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피는 추억, 그 보폭을 따라서
이재무, 이재훈
늦잠 자던 가로등/투덜대며 눈을 뜨고/건넛집 옥상 위/개운하게 팔다리를 흔들며/옥수수 잎새/낮 동안 이고 있던 햇살을 턴다/놀이에 지친 아이들 잠들고/한강을 건너온 달빛/젖은 얼굴로/불 꺼진 창들만 골라/기웃거리다 안간힘으로 구름을 밀며/바람이 불고/일터에서 돌아오는 남도의 사투리들/거리를 가득 메운다/하나둘 창마다 불이 켜지고/소스라쳐 빨개진 얼굴로/달빛 뒷걸음친다/비로소 가는 비 맞은 풀잎처럼/생기가 돈다, 마포 산동네
― <마포 산동네> 전문
가로등이 늦잠을 자고 옥수수 잎새가 옥상 위에서 햇살을 턴다. 한강을 건너온 달빛은 창들을 기웃거리다 구름을 밀고 창에 불이 켜지자 뒷걸음친다. 이 시는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느낌을 준다. 정물적인 풍경이 아니라 살아 꿈틀거리는 풍경이다. 이 살아 꿈틀거리는 풍경 속에 사람이 있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풍경 속에 참여했을 때 마포의 산동네는 비로소 생기가 돈다. 마포 산동네를 생기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긍정적인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의인화시키는 방법론이다. 이것이 서로 엮어져 피로와 애환의 사연이 가득한 마포 산동네는 숨을 쉰다.
이렇듯 이재무 시인의 시에는 의인관적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직접적인 시적 대상이 되는 소재뿐만 아니라 관념까지도 의인화의 그물이 드리워진다. 세계와 한 몸이 되는 이 방법론은 시인이 천부적으로 가진 감수성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대담을 하면서 시인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의인법을 통해 들려준다. 나도 산골마을에서 지냈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시간의 너머로 함께 빠져든다.
시인을 만나는 날은 봄비가 내렸다. 가물었던 땅이 숨을 쉴 소중한 비였다. 비가 내리는 찻집의 창가에서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래의 대담은 이재무 시인의 초기시부터 지금까지의 시적 역정과 삶의 역정이 같은 보폭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소상하게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이재훈: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시창작 강의를 많이 하시던데 요즘은 어디에서 강의를 하십니까. 인터넷 온라인 상에서도 강의를 하시던데요. 소개 좀 해 주세요.
이재무:온라인 상으로 하는 강의는 디지털예술아카데미(Art & Study)라고 해서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단법인입니다. 신경림, 김지하 선생이 관여하고 있고 주요 강사로는 소설가이자 신화학자인 이윤기, 소설은 박범신, 최인석, 시는 임동확, 강형철 시인과 함께 맡고 있습니다. 온라인 강의는 굉장한 노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수강생들마다 하나씩 시평을 달아줘야 하니까요. 지금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상태입니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토론하고 의욕적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좋습니다. 오프라인에서도 가끔씩 만나고 그렇습니다. 지금 대학에서는 세 군데 정도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초기시의 경우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 기대어 있습니다. 고향인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난한 유년의 추억이 구체적인 체험과 함께 시로 형상화되어 있는데요. 시의 소재를 봐도 농촌에서 볼 수 있는 꽃이거나 작은 동물이거나 혹은 가족사거나 농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자연과 친화해 온 시인의 경험이 시적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그 구체적인 농촌 체험의 정서는 기쁨에 대한 애정보다는 슬픔과 회한의 정서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유년 시절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재무:지금까지의 제 시를 이야기한다면 통상적으로 3단계에 걸쳐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5권의 시집이 있는데요. 초기시 [섣달그믐]부터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까지가 고향 유년 체험과 가난의 울분과 설움을 시의 질료로 많이 삼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유년을 보냈던 곳이 산간마을이어서 자연적 소재가 많이 차용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에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은 언제나 굴절되게 마련인데 그 굴절이 바로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볼 때 자연은 제게 생의 아버지였던 것 같아요. 비유의 어머니였기도 했구요. 자연에게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제가 초등학교 때 일인데요. 