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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31 구원을 향한 로드 포엠_ 김명원

구원을 향한 로드 포엠


김명원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 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장 그르니에



꿈꾸는 자는 머물지 않는다. 꿈꾸는 자는 늘 떠난다. 지혜를 구하여 자신이 열망하였던 이상향에 진입하려는 의지로 시간을 추동시키는 자, 항시 꿈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추억과 사랑에 묶이지 않으려는 자, 이곳 너머의 세상에서 새로운 꿈을 꾸려 꿈꾸기 때문이다. 꿈꾸는 자, 그에게 있어 지나 간 과거는 휘발되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아득하며, 오로지 길 위에서의 여정만이 생생한 삶의 실체가 될 뿐이다. 그러기에 꿈꾸는 자에게는 길이 신앙적 도구가 된다. 길 위에서 사색하고, 길 위에서 잠이 들며, 길 위에서 시를 쓴다.

이재훈의 시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시적 자아인 ‘나’는 길을 헤맨다. 꿈꾸기 위해 오르는 ‘산책길’에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에서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헤매는 것이다. 그날은 생의 근본적 에너지 원천인 태양을 기리는 날,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사건을 매주 기념하는 날, ‘일요일’이고,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그는 산책길을 찾고자 하는 행위가 실존에 대한 자각의 장소라기보다는 ‘근원’을 바라는 ‘꿈꾸는 장소’였음을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꿈이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인 산책길과 언덕을 헤매다 놓침으로서 인식론적 전환을 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상징들이 개입하게 된다.

상징이란 하나의 단어나 사물이 지향하는 암시적이면서도 다의성을 띤, 두터운 입체감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신비하고 유기적인 존재로 부상한다.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시 전체를 아우르며 문맥 구석구석까지 고루 비춰주는 상징들을 통해 이재훈은 자신 내면에 집적된 고통과 방황의 세월과 꿈의 색채를 드러나게 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둠’과 ‘산책길’, 그리고 ‘빛’이라는 세 가지 상징어가 출연한다.

1. 어둠

길을 잃고 헤매는 화자에게 엄습하는 것은 ‘어둠’이다. 어둠은 빛이 소실된 상태를 일컫지만, 시에서는 어둠이 내장하고 있는 상징으로서의 존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과 “위대한 침묵”의 지반인 ‘근원’이다. 어둠은 빛의 바탕이며, 빛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등장할 ‘빛’과 현존의 짝을 이룰 것이지만, 어둠 자체에 깊이 드리워진 상징적 의미로서의 심연을 시인은 독자들에게 각인케 하는 것이다. 어둠의 세례를 숙연하게 받는 자, 어둠의 이치를 엄중히 깨달아 숙고한 자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통과하여 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리라.

입사 초입 단계인 어둠의 지점에서, 시적 자아는 어둠이라는 묵언의 진리를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고 자책하고 있다. 결국은 일상적 현실에 묶임으로 진정한 꿈꾸기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으로서의 임무를 그르치게 된 셈인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던 연유이다. 어둠에 오롯이 전념하지 못하고, 어둠이 전언하는 메시지를 인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부터 꿈꾸기 위한 ‘길’을 상실하는 데서 오는 슬픔과 회의가 시작된다.

2. 산책길(언덕)

우리는 무수한 ‘길’의 상징을 기억한다. 인생의 험한 세파를 함의해서 진한 감동을 주었던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길(La Strada)」, 시대적 인식이 처절했던 윤동주의 「길」,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시련을 겪었던 비아돌로로사,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의 길’ 등에서 나타난 길들은 자신이 운명처럼 구현하려는 세계로 향하는 노정이며 피할 수 없는 통로임이 드러난다. 모든 길에는 한숨과 비통과 피눈물이, 그리고 환희의 땀 내음이 얼룩져 있다.

이재훈은 길 위에서 방황한다. 언덕에 오르는 산책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둠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꿈꾸는 실현의 장소인 언덕에 끝내 이르지 못할 것임이 자명한데도,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한다. 또한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이라고 길을 놓친 경위를 길에게 전가한다. 이는 당도하지 못한 자의 궁색한 변명이자 모호한 회의인 셈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길이지만, 아무나 그 길 입구에 들어서서 가고자 열망하는 곳까지 성공하여 가는 것은 아니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만을, 길에 연하여 있는 길을 통하여 끝없는 열망의 정수리까지 걷고자 하는 사람만을 길은 받아들인다. 바로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는 신경림의 「길」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제 뜻대로 허락한 사람만을 받아들이는 길 끝, 언덕에는 빛이 있을 것이다. 이 빛은 근원을 비추는 빛이며, 본질을 천착하게 해주는 구원의 빛일 터이다.

3. 빛(불빛, 햇빛, 달빛)

이제 ‘빛’이다. 화자가 길 위에서 헤맨 이유는 빛을 꿈꾸기 위한 제대祭臺로서의 장소에 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고, 마니케이즘에서 주장하듯이 인간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지혜가 이를 해방시킨다는 것처럼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고, 그리하여 빛이 상징하고 있는 생명력을 분출하며 생명을 전도하는 빛의 사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던 자신의 한계와 비루에서 벗어나, 빛을 영접하여 빛으로 현현되는 순간을 꿈 꾼 이유가 된다. 생명을 생명답게 영위해 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이면서,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느끼며 일상에서 야기되는 사물이나 사건들에 환호하거나 분노하는 동적 에너지로 충일되기를 갈망하는 이중 감정을 내재하는 것이다.

빛을 둘러싸고 있는 둥근 상징성의 매체는 세 가지이다. 시의 초반에서 켜져 있었던 상점의 ‘불빛’,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장 그르니에가 쬔 ‘햇빛’, 그리고 언덕이 있는 월곡月谷에 비추고 있는 ‘달빛’이다. 상점의 불빛은 생활의 인접성에서 이루어지는 빛으로 ‘나’에게 ‘빛’을 인지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면, 여기서 유추해 내는 ‘햇빛’은 언덕과 연상되어 중첩되는 산타크루즈의 장 그르니에에게 향한 경외를 나타내며, ‘달빛’은 부활과 재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신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채록한다.

이재훈은 이 시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면 어둠의 세계에서 길을 몸소 자기화하여 고행을 실행하는 자, 빛에 들 수 있음을 우수 어린 어조로 눈부시게 노래하고 있다. 언제인가는 현실의 무게에서 헤매는 시적 자아가 진정으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꿈꾸던 바로 그것,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을 반드시 만나게 되길 바란다.

_ <현대시>, 2008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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