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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18 풍경과 실존과 시인_ 허만하 시인과의 대담 2


허만하 이재훈





허만하 시인이 1999년 30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들고 문단에 다시 얼굴을 비췄을 때 한국 시단은 모두 놀랐다. ‘어설픈 사고와 감상과 대중적 푸닥거리와 쉬운 위안이 유행하는 시대에 있어서 이만큼 깊이 생각하고 끈질기게 생각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김우창), ‘지난 천년의 막바지에 마치 스톤헤지의 유적처럼 발굴되었다’(정과리)는 평을 받았다. 한때 “시의 순결이 사라지고 있는 이 무잡한 시대에 시집 없는 시인으로 남는 것이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시인 허만하. 시인은 이제 한국 시단에서 가장 활발히 시와 비평을 생산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허만하 시인과는 몇 번의 소중한 인연이 있다. 부산에서의 만남과 이산문학상 수상시 대표시 낭송을 했던 일이다. 그중 2001년 부산에 서규정 시인을 인터뷰하러 내려갔을 때의 뵈었던 일은 더욱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부산에 살고 있던 손택수 시인과 함께 찾아 뵈었다. 늘 뵈었던 광한리 파크호텔.(그 이후로도 김참, 김언 등의 시인과 몇 번 더 찾아뵈었는데 늘 파크호텔에서 뵈었다. 김참 시인은 허만하 선생의 호를 파크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우스개소리도 했었다.) 시인과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쉽다며 내일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다음날 파크호텔로 다시 찾아뵈었을 때, 시인은 택시를 한 대 대절하여 타라고 손짓을 했다. 택시를 타고 우리는 푸르디 푸른 쪽빛 바다를 보기 위해 기장군 철마라는 동네로 찾아 들어갔다. 그때 먹었던 국수와 온통 바다만 보였던 카페, 그리고 큰 품으로 끝없이 시에 대한 애정을 보내주시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이재훈:선생님과 정담을 나누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건강은 어떠신지요?

 

허만하:책을 읽고 글쓰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재훈:2001년 부산에서 선생님을 뵈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참 감사한 일이고 오래도록 제 기억에 깊이 남습니다. 그때 부산 근처 철마란 곳에서 바다가 바라보이는 카페에 갔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직접 구경시켜주셨지요. 그곳의 풍광을 보며 감탄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런 풍경들과 조우하면서 시가 탄생되는구나 생각했고요. 요즘도 여행을 많이 다니시나요?

 

허만하:나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떠오릅니다. 기장의 갈치고개는 부산시내이면서도 아주 조그마하고 소박한 자연이 남아 있는 곳이지요. 나는 그때 이재훈 시인이 내 「지명에 대하여」라는 시에 강원도의 골짝 서화 마을 이름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 물으면서 아버지 직장관계로 어린 시절을 서화에서 보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공연히 반가웠었지요. 나들이는 여전히 제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그제는 거창을 거쳐 무주를 다녀왔습니다, 계절에 따라 밟는 길을 달리하지요.

 

이재훈:이미 선생님의 작품 세계와 산문을 통한 사유들이 많이 소개된 터라 제가 어떤 질문을 드려야 될지 스스로 부족한 게 많이 느껴집니다. 이런 점에서 빌 모이어스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을 인터뷰한 <신화의 힘>이란 책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자괴감 같은 것들이 일었습니다. 치열한 사유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직무유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생각하겠습니다. 따뜻한 애정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허만하:나도 그 대담을 읽고 캠벨의 생애가 지적인 여행의 연속이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그가 광범위한 문화철학적 언저리를 거느린 뛰어난 신화학자이면서도 대단히 유능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담 들머리에서 켐벨과 모이어스 사이에 나누어진 수준 높은 대담 이야기를 들으니 공연히 긴장이 됩니다.

 