그때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 근처 저수지였습니다. 저수지 갈 때 소쿠리를 가져가요. 소쿠리에다가 된장주머니를 넣고 갈참나무 가지를 소쿠리 위에 얼키설키 엮어 놓습니다. 그리고 새끼줄을 묶어서 저수지 가장자리에 담궈 놓지요. 미역을 감고 나서 배가 출출해지면 건져올립니다. 그러면 민물새우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습니다. 그것을 주전자에 담아 오지요. 오면서 남의 집 담장 애호박을 꼭지를 비틀어서 땁니다. 일종의 도둑질이죠.(웃음) 집에 들어서면 뜰방에서 어머니가 저녁준비를 하시다가 제 모습을 보고 욕을 하십니다. 남의 집 물건을 훔쳐오면 어떡하냐고요. 그런데 어머니 표정이 무척 밝습니다. 저녁 식사 때 제가 잡아온 민물새우가 특찬이 돼요. 마당 멍석에서 저녁을 먹는데 반찬이라고 해봐야 김치 일색이죠. 유일한 특찬이 된장넣어 끓인 민물새우입니다. 그곳에 가만히 보면 천상의 많은 존재들이 다녀갑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능선을 타고 기어가는 초승달이 물김치에다 팔을 뻗기도 하고 저녁 무렵 뽕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개구리 울음도 반찬 속에 뛰어들어요. 풀벌레 울음소리는 반쯤 허물어진 담장을 넘어뜨리며 달려와서 냉수 사발을 들이킵니다. 이런 반찬을 먹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의 반찬입니다. 이런 식사를 시로 쓴 일이 있습니다. <위대한 식사>라고. 도회지 생활이라는 게 가축생활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구성원들조차도 함께 식사하기가 힘들 만큼 다른 시간대를 살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린 시절의 저녁만찬이 그리운 추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민물새우도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다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바친 것 아닙니까. 그것을 보면 게이트 사건도 생각나구요. 생리면에서 다를 바 없지요.(웃음) 그런 게 자연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겁니다. 삶의 지혜와 원리를 가르치는 거죠.
이재훈:개인적으로는 시집 [몸에 피는 꽃]을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 시집도 앞의 시집과 마찬가지로 농촌이 배경이 되는 시들도 있지만 도시생활에서 느낀 정서가 주된 시들도 많습니다. 이 시집의 자서에서 “추상화된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은 아름답지만 그것에는 자기기만과 자기연민의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지난날 나의 시는 이러한 함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일면이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이 겨울, 내 몸의 묵은 가지에/새잎 돋는 아픔”(<삶>)과 비슷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시적 변환의 이유 같은 것.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왔을 때의 새로운 정서 혹은 괴로움 같은 것들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재무:[몸에 피는 꽃]은 서울상경 10년 이후에 씌어진 시들이거든요. 제 시의 체질은 시의 보폭과 삶의 보폭이 같이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가증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인들의 허위의식입니다. 시인들이 자기 삶에 비해서 과장되게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게 가장 교훈으로 다가오는 시인이 김수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수영은 그 어떤 시인보다도 자기의 허위의식과 치열하게 싸웠던 시인 중의 하나인데요. 자기의 치부도 과감하게 드러내는 결단과 용기가 있었지요. 요즘 많은 시인들이 생태시를 씁니다. 생태시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지나치게 과장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길 모티브가 많고 너도나도 득도한 도인들이 많다는 겁니다. 일종의 포즈죠. 그것이 허위의식이 아닐까요. 자기가 깨달은 것 이상으로 얘기를 하거든요. [몸에 피는 꽃]은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느낀 정서를 담아낸 시집입니다. 도시생활이 주는 염증, 우울, 불안, 소외감, 타자와의 소통 장애 등이 시의 모티브로 등장을 한 것이지요. 아까 이 시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 시에 의인관적 세계관이 많이 등장한다고 했죠. 의인관적 세계관이란 것이 근대 이전의 주술적 세계관입니다. 애니미즘 사상인데요. 그것이 근대적 합리주의와 계몽이성논리에 의해서 배제됐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애니미즘 사상이 시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죠. 바람직한 것이죠. 제가 서울에 살면서 초기에 보였던 시경향을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자신의 허위의식에 빠지지 말자. 내 삶의 토대는 도시공간이기에 여기서 겪는 이야기를 쓰고자 한 것이지요. 제가 [삶의 문학] 동인이었지 않습니까. 제 삶과 같이 시가 간 것이죠.
