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평론❙
신과 함께
송종원
낮은 목소리로
강물엔 사람들이 허우적대고 있다
스스로 얼음을 깨고 몸을 넣는다
숨이 끊어진 사람들이 둥둥 떠다닌다
노래도 없는 시간들이 사는 강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사람들
― 「스틱스, 서울」 부분
이재훈의 시에는 잊지 못하는 자의 비극적 투쟁이 기록되어 있다. 시의 목소리는 느리고 또 느리게 허공에 울려 퍼지는데, 이는 마치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형성되는 망각의 강의 유속에 저항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투쟁하는 자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보통 재빠르고 활기찬 상태를 기대하지만 이재훈의 시는 그 기대를 뭉갠다. 그는 되도록 느리고 처연하게 노래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상대하는 대상은 안달난 시간 속에 마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싸우는 대상은 ‘삶’이며, 그가 잊지 못하는 것은 ‘삶이 빚어내는 치욕’이다. 당연히 이 싸움은 단번에 승부가 결정되는 형태가 아니라 오래오래 지속되는 형국일 수밖에 없다. 이 지난한 싸움을 대하는 시인의 전략은 싸움의 구도 자체를 해체하는 듯한 느린 속도로 전투력을 상실한 자의 목소리를 전면화하는 방식이다. 시인은 처음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것일까.
느리고 나지막한 시의 목소리에는 사실 어딘가 체념과 후회의 분위기가 묻어 있기도 하다. 이재훈이 시에서 자주 활용하는 ‘~지’, ‘~네’라는 어미가 특히 그런 효과를 만든다. 이와 같은 어미의 조형에는 시인의 특별한 전략과 기호가 작용했을 테지만, 동시에 시인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개입했을 것이다. 시의 언어는 시인이 쓰지만 시인을 넘어선 힘의 작용이 시어를 형성하기도 한다. 즉, 시인은 시의 전부를 결정하지 못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은 결정할 수 없는 일을 결정해야 할 때와 마주하게 된다. 이를 테면 시의 언어에 작용하는 시대적 정황의 압력이 그러하리라. 이 압력과 관련해서 특히나 주목해야 지켜보아야 할 지점은 이재훈의 시가 이전에 비해 현실에 대한 발언의 선명도가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분열된 자아의 내적 혼돈의 목소리보다 외적 세계와의 교통이 원활해진 자아의 형상을 그려내는 시점에서 저 어조들의 조형이 활기를 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끝에 이른 거와 같은 묵시록적 상황을 유모와 격앙된 어조를 섞어 희극적으로 상대하는 시적 전략이 익숙한 요즘에 이재훈 시의 어조는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 시인은 그 어조를 빌어 자신의 발언을 확보한 비극성을 더 진지한 것으로 만드는 중이다. 투박하게나마 저 목소리가 발언하는 내용과 관련한 시대적 분위기를 이름 붙여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확언 불가능한 시대 또는 희망 불가능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한 시에서 작금의 시적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예언도 사라지고
초월도 사라지고
왜소한 지식을 입에 문 기사騎士들만 즐비한 곳
― 「녹색기사」 부분
말[言]을 적절히 운용하는 기사(아마도 시인일 것이다) 대신에 마치 말[馬]처럼 재갈이 물린 기사만 있다. 게다가 이 기사가 물고 있는 재갈은 왜소한 지식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언어는 지금, 시인이 시인을 부끄러워하는 중임을 증언한다. 확언이 불가능한 시대에 또는 희망이 불가능한 시대에 시인은 할 소임은 왜소한 지식의 대변이 아니라 불명료한 언어들 속에서 빛과 같은 명료한 초월성을 발견하는 일이고, 희망 불가능을 선포하는 말들 속에서 불가능을 능가하는 가능성을 예언하는 내기를 실험하는 일일 테니 말이다. 지식을 넘어서려는 내기와 그에 따른 발견이 전무한 시의 현실을 목격하며 시인은 시의 위상과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되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재훈은 특정 감정의 선언을 자신의 시의 자리로 몰아갔다.
