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남자의 일생」
이재훈, 「남자의 일생」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찾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 시·낭송 _ 이재훈 –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등이 있다.
배달하며
한밤중이 되면 몸에서 수선화가 피어난다는 시인. 깊은 동굴로 들어가 서둘러 어둠을 껴입고 찰박찰박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분다는 시인.
애벌레-나비-남자들은 낮에는 실존적인 제약과 필연 속에 넥타이를 매고 아스팔트를 달려 “매일 출근하는 폐인”이다.
나비는 시인이요, 일용근로자, 백수, 독학자이다.
그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아스팔트 위에서 뱃가죽이 뜯어지는 무력한 생명의 순환과 만다라를 읽는다. 「남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에 그만 몇 편의 페미니즘 시가 움찔하다가 풀잎처럼 몸을 연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명왕성 되다』(민음사)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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