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시인
<68> 이재훈 시인 ‘벌레 신화’
꽃 속에 산다.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는다.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올 때 지옥을 보려고 온 사람들 예쁘다고 기념할 때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랄 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진다. - '벌레' 전문 오래 전,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흉측한 벌레로 변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 그가 벌레로 변한 이후, 가족과 직장 등 지금까지의 일상적인 관계가 완전히 변한다는, 사람에서 비천한 벌레로 변하자 기존의 관계조차 비천해졌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한 이재훈 시인(1972년~ )의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에 수록된 여러 시편들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벌레가 된 시인이 “바닥 여기저기 팔랑거리는”(‘벌레 신화’) 처지에 놓인 것은 도시의 삶과 무관치 않다. “아무도 도시에서 살라 이르지 않았”(‘향연饗宴’)지만 시인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도시에서 살고 있다. 정글 같은 대도시에서 먹고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양복도 구두도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도시는 저 멀리 있”(‘미적인 궁핍’)지만 시인은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차, 집, 양복 그리고 구두가 없다는 것은 실직했음을 뜻한다. 도시에서 월급생활자는 실직하는 순간 벌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환멸을 견뎌야 한다. 벗어나려 날개를 파닥거릴수록 삶은 점점 더 구차해진다.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산다고 하여 행복한 것도 아니다. 표제시 ‘벌레’에서 보듯, 꽃 속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어가지만 거기가 천국은 아니다. 장소에 상관없이 벌레의 삶은 벌레의 삶일 뿐이다. ‘세이렌의 노래’와 같은 꽃의 아름다움에 나를 망각하고 있다가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오지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지고 만다.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라”는 장면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언제나 고개만 숙였습니다. 변명은 늘 부끄러우니까요. 아프면 그냥 아파야 합니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야 한다죠. 게으름을 좋아하는 저는, 참는 것이 제일 쉬운 저는,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꽃이라는 말,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 ‘악행극’ 부분 “채찍이 내 피부에 감겨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가 박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벌레 신화’)질 만큼 고통스러워도 시인은 도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참고 견딘다. 변명도 하지 않는다. “아프면 그냥 아파”하며 견딘다. “참는 것이 제일” 쉽다는,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구절에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인의 섬약한 마음이 느껴져 시위가 붉어진다. 시인은 꽃과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 즉 도시의 삶 이전이나 궁핍하지 않았던 시절이 그립다. 어른은 큰소리 내지 않는단다. 마음에 상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겠지. 담배 연기만 뿜어 대며, 다 안다는 듯 끄덕끄덕 대기만 하겠지. 날 어른이라 부르는 손가락들. 그 모든 비겁도 눈 감고 어떠한 격정에도 미혹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 이미 네 앞의 시간들은 결정된 것.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에게 다리를 까딱거리고 딴지를 걸고 싶더라도 어른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한다. 아직도 쓸쓸함을 사랑할 수 없나. 차가운 거리를 헤매다 방안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때. 내 몸에 남아 있는 허약한 온기.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엎드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지만 엎드리는 일은 자신을 잊는 일.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 - ‘불혹’ 전문 시인은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이하 ‘불혹’)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하는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려놓았다. 아직 어른이 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지만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은 “마음에 상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라고 훈수를 둔다. 세상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마음 약한 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벌레처럼 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는” 일이다. “자신을 잊”고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일이다. 그 고통이 생생히 느껴져 더 고통스럽긴 하지만 시인은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 벌레 신화=이재훈 지음 민음사 펴냄. 116쪽/ 9000원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6년 9월 30일 (15:0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출처 : http://news.mt.co.kr/mtview.php?no=2016092811524779885&outlink=1&ref=http%3A%2F%2Fsear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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