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착란과 자유로운 공황의 미학
이수명, 이재훈
“모더니즘의 역사는 자살의 역사다”(이승훈)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문학적 담론이나 양식은 이전의 문학적 전통이나 질서를 파괴한 자리에서 세워진다. 아무리 완벽한 미학적 준거들도 시간이 지나면 훈육되고 재생된다. 하나의 작품이 사적(史的)으로 의미화되기 위해서는 그 당대의 시간과 그 시간을 잇는 결절 지점의 가치와 관계되어야 한다. 우리의 문학은 오래도록 전통적 질서의 억압 속에서 갑갑해 왔다. 새로운 문학은 늘 청춘의 치기였으며, 담론의 구호였다. 세대마다 타진되어 왔던 새로움의 길은 이전 아방가르드의 재확인이었고, 실험을 위한 실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수명 시인의 세계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알리는 하나의 길이었다. 이수명 시인은 한국 시단에 몇 안 되는 스타일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시적 세계와 방법론은 늘 문제적이었으며 가장 극단에 서 있는 전위였다. 그곳엔 환호도 많은 독자도 없었지만 시인은 늘 그 방향에서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다. 이제는 마니아라 불리는 독자들이 그녀의 시를 다양한 방법으로 감상하고 있다. 후배 시인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녀의 독특한 세계는 시를 읽는 후배들에게 충격적인 정서적 체험을 주었다. 소위 ‘모던한’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은 대개 이수명이라는 시적 텍스트를 한 번씩 심호흡하며 넘어 왔을 것이다.
이수명 시인의 남다른 시적 세계에 대한 깊은 탐색은 나의 몫이 아니고 명민한 평론가들의 몫이다. 다만, 이수명 시인의 근처를 맴돌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점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발탁된 것일 게다. 이수명 시인은 말한다. 자신의 시의 토대는 “일종의 공황 상태” 즉 지각, 감각, 기억, 연상 등을 잃고 사라져 버리는 일이라고. 정신이 무장 해제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인의 시의 토대라고 말한다.(<시학>, <시와사상>, 2002년 여름호) 그 시학의 원천을 함께 따라가 보는 것이 대담을 하며 내가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할 것이다.
이재훈 : <시학>, <시론> 등 당신의 시론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이 글이 발표되었을 때 여러 시 쓰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평론과 다르게 시인이 쓸 수 있는 이러한 메타적 시론에 조금 목말라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가웠고, 재미있었고, 좀 외람된 말이지만 당신의 시에 대한 신뢰가 산문으로 인해 더 공고해졌다고나 할까. 요즘 젊은 시인들은 산문 쓰기를 좀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시인이 산문 쓰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시인이 쓰는 산문이 매력적인 부분이 많으니까. 오히려 비평가의 막연한 추측을 불식시키고 제2의 비평적 텍스트가 되는 게 또한 산문이 아닌가. 김춘수, 허만하, 이승훈, 오규원 등의 시인들이 예가 될 수 있겠는데 산문이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당신의 시론은 자신의 시에 대한 분석적 시론이기보다 시 전반의 아포리즘에 가까운데 이상하게도 자꾸 당신의 시를 텍스트로 해서 읽게 된다. 당신이 발표한 산문이 시 장르 보편의 시론이 아니라 당신의 시에 대한 독자적 시론으로 읽어도 무방할까? 즉 당신의 시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로 읽어도 되는가?
이수명 : 시론이란 시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부랑자 같은 것이다. 주변에 있기에 보고 느낀 것에 대해 몇 마디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는다. 신뢰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시론은 기본적으로 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에 시에 대한 자신의 매혹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혹은 아주 자유로운 것이다. 부랑자는 때로 자신의 매혹에 어떤 형식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이 형식도 자유의 한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자유는 줄어들지 않는다. 매혹 자체를 즐기는 것, 이것이 시론의 특별한 입지가 되는 것이다.
시론이 시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시라는 것이 정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론은 시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에워싸는 것인 까닭이다. 시론이 어떠한 체계를 세워 시를 해명하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시를 벗어나게 된다. 시와 멀어진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론이라는 것은 시를 말한다기보다 시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많은 시인들이 시론을 썼지만 그 글들이 훌륭한 안내가 되어 준다 해도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시론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되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대로 시를 읽을 뿐이다. 그것은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론에 의지해 시를 쓰지 않는다. 시인이 쓴 시론은 그것이 훌륭한 것일수록, 시론으로부터 시를 해방시킬 것임이 분명하다. 시에 대한 생각과 단상들을 통해 시론은 시가 가진 이 본연의 힘을, 시의 벗어나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시론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고유한 일이다.