이재훈:생태주의가 아직까지 주류적 담론이고 평단에서도 많은 평가와 비판이 있었습니다. 생태학은 다 함께 공생하자는 보편성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질서로 세계를 지탱해 온 인류의 이기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질서를 지키는 쪽에 있는 것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깨부수는 쪽에 더 많이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몸짓을 통해 기존 질서를 올바른 방향으로 갱생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지요. 지금의 생태주의가 공동체적 대안을 말하고자 하는데요. 저는 시 속에서 대안을 말하는 방식이 한 개인의 실존을 통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재무: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근원적 생태주의를 부정합니다. 그것은 실현가능성이 없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당장에 자동차를 버릴 수 있습니까. 지금 현재 아파트를 버릴 수는 없죠. 현실가능성이 있는 생태주의를 지향하자는 것이죠. 이분법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된 세계관이 사실 인간의 제불평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녀의 불평등, 신분의 불평등, 지역의 갈등, 남북의 갈등 등이 결국 확대된 것이 인간과 자연의 불평등으로 간 것입니다. 인간의 제불평등을 도외시하고 그 초점을 자연에게만 맞춘다면 그건 하나의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죠. 그래서 머레이 북친의 사회주의 생태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 가능한 생태주의를 주장한 것이죠. 또한 지금의 생태주의가 자본가들이 상업논리로 차용하고 이용하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할 겁니다. 신문이나 TV광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죠. 녹색을 강조하면서 그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의 상품을 무의식적으로 광고하는 것인데요. 생태주의도 그 안에 있는 함정과 모순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재훈:서울에 올라온 후 실제적 삶의 상황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시와 삶의 보폭이 함께 가니까 독자들이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이재무:제가 처음에 서울에서 출판사에 취직을 한 것은 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강남에 있는 출판사 어문각이란 곳인데 거기서 오래 못 있고 나왔습니다. 또 사실 독자들이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제가 대학시절에 필화사건을 겪었습니다. 민중교육지 사건이라고. 대학 3학년때 학생 신분으로 글을 썼거든요. 그 당시 민중교육지에 글을 쓴 사람들은 대개 전교조로 갔죠. 그래서 당시 불운하게도 나는 블랙리스트에 올랐어요. 그래서 교사자격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되는 게 어려웠습니다. 교사되는 게 꿈이었는데 하는 수 없이 궤도수정을 한 것이죠. 다음에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간사 제의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요. 올라와서 마포 산동네에 살림을 꾸렸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살이가 시작된 거죠. 작가회의 그만두고 청사출판사 편집장으로 있다가 정민사에서 주간을 맡고 그러다가 결혼하고 첫애를 낳았습니다. 그때 다시 실업자 생활에 들어갔는데 단칸 지하셋방에 살 때거든요. 생활이 많이 어려워서 고통스러웠을 땐데 입시학원에서 제의가 왔지요. 꽤 큰 학원 종합반에서 일했는데 수입이 좀 되니까 그때부터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만 5년 넘게 학원강사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늘 괴로웠습니다. 마음은 시단에 가 있었거든요. 그때 사이드 인생이 시작된 거죠. 학원에 있으면 시인 취급을 당하고 시단에 나오면 학원강사 취급을 하니까 고통스럽더라구요. 또 청탁도 많이 끊어졌었고 시단으로부터 많이 잊혀졌지요. 그래도 제가 그나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학원강사 시절에도 시집을 꾸준히 발간했다는 점입니다. 그 시절에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까지 내고 나서 존재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러다가는 내가 물질적으로는 윤택한 생활을 할지 모르겠지만 시인으로서의 생은 접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강사생활을 그만두었는데요. 학원강사를 그만두는 것은 마치 마약을 끊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었으니까요. 그렇게 학원강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입학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다시 시단으로 돌아와 열심히 시를 쓰고 있는 건데요. 다시 처음의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이재훈:지난 연대 시에서 보이는 농촌이 변질되어가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보여졌다면 지금의 농촌은 문명시대의 대안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구체적 체험으로부터 촉발되어 모든 정서들이 용해되어 나온 시입니다. 그 체험에는 가난과 한 개인의 가족사와 농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한 개인이기도 하지만 지난 세대 우리들로 볼 수도 있거든요. 공감의 차원에서 말이죠. 신경림 선생의 시적 위상이 이런 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그러니까 한 개인, 혹은 자아의 경험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이나 사회의 모순까지 즉 보편적인 자리까지 확대되어지는 걸 말하지요. 