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7.30 ‘서태지 세대’의 궁지와 난문(難問)_ 김창환


서태지 세대


이재훈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
첫 사랑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본드를 마시고, 부탄가스를 불었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불렀지만
우리에게 밤문화를 가르쳐준 선생님과
몇 푼의 참고서 값으로 위안을 삼는다.
대학도 회사도 모두 판매왕을 모집하여
고시원과 학원을 전전하였던 아름다운 시절.
희망도 아니고, 욕망도, 진리도 아닌
어수룩한 정당성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나는 불편하다는 것.
정의와 진실이 정치적이라는 걸
한순간 깨달았을 때.
잔혹한 눈망울을 낼 수 없는 나는
숭고한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를 매일 버린다.
머릿속 꿈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한 것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십일 세기 문명에 무릎을 꿇는다.
내 손으로 만든 옷과 신발과 종이가
하나도 없는 무능한 세대.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울분으로 노래를 부르고
세상에 욕을 하고
그것으로 명예를 얻고 정치를 하고 돈을 벌고
후배들에게 내 아픔의 젊은 날을 얘기할 텐데.
체게바라의 페데로사를 끌고
동해와 남해를 거쳐 서해의 어귀에서
술을 마시고 낯선 여자를 만나고
모래밭에서 잠드는 낭만놀이를 했을 텐데.
손잡고 싶은 사람 하나 없어
집으로 향하지만
오늘도 우편함엔 밀린 고지서와
광고 전단지만 가득하다.

* 서태지, <교실이데아>



|작품평|


‘서태지 세대’의 궁지와 난문(難問)



김창환
(문학평론가)