나는 시론을 몇 편 썼는데, 시론은 무력할수록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론은 비어 있는 그물이다. 비어 있는 그물로 물고기를 상상하는 것.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는 이미 물고기가 아니라 생선이다. 나는 시를 생선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재훈 :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시학>)는 말은 기존의 전통적인 시론에 대한 반대적 의미로 이해된다. 동일성, 유사성을 시의 질서로 삼는 시론과 달리 동일성과의 결별을 꾀하고 상징, 은유와 같은 시적 수사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것 같다. 이런 ‘차이’의 시학이 당신이 방법적으로 의도하는 부분인가.
이수명 :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라는 것은 현실의 상징 질서와 의미들로부터의 거리 두기를 말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과부하가 걸려 있다. 관련의 과부하 말이다. 시간, 공간, 사물들 모두가 체계와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시는 이 관련을 해지하는 것이다. 벤은 ‘관련의 돌파’라는 보다 역동적인 용어를 썼지만. 그는 현실의 붕괴라고도 했다.
관련의 과부하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든 일들이 돌발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다시 표현해 보자. 모든 운명의 돌발성이 전면화된다. 시는 의미 사슬의 상징체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사물이 갑자기 튀어나와야 한다. 아무 것도 뒤집어쓰지 않고 맨 얼굴로 말이다. 검은 비닐봉지, 벽돌, 사과 따위가 우리를 압도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사물이 튀어나와 있는 시를 쓰고자, 매일 “멀어지기를 계속”한다.
관련의 해지는 한편 사물들의 새로운 관련으로 응수된다. 사물들은 우리를 놀리는 듯이 이상한 관련을 맺는다. 기형적인 짝짓기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최초의 관련이라는 것은 이렇게 괴상한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시는 이 최초의 관련을 기록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재훈 : 당신은 <시는 쓰여질 수 없는 시의 징후이다>(<시와반시>, 2002년 봄호)라는 산문에서 “좋은 시는 세계관이나 창작의 원리, 시를 구성하는 형식을 날카롭게 자각하고 있기에 관심을 끌 만한 시론을 형성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론의 중요성에 대한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당신의 <시학>에서는 일종의 공황 상태, 정신이 무장 해제되는 것, 앞에서 흔들어 버리는 교란의 상태가 시의 토대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것은 착란, 카오스의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당신은 그러한 카오스의 세계를 정돈된 질서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신의 시적 방법과 일정 부분 관계가 있는데, 당신은 혼돈의 세계를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자아가 시에 가담하여 질서의 언어로 만드는 방법으로 읽혀진다. 즉 시의 세계는 착란과 공황이지만, 그 표출 방법은 이성적 자아에 기대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해가 가능한가?
이수명 : 한 편의 시가 교란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나. 시는 지배하려는 장르이다. 그것은 대화와 타협이 아니다. 설득도 아니다. 교란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란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우리의 정신이 의존하는 녹슨 무기들을 해제하고 우리를 그 지배 아래서 충일하고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교란의 형식은 어느 한 가지일 수 없다. 나는 언젠가 탁자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물 컵을 보고 “우리를 불안증 환자가 되게 하는데 세계가 동원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 어느 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지기 직전의 물 컵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동요된다. 이때 흔들리는 물 컵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정돈된 질서이며, 이성적 자아일까? 그렇다면 산산이 깨진 컵과 어지러운 바닥을 보여주는 것은 그 반대일까?
현대시는 혼돈 속에 있다.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질서라기보다 질서 자체의 표류에 불과하다. 얼음덩어리가 통째로 떠내려가면서 녹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잡아 보는 조각들은 벌써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갈 만큼 흔적도 없다. 우리는 어디로 밀려가는지 알지 못한 채 첨벙인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시쓰기라고 생각한다. 잠수복을 입고 있는 시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재훈 : 나는 시의 방법론을 취향의 문제로 생각할 때가 많다. 혼돈의 세계를 그대로 방치하여 드러내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주워 들고 새로운 정돈된 형태로 내놓는 경우도 있다. 당신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모두 초현실주의에 속하지만 인위적으로 형태를 늘리거나 비약시킨 달리보다는, 차갑고 구상적인 마그리트를 더 좋아한다는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취향이 당신의 시적 언어와 겹쳐진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의 성정과 취향이 언어와 영향 관계에 있다는 추측인데, 당신이 좋아하는 미적 취향은 어떤지 묻고 싶다. 예를 들면 음악, 그림, 영화 등에 관해서.