선생님의 시는 이런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온당할 듯싶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런 지난 세대의 체험 가지고는 공감이 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은 살로 부대끼어 할 수 있는 체험보다는 보다 간접적인 체험일 것입니다. 그 체험은 더 관념적이 되겠죠. 이 시대에서 농촌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재무:제 시 중에 <가재잡기>란 시가 있습니다. 저는 늘 자연에 가더라도 생활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아들을 데리고 고향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리던 자연체험을 보여주기 위해서지요. 거기에 같은 또래의 외사촌들이 살아서 쉽게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그런데 그들도 컴퓨터에 중독이 되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반협박과 회유를 해서 놀러를 갔죠. 산골짜기에 가서 자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저보다 시력이 나쁘거든요. 안경도 쓰고요. 시력이 저보다 나쁜데도 가재를 저보다 잘 잡더란 말입니다. 제 눈에는 가재가 잘 안 띄는데 아들은 연방 가재잡았다고 탄성을 지릅니다. 혼자 생각을 해봤습니다. 가재잡기는 시력과 상관이 없는 것 같다구요. 아이가 저보다 생활의 때가 덜 묻은 겁니다. 가재는 일급수에 살지 않습니까. 아이는 때가 덜 묻어서 일급수에 가깝고 저는 4, 5급수에 해당되지 않을까요.(웃음) 그러니 가재가 눈에 안 띄는 거죠. 비록 우리가 농촌이나 자연을 떠나 살지만 과거 그 시절의 온정이나 넉넉함을 잃지 않고 도시문명 속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몸으로 살아내지 못할지라도 자연의 일부로 살았던 그때의 그 넉넉한 심성을 되살려 각박한 오늘의 현실을 살아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들을 데리고 자연학습을 실행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재훈:체험과 경험의 차원에서 현재는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시가 변모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즉 이전의 시에서 보이는 사물들이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관계되어졌다면 지금의 사물들은 깊은 관조를 통해 그 사물의 본질을 탐색하려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선생님의 시적 방향에 대해 짤막하게 말씀해 주시죠.
이재무:제가 [시간의 그물] 자서에 짤막하게 언급을 했습니다만, 80년대에 제가 적으로 규정했던 것들은 모두 외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자신을 돌아보니 제가 적으로 규정했던 모든 성격들이 제 내부에 다 들어와 있는 겁니다. 김수영 시인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적이라는 것은 잘 보이지도 않고 부드럽기조차도 하고 때론 친구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80년대 거대담론 속에서는 적이 외부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싸우기 더 편리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적에 대해서 강렬한 분노였으면 됐으니까요. 문제는 오늘의 적들의 성격이 이전의 적들에 비해 성격도 불분명하고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더더구나 적들의 전술방식이 교묘하고 다양화되고 중층화되어서인지 싸우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 내 안의 적들과 싸우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죠. 이 싸움이 더 치열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데요. 아직 말만큼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이미 자본화에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못 삽니다. 북한에는 노래방이 없거든요.(웃음) 그만큼 저는 자본에 중독돼 있습니다. 생활 근거지를 옮겨라 하면 자신없습니다. 도시생활을 떠날 자신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서울이 사실 즐거운 지옥 아닙니까. 우리가 지옥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서울에서 또 즐거운 것을 얼마나 많이 찾아요. 솔직히 그걸 인정하자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성찰이 시작돼야 하는데 서울이 지옥이고 농촌이나 자연이 선이다 라는 이분법도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미 자본의 중독자들이고 또 이 즐거운 지옥의 존재자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자기성찰이 있을 때 더디지만 그 싸움의 길이 보이는 것이지요.
제가 이번에 발표한 <도꼬마리>라는 시를 주요 전략으로 삼고 싶은데요. 시의 전략이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도꼬마리의 생태를 보면 제가 어렸을 때는 달라붙어서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도꼬마리는 자기를 다녀간 것들에 집착하고 붙어서 번식을 하죠. 어떻게 보면 유목민적 성격을 담고 있죠. 말하자면 도꼬마리를 다녀가는 새의 깃털, 짐승의 장딴지 그리고 고리똥바지 등속이 그들의 생의 운송 수단인 셈이죠. 그들은 그렇게 생을 이동하고 부려진 곳에서 다시 일가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의 삶의 방식을 거칠게 추상화시킨다면 집중과 해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 예술 현실은 해체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체만이 능사이고 대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체와 집중을 반복하는 도꼬마리에서 저는 삶의 지혜를 익히기도 합니다.
이재훈: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현대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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