부끄러움의 왕
바람이 불면 이별하겠다
바람이 온 몸을 휘젓고 나가야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황금의 입」 부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 적은 윤동주의 시는 역사적 정황 안에서 파악할 맥락을 지니지만 그것은 또한 예술 일반이 특정한 시대를 넘어 보편적 가치로 상정할만한 정서적 내용을 포함한다(참고로 종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를 구원의 매개로 여겼던 윤동주의 시적 태도는 이재훈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이재훈의 시를 근현대 한국문학사의 흐름에 위치시킬 경우 아마도 그것은 윤동주를 시작으로 한 시적 계열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부끄러운 자가 시를 쓴다. 달리 말해 시는 성찰한 사람의 목소리를 요구한다. 시와 성찰이라니, 웬 고리타분한 이야기인가라는 반응이 따를 만하다. 시라는 장르의 언어는 성찰의 여유를 통과하기 이전에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며, 성찰이 불가능한 고통의 현시라는 이야기가 종종 전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생각은 시가 언어의 작용의 일종이라는 점을 철저히 무시한 태도에 불과하다. 시는 투명한 신의 얼굴처럼 우리의 얼굴을 다시 매만지게 한다. 시의 언어가 아무리 남다른 속도감을 지닌다하더라도 그것이 언어의 일종인 이상 시는 쓰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뜻과 감정을 되비쳐보게 만든다. 물론 이 언어라는 거울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쓰는 자의 얼굴을 되비추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와 같은 상태가 쓰는 자를 더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 예민한 집중은 정신의 힘을 더 높이는 데 기여한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자각이 불투명한 언어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수치심이란 도덕적 과오가 야기하는 감정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지만 은폐할 수 없는 모든 것’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왜 특별히 나체에 구토 혹은 뱃속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 등이 부끄러운가? 그것은 수치가, 우리 자신이 오직 우리 자신으로서 혹은 우리의 몸으로서 환하게 비춰지는 그 생리적 현현의 순간에 발생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수치 속에서 나는 그저 나의 몸일 뿐이다. 나는 나의 정신이 아니며, 나의 염원이나 이상도 아니며 단지 위장과 성기와 머리칼을 갖고 있는 생리에 불과하다. 이 분석을 뒤집으면, 수치심은 오직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하는 인간, 스스로의 동물적 한계와 대면하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부끄러움을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이 비인간성과 대면하고 이 관계를 인간적으로 성찰하는 주체 즉 개인으로 성립하는 것이다.”(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66~67쪽)
인용에서 말하는 ‘수치심’의 상태는 이재훈의 시가 표현하는 ‘부끄러움’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재훈은 「거리의 왕 노릇」이라는 시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꾼다고 적은 바 있지만 그의 시가 실제로 내는 목소리는 저 꿈과는 조금 다르다. 독자들이 그의 시를 통해 전해 받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는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가득한 음색이다. 이재훈 시의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게 없”다고 고백을 하고, 사람들이 군집한 광장에서 “죄와 의義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리들”을 바라본다. 시선에도 음성에도 가득한 건 부끄러움이다. 도대체 이 많은 부끄러움은 어디로부터 왔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몸으로부터 왔다. 아니 그 몸을 드러내는 정직한 시선에서 왔다.
졸고 있는 오후. 몸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이리저리 펄럭이네. 나를 부르는 소리, 내게 명령하는 소리, 멀리서 풍겨오는 몸 썩는 소리. 푹 썩어 물컹한 몸으로 의자에 파묻히네. 저녁이 되면 식탁에 앉아 뱃속에 고기를 우겨넣지. 육즙을 맛본 혀가, 살 씹는 맛을 아는 혀가 쉬지 않고 날름거리네.