이재훈:‘만남’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에 중요한 만남 몇 가지가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릴케’와의 만남, ‘실존주의’와의 만남, 그리고 ‘풍경’과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그 밖에 여러 철학자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먼저 ‘릴케’와의 만남이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여 김춘수 선생께서도 릴케와의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본 유학시절 고서점에서 릴케를 만났었지요. 선생님께서 만난 릴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덧붙여 ‘천사’가 아닌 ‘죽음’의 관점으로 파악되는 릴케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만하:의예과 시절 독일어 교수이면서 의예과 부장이었던 김달호 교수님의 가르침으로 릴케를 처음 알았습니다. 그 무렵, 내가 접했던 둘레의 시들이 사물의 본질에 파고들지 못하고 흔히 서정의 표면을 스치는 감상에 머물고 있는데 절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릴케의 시가 계시처럼 제 발로 다가 왔던 것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릴케의 시집은 가다야마 도시히고(일)의 <신역 릴케시집>(1942)이라는 일역 시집이었습니다. 그 날자는 Aug.26/52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이 책의 안표지에 적혀 있는 내 서명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의예과 1학년을 마친 여름방학 때입니다. 열심히 철학서적을 탐독하던 무렵이지요. 그 무렵 우리나라에 온전한 릴케 번역 시집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릴케는 끊임없이 죽음과 대결하면서 자기 정신의 발전을 이룩하고 마지막으로 죽음과의 실존적 만남을 가졌던 시인이라 생각합니다. 릴케는 하이데거에 앞서서 죽음을 내면화하고 인간화하였지요. 젊은 시절의 그의 희곡 「백의의 공작부인」에 나오는 “죽음과 탄생은 날마다 우리 안에 있다”는 데서 시작해서 「말테의 수기」의 무의미한 죽음을 거쳐 「두이노의 비가」에 이르는 긴 과정은 고유한 죽음에 이르는 험난한 도정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제1비가에서부터 죽음의 문제를 둘러싸는 시적 사유를 펼치고 있지요. 제1비가에서 릴케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은 “산 자들이 항시 범하는 잘못”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두이노의 비가>는 장대한 죽음의 현상학이라 이름 지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주제로 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총체적으로는 전반부에서는 인간존재의 무상성이 다루어져 있고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죽음과 생이 하나가 되는 열린 세계 안에서 인간존재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물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재훈:당시 대구에서 발간된 <시와비평>의 편집동인으로 참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문학예술>로 데뷔하기 전이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시와비평>을 상당히 중요한 동인지로 말씀하신 것을 다른 글을 통해 읽었습니다. 동인지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정체성이 있을 겁니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활동하시는 <현대시> 동인이 60년대 문학사에서 가지는 정체성처럼 말입니다. <시와비평>이 3집까지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더라도 한번 참고해봐야 할 텍스트가 아닌가 합니다. 가령, <후반기> 동인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한 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문학사 속에 중요한 동인지로 존재해 있으니까요. 문학사에서 <시와비평> 동인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허만하:<시와비평>은 3집으로 끝났습니다. 이 3집에 나는 스펜더의 「비행장 부근의 풍경」과 맥타가트 교수(미 공보원장직에서 영남대학교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쓴 시론 한편(오든과 스펜더를 비교한 정치한 평론으로 나의 청탁으로 <시와비평>을 위하여 집필해 주었다)을 번역 게재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나는 이 잡지의 의미를 단독으로 다루기보다 그 무렵 한국시단이 맞이해야 했던 변신의 증후의 하나로 보는 거시적인 시점에 서고 싶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영도의 글쓰기>에서 제호로 딴 것으로 짐작되는 동인지 <영도>가 광주에서 김정옥, 강태열, 주명영. 박봉우, 박성룡, 정현웅 이일을 주축으로 1955년에 발간되었고(창간동인의 이름은 정확하지 않음), 대구에서 김윤환, 이영일, 허만하에 의해서 <시와비평>이(1956/2), 부산에서 김춘수와 고석규가 중심이 된 <시연구>(1956/5)가 거의 같은 해 또는 한해 터울로 발간된 연대기적 사실과, 발행 주체가 외국 문학의 새로운 물결에 관심을 가졌던 젊은 세대에 의한 것이었던 사실, 그리고 서울에서 떨어진 주변부에서 발행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는 일입니다. 한국시의 방향을 외국문학과의 어울림 속에서 찾아보려는 비평적 시각이 지역을 뛰어넘어 번지던 지열 같은 열기를 우리는 느꼈던 것입니다.

 

이재훈:<시와비평>을 통해 오든 그룹의 영시와 영미 평론을 번역, 소개하고 시작품도 발표하셨습니다. 또한 김종길 선생의 <20세기영시선> 같은 책들을 탐독했지요. 오든, 스티븐 스펜더 등은 과격한 발언으로 사회성이나 혁명성이 강하고 실험적 기법이 두드러진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관의 측면에서는 엘리엇과 사뭇 다른 세계인데요. 김수영도 초기에 이런 영미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영향이 실험시와 참여시를 쓰게 된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당시 탐독하셨던 오든 그룹의 영미 시와 담론들이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허만하:동굴에서 벗어나 동굴 바깥의 눈부신 신록의 세계가 현전하는 것을 느꼈고 그 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해주었습니다. 첫 시집 <해조>에 수록되어 있는 일부 작품에서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길 시인의 「낙렵론」은 스펜더 투를 빼닮았다는 견해를 엽서에 써 보내주셨고, 김춘수 시인은 또 다른 의견을 그의 시론에서 언급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항간의 사정을 최근 <문예중앙>(2004년 겨울호)에서 피로한바 있습니다,

 

이재훈:1957년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문학예술>을 통해 추천완료하시고 1969년 첫 시집 <해조>를 발간하기까지 12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데뷔 후 첫 시집내기까지의 상황들이 궁금합니다.

