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철
사람은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게 마련이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상처의 크기와 깊이에 따라 상처를 다스려 병을 낫게 하는 일에 쏟아야 하는 힘의 양이 정해진다. 하지만 사람마다 상처를 다스려 병을 낫게 하는 방식은 다르다. 이런 점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는 상처를 거듭 늘리고 상처 속으로 뛰어들어서 상처를 넘어서 스스로가 힘차고 튼튼해지는 데 힘을 쏟는다.
…(중략)…
2. 상처를 뛰어 넘어 스스로를 치세우는 방식
이재훈 시인의 시는 중세의 기사 이야기를 닮아 있다. 믿음을 고갱이로 하여 온갖 어려움을 스스로 찾아가고 헤쳐 나가는 힘이 있다. 바깥의 자극에 찔린 상처를 바로 되받아치지 않고 안으로 끌어들여, 그 상처를 거듭 늘려 키운다. 그의 몸은 늘 슬프고 번거로운 일로 만신창이가 된다. 그러므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츠슬러 이겨내는 힘을 키우기 위해 다시 몸과 싸운다.
늘 공허하다
낯선 여관을 즐기던 시간도
빈 방에 누워 수음하던 시간도
기억만 자꾸 엉켜 잠 못 드는 밤들,
혀가 뽑히는 꿈을 자주 꾼다
한밤에 일어나 허겁지겁 찬밥을 먹는다
- <어떤 날> 부분
어떤 일에 온 힘을 다 써버리고 나서 밀려오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때 텅 빈 가슴은 쓰라리다. 꽉 차인 일에서 벗어나던 즐거움이나 숨 막히는 긴장이 풀리는 몸의 황홀조차 어떤 뜻도 맛도 없어진다. 이런 때는 온갖 기억을 떠 올려 뜻과 맛을 만들려고 하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만들 수 없다. 오히려 몸이 갈라지는 두려움만 가득 밀려온다. 이재훈 시인은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늘려 키운다. 그는 아르토의 잔혹극처럼 누르고 가로막는 것들을 떼어내어 뿔리 깊은 힘이 솟구치도록 하기 위해 애쓴다.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는다. 칼을 꺼내 손목을 그었다. 나는 칼을 의지하며 살았어요.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았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가슴을 그으며 지나갔다.
- <귀신과 도둑> 부분
어미의 젖 빠는 법을 배우지 말았어야 했다. 영원히 잠들어야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만 사랑해야 했다. 그 이후로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 <귀신과 도둑> 부분
여기에는 몸을 찢어 가르고, 끙끙거리거나 울부짖는 소리만 가득하다. 이러한 꾸밈은 사람이란 이름에 갇힌 몸과 마음을 토막내고,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뿌리 깊은 힘의 움직임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이처럼 몸이란 이름 아래 꼼짝 못하고 갇힌 힘, 이것을 시인은 귀신이라 부르고 있다. 아니 시인은 귀신이 되어 바동거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의 온갖 삶의 방식을 편안하게 즐길 수가 없다. 이재훈 시인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역겨운 냄새’를 맡고 토악질을 하며, ‘쓰레기 냄새’를 맡으며, ‘시체 썩는 냄새’를 맡는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사람으로서 ‘어미 젖을 빠는 법’을 배운 것이나 ‘흔적’이 남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거추장스럽다. 뿐만 아니라 지금 삶의 방식이 빚어낸 이름붙이기에 함께 뒤섞일 수가 없다. 시인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늘 세계를 굳고 단단하게 가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름을 따라 겹겹이 쌓인 울타리를 하나 하나를 뚫고 나아가는 것을 운명으로 여긴다.
<고행>에서 시인이 사람들이 믿음으로 떠받치는 ‘사원’을 찾아 나서고, 사원에서 몇 개의 문을 지나가는 일도 이런 운명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을 지나는 것은 책장을 넘기듯 이름 없는, 바꾸어 말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영원한 것을 찾으려는 몸짓이다. 그러나 목수의 문설주 짜는 일이나 이라가 날뛰는 일이나, 선남선녀의 결혼식은 모두 신림동 전철역 네거리의 서툰 화장을 하는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다 울타리를 만드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겹겹의 울타리를 지나고 ‘작은 샘’을 만난다. 샘물은 무언가 새로운 힘을 다시 얻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고행의 길 가운데 잠깐 땀을 닦는 일일 것이다. 이런 그의 몸짓이 어떤 모습인지 시인은 알고 있다.
꼬부라진 나의 변명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지팡이로 이곳저곳을 쳐댔다. 살기 위해 기적을 꿈꾸었다. 물결 위에 놓으면 뱀으로 변할 막대기. 하늘로 던지면 검은 매가 될 막대기. 더듬거리며 어둠 속을 걸었다. 환란 일을 기다리며, 깜깜한 타인의 얼굴을 매만지며, 검은 꽃의 향기를 들이켰다. 요긴한 건 한 줄기 빛인데, 내겐 지팡이뿐. 이제 서른다섯 살이 넘었다. 중년처럼 배가 불룩 나왔다. 어느새 또 다른 지팡이를 끼고 있다. 배만 꽉 찬 몸으로 더듬거려보지만, 날 권면하는 건, 어떤 증오. 신호등 앞에서 한 남자를 보았다. 모두들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데, 그 남자만 빈들에 솟대처럼 서 있다.
- <지팡이> 부분
이재훈 시인은 자신의 몸짓을 성경 속에 나오는 순례자에 견주고 있다. 하나님을 찾아서 떠도는 순례자의 지팡이를 지녔다고 여긴다. “물결 위에 놓으면 뱀으로 변할 막대기”, “하늘로 던지면 검은 매가 될 막대기”를 꿈꾼다.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일이다. 그것은 ‘환란’이 일어나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환란이 일어나지 않는 캄캄한 시대에 스스로에게 순례를 권하고 격려하는 힘은 ‘증오’다. 여기서 증오를 일으키는 본디는 알 수 없지만 상처가 깊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너무 깊고 큰 상처를 벗어나기 위해 시인이 스스로 상처를 키우고 자신을 해체하여 자신에게 새겨진 상처를 지우려해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킬리만자로>는 이재훈 시인이 상처를 지우고 새로 세우고 싶은 ‘나’의 본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큰 호수를 만났을 때는
열망하던 일들이 모두 잠잠했다
위대한 숲의 시를 쓰고 싶었다
숲 속에 한 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밤마다 호랑이의 배고픈 소리를 들으며
늘 지저귀고, 사분거리고, 비벼대는 숲을
노래하고 싶었다
그 싱그러움의 머리맡에서
토닥토닥 바람을 잠재우고
풀잎의 향기에 취해 혼절하고 싶었다
- <킬리만자로> 부분
위 구절로 보면 이재훈 시인은 ‘열망’의 몸부림에서 빚어진 상처들을 잠재우고 만물이 자연 그대로 서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태초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것은 누구나 꿈꾸지만 누구도 이룰 수 없어, 인류의 영원한 꿈일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을 찾아나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는 새삼 본디의 꿈을 되살리는 주술이라 할만하다.
- <시와사상> 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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