― 「치미는 몸」 부분
의미의 끈으로 잇거나 봉합하지 않을 경우 몸은 조각이 난 상태로 펄럭인다. 멀쩡한 한 덩어리의 몸이 조각나 있다니 무슨 말인가 되물을 수도 있지만, 몸이 일정하게 통일적 형태로 기능한다는 생각만큼 관념적인 것이 또 없다. 조각난 몸의 통합 내지 몸에 통일성을 부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적 담론에 조금 기대어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몸은 다양한 부분충동들이 어지럽게 난립하는 지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저 충동들의 방향은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일정한 도덕적 틀을 적용하여 인간의 행위를 정향시키는 일은 애초부터 일정한 폭력성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적이다 하여 거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인간의 충동에 내재한 공격성이 스스로를 혹은 타인을 파괴할 가능성이 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인 도덕적 틀은 문제적이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과 관련한 윤리를 정립하는 일은 자신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어쩌면 욕망의 허기란 무언가를 취하기를 바라는 허기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무언가를 취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법에 대한 허기일 수도 있다. 그것을 부끄러움을 거부하는 몸의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몸의 이중성은 이재훈 시의 아포리아이자 시적 기미의 발생지이다.
피부가 구멍을 닫으면 우리는 작은 관에 갇히지. 몸을 붙잡고 통곡하는 소리. 통곡하다 울다 지쳐가는 한숨 소리. 뜨거운 몸뚱이는 차가운 쇳덩이에 들어가지. 화염으로 가루가 되지. 가루가 되어 땅속에 파묻히거나 서랍에 들어가지. 가루가 될 몸들끼리, 서로 숭배하고, 경멸하고, 질투하는 가녀린 몸. 몸 때문에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몸.
― 「디스diss」 부분
죽음에 이른 몸을 화장火葬하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는 구절이다. 흥미롭게도 시인이 인간의 몸을 관棺으로도 파악하고 또 관管으로도 인식한다. 인간의 몸은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족쇄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외부와 공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 물질인 셈이다. 이와 같은 몸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 시인에게 몸을 거듭해서 사유할 대상으로 만든다. 부끄러움의 잠재적 거처로서의 몸을 절단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있는 대로의 모습에 대한 순수한 인정 속에 시적인 비약을 거쳐 몸이 새로운 가능성의 지대로 거듭나게 하려는 시인은 고민하고 관찰하고 기록한다. 몸은 형성이 완료된 물질이 아니라 늘 구성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관찰하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사이 몸에 잠재한 수많은 역사들이 자연스럽게 시 속에 스민다.
나는 거친 아버지의 세계만 알았지 어머니의 세계는 몰랐다네.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과 도덕에만 관심있었지.
하지만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이었네.
그럴 때쯤 마치 마술처럼, 성애의 욕망과
죽음과 예술의 열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네.
― 「나르치스」 부분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를 이분하는 방식과 원시의 감각이라는 관념 또한 상투적인 데가 없지 않지만, 시의 목소리가 우리의 몸과 언어 속에 뒤엉켜 있는, 성애의 욕망과 죽음 그리고 예술의 열정을 동시다발로 맞닥뜨리는 상황은 진실하다. 이 다양한 실재의 어떤 것에도 주도권을 내주지 않고 그것들의 난립과 갈등을 균형감 있게 제시하려는 이재훈의 노력에는 시를 향한 순례자를 순결함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몸의 혼란조차도 ‘몸의 무늬’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던가. 이재훈의 시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신들이 사는 세계
고난을 마주하는 사람이 없어
신에 대해 물을 데가 없어
저 허공에 통곡을 합니다.
이유도 모르고 운명도 모른 채
웃고 노래를 부릅니다.
선한 사람이 없어 울어 봅니다.
눈에 보이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신을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 「기복祈福」 부분
시가 신을 모신다는 말은 일견 시의 자리를 위축시키는 의미로 들린다. 시가 쓰이는 곳은 모든 신을 거부해야 하는 자리라고 여기는 태도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시구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는 일이 시의 지향이라고 우리는 믿어왔다. 하지만 믿음과 진실은 늘 일치하지 않는다. 신을 모시지 않는 시가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자주 무감하며 때때로 의식하지 못한 채 신적인 것에 기대어 시의 깊이와 활기를 더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신에 대한 시의 거부가 아니라 어떤 신을 시가 믿는지에 대한 명증한 확인일지도 모른다.
