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을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 이재훈, <남자의 일생>, 시사사 2008.1.2월호
어려운 시들만 감상하지 말고 쉬운 시들도 감상해보자. 쉬운 시이면서도 좋은 시가 얼마나 많은가. 이재훈은 "남자의 일생"을 타자인 풀잎의 몸에서 떨어진 애벌레의 생으로 은유했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라는 진술처럼 인생은 '그늘'이라는 유토피아를 찾아 뱃가죽이 뜯어지고 온 몸이 딱딱해지는 고투이다. 고진감래 끝에 脫却을 이룬 나비가(정신 혹은 영혼)가 날아가니 어머니이자 타자인 "풀잎이 몸을 연다"로 마쳤는데 이야기구조가 좋다.
_ 김백겸, <정신과표현>, 2008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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