이수명 : 지면 관계상 미술만 짧게 예를 들겠다. 나는 존재가 완전히 무너지고 형체가 사라진 추상(뜨거운 추상, 차가운 추상 가릴 것 없이)보다 구상적인 존재의 실마리가 남아 있는 쪽에 더 끌리는 편이다. 예컨대 호안 미로가 입체파를 부정하면서 “내 그들의 기타를 부수리라” 하고 실재로 사물들을 완전히 해체시켜 음악에 가까운 경지로 나아갔지만, 나는 피카소는 말할 것도 없고, 브라크, 그리스, 들로네가 사물의 재구성에서 보인 존재에의 경의를 아끼는 편이다. 입체파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사물들을 보려 한 것이다.
이런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볼까?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극성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소위 절대 자유라 불리는 상황을 구가하며 우리를 인간 존재의 위대함에 동참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그 탁월한 예술가들 덕분에, 구체적으로는 미로로 인해 기쁨과 놀라움과 리듬을, 달리로 인해 막다른 동경을, 에른스트로 인해 우리 안의 신경증과 과잉을 알게 되었다. 이 대가들 외에도 이 세계에 속한 많은 예술가들이 우리의 상상력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대개가 자신의 신화를 창조하는 데 몰입해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키리코를 보자. 카라, 모란디와 더불어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는 구상과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존재들의 정지와 끝없는 변주는 가히 우주적이다. 소박한 정물화에서 이런 폭풍을 느낄 때 나는 존재란 그 자체로, 가장 ‘많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 존재에 기대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존재를 다 지워 버리기보다는 존재에 의해 내가 변용되는 것을 즐긴다고 하겠다.
이재훈 : 첫 시집의 몇 편을 제외한다면, 완벽하게 시에 일상인으로서의 자아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첫 시집에서도 구체적인 모습보다 개인적인 정서와 열망만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시를 쓰면서 일상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는 없었는가?
이수명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내 직접적인 삶의 이야기보다 다른 것이 재미있는 경우였다. 그리고 정보가 담긴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일상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별로 그런 의식이 없이 살아 간다.
이재훈 : 시집 전체를 두고 보면 시에서 정확하게 마침표나 쉼표 등을 찍고 있다. 당신은 산문시에서도 마침표를 정확히 찍고 있는데, 요즘은 안 찍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이것은 시가 몽환 속에서 자동 기술되거나 천성적인 힘에 의해 언어가 밀려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구두점의 사용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이수명 : 주로 마침표다.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마침표는 나에게 침묵을 의미한다. 물론 언어는 모두 침묵을 낳게 마련이지만, 그보다는 직접적인 침묵, 시간과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침묵을 좋아한다. 마침표는 또한 분리를 만들어 낸다. 미쇼는 언젠가 “자연에는 아직도 경건한 분리가 남아 있다”는 말을 했다. 분리란 기표들의 소통이다. 분리가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한데 뒤엉켜 몰려다니는 건 전체성이다. 이 속에서 추구되는 언어의 해방과 유토피아를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분리를 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미덕이다.
이재훈 : 나는 개인적으로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를 제일 좋아한다. 언어의 쓰임이 이후의 시집보다 좀 거친 대신 활달한 느낌이다. 시에 등장하는 사물들과 그 사물들의 사건을 통해서 전달받는 정서가 가장 오래 남는다. 두 번째에서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으로 갈수록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수명 : 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보는 것’이다. 사물들은 여러 곳에 있다. 현실이 괄호 친, 현실의 코드 속으로 합류하지 못한, 비가시적 세계 속의 사물들이 있을 수 있다. 시적 자아는 현실 속에서 그 괄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다른 대칭도 가능하다. 현실의 한 지점, 기표의 고정점에 있는 사물(말)을 보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자아는 투명하고, 괄호 속의 자아이다.
