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추면 우리는 날겠지
― 김참 시인께

 

이재훈

 

 

참 형, 오랜만이네. 지난 8월 부산 광안리에서 허만하 선생님을 함께 뵌 후 아직 보지 못했네. 그날 바다 위를 흐르는 검은 구름은 정말 내 취향이었는데. 나는 비오기 전의 그런 하늘과 구름이 좋네. 날씨는 꾸물꾸물했지만, 함께한 사람들과 축축한 바다 내음으로 인해 가슴이 따스해지는 날이었네. 그날도 집에 간다는 형을 붙잡고 덕천동까지 갔더랬지. 그러고 보니 올해는 두 번 만났네. 올 2월에는 정재학, 오은 시인과 부산과 김해로 놀러갔었지. 그때 형의 보금자리가 있는 김해로 가서 뒷고기를 참 맛있게 먹었네. 뒷고기란 말은 정육업자들이 맛있고 희귀한 부위의 고기를 뒤로 숨겨놓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형이 말해줬지. 형의 작은 아파트에는 책들로 빼곡하고, 침실에는 LP를 틀 수 있는 전축이 있었네. 늦은 밤까지 LP를 맘껏 들을 수 있어 귀가 호강했지. 그때 들었던 산울림과 정난이, 김지연과 리바이벌크로스는 아직도 귀에 쟁쟁해. 또 다음날에는 계획에도 없었던 거제도로 달려가 해변가 돌멩이를 주웠지.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난蘭을 캐러 다니는 일도, 물고기를 키우는 일도 형에게 모두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네. 참!, 형에겐 음악이 있었지. 아트록의 마니아인 형의 음악취향에 한때 나도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기억나나?
지난호 정재학 시인의 편지를 받고 여러 상념들이 떠올랐네. 뭐랄까, 우정이란 게 어떤 걸까 하는 생각. 이런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네. 참형과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보는 사이지만, 늘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그걸 문학적 동지의식이라고 해둘까. 형의 시를 처음 읽은 건 내가 습작하던 시절이었지. 가장 처음 읽었던 것은 <문학사상>에 발표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기억은 확실치 않네. 가장 확실한 기억은 <문학지평>이라는 부산에서 발간하던 잡지였네. 정확히 <문학지평> 1997년 가을호(통권 10호). 발행인은 이상개 시인, 편집장은 김형술 시인. 당시에는 열렬한 문청이어서 한국에서 발간하던 모든 문예지들을 다 읽어치울 때였지. 대학시절, 우연히 교수님 방에 들렀다가 구해가지고 온 잡지에서 형의 시를 읽었지. 신작소시집이라는 지면에 「굴뚝」 외 7편의 시가 게재되어 있었네. 그 지면에는 「굴뚝」, 「간빙기의 추억」, 「그렇다」, 「사차원 지구」, 「독버섯 요리」, 「늑대 인간」 등 첫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이 발표되었지. 그중 나는 「독버섯 요리」라는 작품을 좋아했는데 시를 프린트해 문학동아리에 나눠주며 마구 떠들던 생각이 나네. “시끄러운 비둘기를 마구 두들겨 주었다 비둘기들이 축 늘어졌다 비둘기들을 마당에 집어던졌다 굶주린 개들이 달려들었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서 내려와 파란 버섯 두 개를 쇠솥에 집어넣으며 노란 버섯 한 조각을 씹어먹었다 머리 속에서 댕댕댕 종소리가 울려퍼졌다”(「독버섯 요리」 부분). 친구들은 쟤가 왜 저래? 하는 표정이었지. 그날 머리 속에서 댕댕댕 종소리가 울리도록 술을 먹었지. 벌써 한참이나 멀찍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젊은 시인을 보며 질투라도 났던 걸까. 그 뒤로 나는 형의 애독자였는데, 드디어 등단 이후 형을 만나게 되었지.
1999년 5월 <현대시>가 주최한 대구세미나. 둘째날 오후, 일행은 세미나를 마치고 대구 두류산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지. 형은 부산에서 김경수, 노혜경 시인 등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더랬지. 그때 현대시 편집위원이었던 김정란 선생님께서 내 손을 잡아끌고 김참 시인에게 데리고 갔지. 이재훈과 김참이 서로 또래이고 시적으로 통하는 점이 많을 테니 친하게 지내보라는 말씀. 그때는 데면데면하게 인사한 기억이 나네. 나는 쑥스러워 마음속의 반가움을 제대로 표현 못했었지.
곧이어 1999년 6월쯤에 형이 <현대시동인상>을 받았는데, 형은 시단의 가장 촉망받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지. 소위 모던한 풍을 가지고 있었던 시인들은 모두 김참이라는 젊은 시인의 시를 얘기했으니까. 첫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1999)를 출간하고 이어 <미로여행>(2002), <그림자들>(2006)까지 형은 누구보다 성실히 자기만의 세계를 확장하며 시를 써왔네. 특히 이미지를 통한 시공간의 이동과 역전하는 서사의 구축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적 방법론은 탁월했지.

네가 잠을 자기 위해 거울로 된 방바닥에 드러누우면 거울 안 깊고 깊은 곳에 있는 그들이 낮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일년이 지나자 달에서 날아온 비행접시들이 쉴새없이 지붕들 위를 날아다녔고 불길한 검은 새들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너는 거울 속에 있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바깥에서는 하얀 밤은 계속되었다. 하얀 밤 하얀 밤 하얀 밤들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는 거울 속에 있는 그들을 하나씩 잡아먹었다. 나는 이빨을 딱딱거렸다. 너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두려웠다. 마침내 너는 거울의 방에서 걸어나왔다. 그러나 나는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 흑백영화를 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건 길고도 지루한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볼 영화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 밤에 자막이 내려왔다. 사람들과 동물들, 나무들과 물고기들의 길고 긴 이름이 천천히 내려왔다.
― 「거울 속으로 들어가다」 부분

우리는 거울 속의 일들이 저 먼 꿈속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극적인 실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체득했을까. 형을 십년 넘게 보면서 점점 신뢰가 더 쌓여간다는 느낌이 들어. 그건 인간적이며 문학적인 게 모두 교차된 지점에서의 신뢰이겠지. 눈치보지 말고 혼자 가버리라는 말. 우리에겐 그런 것밖에 없잖아. 형은 현재에도 열심히 읽고 쓰고 듣고 생각하겠지. 2002년 <현대시동인상> 시상식 후 새벽 예닐곱 명이 여인숙에 모여 팬티바람으로 무슨 말들을 그리 많이 했을까. 다들 제각각 독고다이 스타일의 시인들이 2004년 청주에 모여 하룻밤을 지내면서 어떤 열정의 잔해들이 재처럼 마음에 남았을까. 그때도 지금 아니면 우리가 언제 또 모이겠어, 하는 말을 했었지. 조금은 게으르고, 무심하고, 데면데면한 우리지만 서로 지켜봐주며 함께 길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날이네.
날씨가 춥네. 참 형, 이 겨울이 가기 전 한번 모이자구.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모이겠어.

_ <현대시>, 2011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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