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1. 겨울
이후, 꽃봉오리는 망울지지 않았다
나는 땅바닥을 기며
가만가만 숨 죽였다
딱딱한 땅에서 몇 오라기
풀을 지나칠 때
비로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짐작하지 마라
기어가다 만난 돌의 시간도
훔쳐보지 마라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에겐 연혁이 없다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권태로운 계절에
그렇게 한 백 년은 기다렸다
2. 오늘
이후, 아무 것도 태어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소멸하지 않았다
어떤 하늘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을 주었고 어떤 밤은 공중이 없는 하늘을 주었다 새벽녘 술이 깨어 일어나 보면 사방이 꽃천지고 앉은 자리마다 꽃자리일 때가 있다 그곳에서 연꽃 위를 기어가는 뱀을 지켜보다 혼절한 밤 다시 깨어 보면 뱀이 내 목을 휘감고 있다 휘영청 뜬 달에 내 몸을 비추어보며 깔깔 웃고 난 밤 아무 것도 태어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죽지 않았다
3. 유폐
이후, 누구에게 밟히거나
공중에 던져져도 괜찮았다
나는 자꾸 진화한다
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
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
썩은 내가 풀풀 날린다
죄 지은 손 하나 빌려
하늘에 돌을 힘껏 던진다
메아리 하나 아득하게 들리다가
하늘로부터 빙폭(氷瀑)이 서서히 내려와 깔린다
나는 배꼽을 움켜쥐고
아프고 흐트러진 머리를 움켜쥐고
차가운 흙 위에 앉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갇혀 있었다
4. 서울
이후, 한 어미의 뱃속을 만나기 전부터
기다렸다 내 머리에 깃털을 꼽고
부싯돌을 따각따각 친다
발가벗은 몸으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도솔천인가 연옥인가
이 도시는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한겨울에도 태풍이 오는 곳
일찍 배운 증오로
뼈와 살을 태우는 곳
나는 죽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차가운 흙 위에 앉아
새들의 노래를 부른다
_ <시평>, 2007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