전자의 경우는 사물들이 현실로부터 일탈되어 있기에 시간과 공간의 논리적 맥락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사물들은 우리의 무의식의 편린들을 가지고 있기에 낯선 소음들을 들려준다. 후자의 경우 사물은 문득 안정된, 한 순간의 현실의 표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안정은 표류와 궤멸의 스타카토 같은 것이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왜가리>와 <붉은 담장>은 전자의 경우가 많이 수록되어 있고, <고양이>에 와서는 <포장품>과 같이 후자의 성향을 보이는 시들이 눈에 띄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재미있는 분류는 되지 못한다.
그들이 놓여 있는 곳이 어디가 되었든 사물들은 탈주 상태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언가를, 괄호를, 혹은 괄호를 흔들고 있는 자신을 흔들어 버리는 것으로 보인다. 탈주극이라는 점에서 보면 시집들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이재훈 : <붉은 담장의 커브>에서 <트럼펫>, <케익>, <살인자들>, <가든파티>,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민들레 총> 등의 시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상상 속에서 사물들이 서로 생장하며 사건을 만드는 것은 의식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대상과 대상이 결합하여 이미지를 얻고 사건을 만들고 있다. 시의 착상은 어떻게 하는지? 일상의 삶 속에서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을 수집하는지 아니면, 상상 속에서 그러한 시적 상황이 오도록 기다리는지?
이수명 : 네루다가 그랬던가? 어느 날 시가 왔다고. 누구든지 시가 와도 모를 수 있다. 무엇이 오고, 그것을 알고 맞이하는 일치의 순간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은 아무 것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아주 오래 지루한 시간을 지내는 사람들이다. 물론 뒤샹이나 워홀처럼 한순간 변기나 자전거 바퀴, 수프 깡통을 예술로 둔갑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어느 날 에른스트가 한 호텔의 마룻바닥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본 것이 프로타주가 되어 예술의 새로운 한 장을 열게 된 것을 그럴 듯하게 생각한다. 예술이란 이렇게 무위와 허위에서 오는 것이다. 무얼 알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은 뒤샹이나 워홀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해 본 것이다.
시나 시적 상황이 온다는 것은 어떤 이데아를 가정하는 것과 같다. 혹은 하나의 관습이다. 예술은 무언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헛된 동작을 하는 것. 예술이 원래 헛것 아닌가? 화가가 선을 하나 그어 보듯이, 그저 말을 하나 던지는 것, 이 말이 어떤 뒤범벅이 되고 낯선 운명을 겪게 되는 것, 이것을 지켜보는 것, 이것이 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렇게 난폭하고 무절제한 순간을 지니고 있으므로, 시의 정교한 이율배반은 설득력이 있다. 난데없는 우연의 고리들로 치밀하게 짜이는 것이 우리의 세계이다.
이재훈 : 당신의 산문을 보면 외국시에서 감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외국시의 어떤 측면에서 감흥을 받는지? 이것은 내 상상인데, 혹시 원서로 시를 읽는 건 아닌가? 언어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매력을 말해 달라. 또한 이것이 시의 현대성과도 관련이 있을까? 우리시와 외국시의 차이점에서 오는 생각이 시의 현대성과 맞물리지는 않을까 한다.
이수명 : 외국시 국내시 가리지 않고 읽는다. 하지만 다독형은 아니다. 좋은 시인이라고 한 번 생각하면, 시집을 가까이 두고 오래 오래 들여다보는 편이다. 20대 때 좋아했던 시인들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을 내 명상과 상상의 동반자로 여긴다. 동반자가 그렇게 많을 필요는 없다.
시의 현대성이란 사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현대적이지 않은 주제인 것 같다. 현대시는 이제 자신을 어떤 식으로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정의하기에는 너무 많이 차출되었다. 그 잠재성은 모두 노출되었고, 새로운 가능성은 고갈된 듯이 보이기만 한다. 도대체 시에서의 현대성이란 것이 이제 있을 법한 일일까.
이렇게 이야기를 둘러가 보자. 들뢰즈가 ‘기관 없는 신체’라는 말을 썼을 때 지젝의 응수는 ‘신체 없는 기관’이었다. 현대의 삶에는 ‘신체’도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체가 되기 이전의 알과 같은 생명 그 자체의 신체가 우리에게 가능하며, 눈, 귀, 혀와 같은 기관들이 기관으로 작동되는지?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의 기관이 벌이는 일들이 아니며, 기관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분열되고 낱낱이 해체되어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되어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벌써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귀 기울일 내면이 없다. 우리는 항상 어떤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의 또 다른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시는 부재의 기록이다. 다른 것의 다른 것의 또 다른 것을 쫓아다닐 뿐이다.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끝나지도 않는다. 부단히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알아볼 수 없다. 현대시는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이미지, 정서, 인식 모두 알아보기가 힘이 든다. 누구의 것인지, 어떻게 결성된 것인지, 어떤 배합인지 모르게 되어 있다. 어디서 온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주체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까. 현대시는 이 모든 가능과 불가능의 교차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누구도 이 교차로를 피할 수는 없다.