지금 쓰고 있는 이것이 <서태지 세대>라는 텍스트에 대한 글이 아니라 허물없는 말이라면, 이것이 지면이 아니라 시인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공간이라면, 혹은 내가 텍스트를 평가하기 위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알량한 자의식을 버릴 수 있다면, 나는 이 시에 대해 따져 물을 것도 풀어 설명할 것도 없다. 한 행, 한 행에 담겨 있는, 심지어 그 행간에 숨어 있는 감정의 값조차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바로 내가 ‘서태지 세대’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시 속 발화자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어렵고, 그 발화자와 독자(나)를 구분하는 것도 불편하다. 이 친화력을 떨어내기 위해 애쓰며 「서태지 세대」를 말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는 순간, 문득, 이 곤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바로 이 시의 고갱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 시는 한국 사회의 한 세대가 직면한 내적, 외적 궁지와 그것이 야기하는 우울과 무력감을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혹여 독자가 그 세대에 속한다면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로 시작되는 이 시의 전반부는 한 세대의 궤적을 숨 가쁘게 추적한다. 특히 첫 대목에 놓여 있는 ‘골목’은 유년기의 체험부터 성인이 된 이후의 세계인식을 아우르는 긴요한 상징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황금기인 유년기, 자족적 소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그 시절의 ‘골목’은 새로운 공간 체험을 가능케 하는 돌쩌귀이다. 공간들은 구불구불하게 꺾여 있는 골목길을 따라 접혀 있고, 꺾인 골목을 돌아 내달릴 때 경험하는 새로운 공간은 세계체험의 가장 초보적인 형태이다. 그런데, 이 시는 접힌 공간이 펼쳐지며 나타나는 공간이 더 이상 새롭지도 아름답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저 획일적이고 비루한 공간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돌고 도는’이라는 이 말에 담긴 시적 주체의 진저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의 단순한 탈향의식부터 예민한 정신이 결코 깨끗이 포기할 수 없는 유토피아 동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익숙한 공간의 피륙을 찢고 새로운 곳으로, 혹은 최소한 이곳과는 다른 곳으로 뛰쳐나가려는 충동을 내장하고 있다. 이러한 강렬한 충동을 인정한다면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라고 말하는 자의 끝 모를 좌절, 즉 이 세계에 이곳과 다른 곳이 없다는 사실, 새로움이 없다는 사실이 안기는 좌절을 간취해낼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사춘기의 발달과업을 자아와 세계의 탐색이라고 말한다. 진짜배기 탐색을 시작한 진지한 개인들은 내 삶을 지탱할, 혹은 내가 살아갈 세상을 지시할 말들을 고르고 그것들의 경중을 따져 우선순위를 매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작업의 심층에는, 언어가 실재를 지시하고 있으며(아니면 최소한 언어가 실재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으며), 인간 체험은 언어를 통해 의미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관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만약 ‘말’로 나와 세계의 관계를 직조해내지 못한다면 진지한 개인들은 무의미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적 주체가 ‘서태지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의 한 극단으로 포착해낸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이라고 말할 때 이 짧은 2행은 서태지 세대가 가지고 있는 ‘말’에 대한 불신을 잘 보여준다. ‘말’에 대한 불신은 곧 자기 이해와 세계인식의 불투명성과 연관되며 그것은 이 시의 흐름을 좇아가면 ‘정의’와 ‘진실’의 불가능성과 연관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사실, ‘서태지 세대’가 어떤 ‘가르침’에 존경심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이 대학문턱을 밟고 다닐 무렵 대학의 강단은 ‘해머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전통적 사유, 사유의 축조술은 맛보고 판별하기도 전에 부정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졌으며 오랫동안 근대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많은 것들이 이미 부서져 있었다. 모든 말들은 그 지시대상이 모호하거나 지시대상과 교묘히 어긋나 있었고, 말은(조금 더 확대해서 언어는) 더 이상 세계를 여는 열쇠라고 추앙받지 않았다. 그런데 ‘서태지 세대’가 지니는 ‘말’에 대한 불신은 해체를 지향하는 교육의 효과가 야기한 지적 승복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의 날카로움이다.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부른 세대는 전통적 가치체계나 이데올로기와 그것들을 가장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있는 ‘말’에 대한 부정을 감각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말’은 세계 내적 존재인 나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지 못한다. ‘정의와 진실’은 그 절대성을 잃고 그저 ‘정치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전락했다. 이제 내가 좇아야 할 숭고한 대상들은 다 소멸하고 ‘신자유주의’라는 전지구적 시스템만이 내 삶의 내밀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나를 지배한다. 적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 본질인 정치의 생리를 체득하지 못한 ‘나’는, 이 바깥 없는 체제를 살아가면서 감히 바깥 혹은 높음을, 다시 말해 ‘숭고의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와 심각한 불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제 ‘나’는 이 시대의 힘을 받아들여 순응하거나 스스로 유폐하는 것 중 하나를 강요당한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택한다. ‘정의’와 ‘진실’을, 그리고 ‘머릿속 꿈들’과 ‘선한 것’을 부여잡고 있는 시적 주체에게 이 시대는 복마전을 방불케 한다. ‘조금 일찍’ 태어난 세대에 대한 감정의 본질은 자기 삶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부여할 수 있었던 세대에 대한 부러움이다. 그러나 그 의미부여가 얼마나 허구적(낭만적)이고 자기기만적인지 시적 주체는 잘 알고 있다. 기실 부러워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시적 주체의 모습을 바라보는 독자의 입맛은 씁쓸하다. 주체와 세계에 관한 ‘중요한 말’을 갖지 못한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이 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의 권위가 사라지면 ‘진실’은 존립할 재간이 없다. ‘진실’이 없는 곳에서는 보편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의 삶을 긍정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가 처한 내적 궁지이다. 그리고, 잠깐 쓰이다 버림받을 노동만을 요구하는 세계 질서의 강고함이 그 세대가 처한 외적 궁지이다. 이 불멸의 궁지 속에서 숭고를 꿈꾸는 자는 필멸 혹은 필패이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을 낳는다. 자, 이 난경難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난문難問이 시인을 기다리고 있다.

_ <현대시>, 2009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