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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재킷을 입은 시인>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를 쓴다.
예술가들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머리에 뿔을 단다. 광대의 옷을 입는다.
거친 발걸음으로 거리에 나가 거죽을 벗긴
날짐승을 전시한다.
대중은 환호하고, 예술은 진지하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고독한 오만으로 공허한 시를 쓴다.
재주 좋은 시인은
높은 나무에 올라 나뭇잎의 형상을 그린다.
시든 나뭇가지의 슬픔을 노래한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사로잡힌 유니콘의 뿔에 대해.
사랑하는 말발굽 소리에 대해.
문명인의 실험에 훼손당한 별의 슬픔에 대해.
스삭스삭 재킷의 말로 쓴다.
실상 외투는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
올올이 풀려나온다.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
잠자는 숲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재킷을 태우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태어날 텐데.
재킷의 재가 나무에 뿌려져
울창한 숲이 되면,
앙상한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길 텐데.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너무 추워 재킷을 꼭 껴입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재킷, 재킷 말을 건다.
* 아베 고보의 소설 <시인의 생애>에서.
◆ 시낭송_ 이재훈 -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현대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가 있음.
◆ 출전_ <명왕성 되다>(민음사)
◆ 음악_ 임승태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아베 고보의 짤막한 단편소설 「시인의 생애」에서 모티브를 얻은 시이지만, 이 시를 즐기기 위해 그 단편소설을 꼭 읽어야할 필요는 없다는 것 알고 계시죠? 스스로 물레에 감긴 실이 되고 마침내 재킷이 된 노파의 이야기가 나오는 아베 고보의 「시인의 생애」는 퍽 의미심장한 소설인데, 저는 아베 고보가 이 시를 보면 아주 즐거워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과는 전혀 다른 경로의 즐거움을 주는 시입니다. 풍자와 알레고리가 예리하게 살아있는, 어딘지 허를 꿰뚫는 느낌의 시. 이만하면 소설과 시의 상호작용이 퍽 아름다운 진경을 펼쳐보이는 셈.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읽고 임철우 소설가가「사평역」을 쓴 것처럼, 시와 소설이 서로에게 미칠 수 있는 좋은 관계들이 많이 만들어질수록 독자는 즐거워지지요. 이제 저는 흥미로운 마음으로 재킷에 몰두해봅니다. 시인이 공허한 시를 쓰는 이유는 재킷을 입었기 때문인데, 재킷은 어머니이고, 어머니를 입어버렸으니 시인이 쓰는 시에는 어머니가 없고, 그러니 공허하고, 공허한데 아닌 척 허세를 부리고, 그러느라 점점 세상은 춥고, 재킷 없이는 추위를 견딜 수 없고, 그럴수록 시는 더 공허해지고, 나는 재킷을 더 꼭 껴입고…… 생명력 있고 진실 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재킷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려야 하는데 재킷 없이 시인은 이 거리의 추위를 견딜 수 없으니, 이 모순을 어떻게 견딜까. 눈치 채셨겠지만 이것은 비단 시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당신은 어떤 재킷을 입고 있나요? 당신의 재킷은 안녕한가요? 당신의 어머니는 무탈하신가요. 문학집배원 김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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