이재훈 :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앞으로의 이수명은 어떤 세계를 보여줄 것인가이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전개되었던 ‘이수명만의’ 시적 스타일을 더 심화시켜 드러낼 생각인가? 아니면 어떠한 방식이든지 변화를 꾀할 생각인지?
이수명 : 사람이란 별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라캉에 의하면 꿈이나 다른 곳에 나타나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이면에는 항상 하나의 무의식적인 기본적 환상이 있다. 다채로운 이미지들은 이것의 변용이다. 사람들은 같은 곳에 걸려 넘어지게 마련이다. 변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나도 내가 걸려 넘어지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반복과 재생산의 리듬이 찾고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무얼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이재훈 : 요즘 2000년대 전후로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얘기가 많다.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가지고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기억에 남는 시인이 있다면?
이수명 : 공석, 사석을 막론하고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은 것 같다. 이 질문도 유행하는 담론이 되었나 보다. 워홀이 한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다르게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젊고 새로운 시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란 젊고 새로워야 하겠지. 젊고 새로운 시를 쓰려 무던히 애쓰는 친구들에게 애정을 보낸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시가 그렇게 새롭고 앞질러야 하는 것일까를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를 말이다.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가 “선각자란 미래로 앞질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찾아드는 것”이라 한 말을 생각해 보고 싶다. 미래를 향해 쳐들어가는 것은 미래를 상정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사뭇 다른, 제3의 지대가 존재하리라 여기는 것이다. 새로운 어떤 지대를 향해 포문을 여는, 저 앞을 향해 무기를 쳐드는, 이러한 시들이 미래로 침입하는 시들이다.
하지만 앞질러 가야 할 미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라는 말을 많이 쓰기는 하지만,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심연뿐이다. 무기는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조준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조준되지 않는 조준을 시행해야 한다. 심연에 들어야 한다. 시인에게는 쏠 화살이 여러 개 있지 않다. 단 하나의 화살로 지나가야 한다. 세계를 잉태해야 한다. 이것이 미래가 찾아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미래는, 현재다. 발아래 있는 것이다.
이재훈 : 당신의 시가 난해하다고 생각하는가? 독자들, 평론가들이 말하는 난해한 평가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당신 시를 더 잘 읽을 수 있는 노하우를 살짝 귀띔해 달라.
이수명 : 김구용은 “우리가 처한 현실보다 난해한 것은 없다”는 말을 했다. 난해성 운운만큼 상투적인 태도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시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난해하다는 판단은 이미지를 해석하려 드는 태도에서 나온다. 이미지란 확고한 것이면서 이상하게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출몰하는 이미지들을 재빨리 그리는가, 상세히 그리는가, 섞어서 그리는가, 혹은 순서 없이 그리는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을 난해성으로 묶는 것은 투박한 태도이다.
나는 내 시를 읽는 특별한 독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욕망대로 읽을 따름이다. 물론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시인과 작품, 텍스트와 독자, 시인과 독자는 욕망으로 서로 비껴갈 뿐이다. 비껴가는 만남인 셈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작품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누구보다 모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내 시의 변방에 있으며, 그것이 내가 시를 쓸 수 있는 이유이다.
이재훈 : 김구용의 작품으로 박사논문을 집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시사의 난해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렵지는 않은지?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알고 싶다.
이수명 : 김구용은 우리의 시문학사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자원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의 40여 페이지에 이르는 중편 산문시 <소인(消印)>과 <꿈의 이상(理想)>은 현대문학의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내장한 채 햇빛 한 번 보지 않은 상태이다. 나는 이 작품들에서 한국 문학의 절정을 보고 있다. 우리는 또 하나의 고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마무리 단계에 있는데 김구용 시인이 많은 사람들에게 연구되고 상상력을 행복하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앞으로의 활동도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시 쓰고, 시 읽고, 틈내서 산문도, 논문도 쓰고, 가르치고, 그런 것이겠지. 비누방울들을 계속 만들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