을 할 때쯤, 시인은 “불온한 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시간이 다시 흘러 여명의 지극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시인은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잎 진 나무”가 되어 강가로 몸을 잠그는 환각을 경험한다. 그때 “내 몸을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나’의 몸에 ‘아이’의 몸에 선명하게 깃들이고 계셨던 것이다. 그만큼 “生은 몇 번씩 몸을” 바꾸면서 때로는 ‘별’로 ‘꽃’으로 ‘닻’으로 ‘유곽’으로 ‘성당’으로, 말하자면 지상[俗]과 천상[聖]을 숨가쁘게 오가면서 굴러가는 것이었다. 그때 시인의 생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고, 그 “늙은 내 아이”는 바로 아버지의 “불온한 全生”을 휘감은 시인의 육신이 되기도 한다. 그 여명에 시인은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차마 墓石처럼 깜깜하지 못했다”라고 함으로써,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눈부시게 흔들려갈 자신의 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병호는 선명한 기억 속에서 인간 존재 형식의 어둑함을 증언하고 스스로는 묵시적으로 그것을 승인하고 견디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 우리가 살핀 길상호, 이재훈, 신용목, 김병호 등의 시편은 인위적 담론으로는 도저히 포섭할 수 없는 낱낱의 심미적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기억’ 속에서 인간 존재 형식의 보편성을 수습해낼 뿐만 아니라, 일정하게 서사적 계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서정’의 원리를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젊은 시인들의 노력은, 우리의 서정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동일성 논리를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우리 삶의 곳곳에 편재하고 있는 혹독한 운명과 맞서는 힘겨운 유한자(有限者)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불어 그 유한자의 눈이 얼마나 깊이 자신의 근원적 기억과 사물들을 동시에 꿰뚫을 수 있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의 시는 지난 시절의 역사 편향과 이념 과잉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면서도, 시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과 성찰 혹은 근원 지향과 현실 연관의 속성을 견고하게 결합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4. 새로운 시학을 위하여
시가 시간적으로 경험을 초월하면서 항구적 심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미의 형식적 요소가 구체적 경험으로부터 분리되어 성립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경험을 기초로 하면서 이를 초월하는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의 존재론적 비밀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주체와 객체, 영혼과 실재, 내용과 형식, 시인과 독자 사이에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일성 논리를 서정(성)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시는 더 이상 동일성의 논리를 고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된 동일성 논리를 넘어서면서 세계와의 불화와 긴장을 당당하게 형상화한다. 이는 서정을 ‘세계 파악의 색인’(김준오) 혹은 ‘주체의 세계 투사를 정식화한 개념’(권혁웅)으로 정의했던 관념을 넘어서면서,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주체의 다양한 정서 발현 과정으로 설명하게끔 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은 이 같은 서정의 확장에 기여하면서도, 시에서 주체를 힘겹게 복원하면서 지속적 자기 회귀의 열정과 타자의 음영(陰影)을 성찰하는 자기 동일성의 재구(再構)에 나서고 있다. 속도전의 무모함과 자기 소모적 열정으로부터 감각과 인지 능력을 동시에 복원하면서, 그들은 시간에 대한 시적 체험으로서의 기억과 인간 존재 형식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난 세기말의 커넌(A. Kernan)의 <문학의 죽음>에 이어 최근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속속 출간되면서 우리는 근대적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의 근본적 위기를 여러 모로 실감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위기 진단은 ‘(근대)소설’이라는 근대문학의 총아를 직접적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근대적 언어 예술 전체의 존재 방식에 대한 유효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듯 형이상학과 정전(正典)의 급속한 와해를 실현하면서 다가오는 온갖 종언주의(endism)에 편승하지 않고, 기억과 사물의 접점에서 새로운 대안적 사유를 수행해가는 젊은 시인들의 목소리는 그래서 우리의 새삼스런 주목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세대론이 부분적으로 허구임을 알게 되고, 나아가 서정의 옹호를 통한 새로운 시학을 암시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 <시작>, 200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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