선량한 바람을 맞는다. 해가 지기 전의 결기처럼 무엇을 사로잡혔을까. 무엇에 놀랐을까.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났을까.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다.
― 「풀이 던진 질문」 부분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그러하고,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는 이미지 또한 우리를 붙들어 세운다. 저 이미지는 연약함과 처연함이 어떤 강인함 못지않게 읽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신비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한다. 해서 자기 방어적인 무장이 해제된 마음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저 영롱한 유약함을 들여다본다. 이 이미지를 보며 나는 장-뤽 낭시가 한 그림을 가지고 보편적 아름다움과 관련한 이미지에 대해 설명한 언급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보여지는 형태를 통해서 우리를 초월하는 그 이상으로 향하는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 이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잡지 속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잡지의 이미지들은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서 제작되었죠. 카를라 부르니를 보고, 다음 페이지에서는 나오미 캠벨을 보고, 페이지를 넘기고, 계속 반복하죠. 또한 아름다운 풍경사진들이나 헬리콥터로 내려다보이는 대지를 봅니다. 이 사진들도 매혹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러분은 다시 페이지를 넘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회화작품들이나, 예술작품을 목적으로 한 사린들을 보면서 페이지를 넘길 수는 없습니다. 반복해서 그 화폭에 집중해야 합니다.” (장-뤽 낭시, 이영선 역,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갈무리, 2012, 192쪽)
우리를 사로잡는 이미지를 반복해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쾌감을 넘어서는 불편함을 감수하게 된다. 저 이미지는 취향이나 기호로서 좋음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우리의 불안과 불완전함을 자극하며 어떤 너머로 우리의 몸을 정향시키도록 추동한다. 왜냐하면 ‘선善’적인 무엇인가가 그리고 ‘진(眞)’에 가까운 어떤 것이 저 선혈이 선명한 이미지 너머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탁월한 빛”이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우리에게 흘러들어 “선량한 바람”처럼 부드럽게 접촉하는 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탁월한 빛과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이재훈의 시가 모시는 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그 신은 우리를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지만, 또한 탁월하다와 가장 아름답다와 같은 인간의 말이 특별한 수사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전하지 않으며 스스로 흔들림 없이 유약함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동요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전지전능한 종류의 신이라기보다 순연한 모습으로 순정의 빛을 발산하는 사소한 존재에 가깝다. 이재훈에게 신은 저 푸르고 연약한 풀과 같은 존재이다. 이와 같은 발견은 그의 시에 새로운 활기를 더한다. 우선 그의 시는 신의 거처를 지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돌보게 하도록 유도한다. 신이 인간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보호하는 상황의 아이러니함. 이 역설로 인해 지상은 신들의 사는 세계가 되고 또한 이 역설을 통해 신은 인간과 같은 혼돈의 몸을 얻는다. 결국 시가 신을 모실 뿐 아니라 신이 모시는 것 또한 시가 되는 역설까지 나아가는 일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이재훈은 「저자의 말」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사제의 방엔 말이 죽는다. 말이 죽는 법을 연습한다. 침묵이란 말도 필요없이 생각이 달린다.”
시의 사제인 시인은 말[言]을 죽인다. 이는 말이 말을 타고 넘어가는 기예를 차단하기 훈련으로 보인다. 시인은 말이 말의 부름을 받을 뿐 아니라 말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무언가의 자리에 ‘시’를 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아니 이재훈은 그곳에 오직 시가 놓여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가 저만치 앞서 달려가 시를 기다리고 있다. 오직 시만이 시를 부를 수 있다. 시 아닌 것이 시를 부를 때 그것은 시가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 것일까. 이재훈의 시가 이 기다림의 훈련으로부터 더 많은 시와 기다림을 구원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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