 

허만하:이 세 분의 완전합의제가 <문학예술>의 실질적인 추천방식이었지만 나는 그들을 대표하는 이한직 시인의 추천으로 시단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데뷔 후 외롭게 지냈습니다. 드물게 청탁이 있으면(<사상계>의 청탁이 인상적이었지요) 이에 응하며, 종합병원 병리과장, 대학 강사로 강단에 서기도하며 멀리서 시를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마침 이 무렵의 내 동태를 비치는 객관적 데이터가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한 분이 기별해주었습니다. 그것은 1964년 1월 2일자 동아일보 문화면에 실려있는 박남수 시인의 「전진 없는 후퇴」라는 제목의 2회에 걸친 ‘시단시평’이었습니다. 그 글은 그의 사후에 간행된 그의 전집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은 글이라 했습니다. 꼭 한 줄의 언급이지만 중앙문단에 비친 그 무렵의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 면구스러움을 무릅쓰고 그 한 줄을 이 <시와세계> 지면을 빌려 소개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가끔 재치 있는 작품을 발표하여 심심찮은 화제를 던지기도 하는 박성룡과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역동감이 있는 작품을 발표하는 허만하들이 없는 것도 어니다.”라는 반줄입니다.
등단 십 년이 지난 시인으로 시집이 없는 시인의 시집을 내는 기획에 들어갔으니 원고를 보내달라는 기별을 해주었던 사람이 전봉건 시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등단한지 오래된 김종길, 김구용 같은 선배시인도 그때까지 시집 내기를 자제하여 이 프로젝트에 따라 첫 시집을 내었던 것으로 압니다. 방순한 술은 긴 발효기간을 가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부름에 선선히 응했습니다. 그 무렵은 요즘 같이 시집 발행이 풍성한 문화풍토가 아니었습니다.

 

이재훈:청마 유치환과의 만남 또한 선생님께 중요한 의미를 가지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2001년에 청마에 관한 시와 사상과 선생님의 사유를 담은 <청마풍경>이란 책도 내셨고요. <청마풍경>에 보면 청마 선생 스스로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천문학자가 되었을 것이란 일화도 있는데요. 청마가 가지고 있었던 우주, 무한에 대한 웅장한 세계관과 선생님의 세계관과의 일정 부분 공통된 시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청마와 선생님의 세계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허만하:릴케가 말했던 내면세계 공간을 우주의 넓이 이상으로 확대하는 인식과 한자를 매개로 한 표현이 많은 점이 닮아 있겠고, 청마가 가지는 ‘위대한 소박’에 비해서 나는 더 당대의 외국 문학 사조에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또 나는 일상성에서 평면적으로 시적 모티브로 잡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재훈: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출간하셨을 때 문단과 언론에서는 큰 주목을 하였습니다. “20세기말 문단의 일대 사건”, “허만하는 마치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됐다. 망각의 석관을 열고 저벅저벅 걸어 나와 부동의 자세로 우뚝 섰다”와 같은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선생님의 느낌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미 선생님의 작품을 알고 있었던 시인들은 이제야, 라는 말들을 많이 했었는데요. 저는 30년 만에 낸 시집, 같은 문구들은 좀 거슬리기도 했습니다. 밝은 눈을 가지지 못한 우리 문단에 대해 부끄러움도 느꼈고요.

 

허만하:어리둥절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한편 둘레의 지나친 격려가 행여 나의 오만에 이어지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타이르며 더 열심히 고유한 자기 언어를 다져야 한다고 조용히 결심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런 한편 그때의 소용돌이를 통하여 나에게 내재하는 시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긍정적인 국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명이었던 내 시집을 낼 의향이 있다는 솔 출판사의 평론가 임우기씨의 전화를 통한 중후한 목소리가 아직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가 나를 다시 시의 광장으로 불러내었던 것입니다.

 

이재훈:2004년 선생님께서 수상하신 청마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김춘수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허만하 시인은 관념시를 쓰는데, 당대의 문학 100년사에 이런 경향의 시인으로 가장 앞에 기록될 시인이다. 신라의 향가 이후로 잡더라도 허 시인의 시는 보기 드문 시이다. (…) 허만하 시인은 후배이니 만큼 같은 계통의 시를 썼다고 볼 수 있는 청마보다 진일보했다”고 평가하셨는데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만하:단상에 앉아 있기는 했어도 마이크의 방향 때문에 듣지 못했던 이 이야기를 식이 끝난 뒤, 평론가 임우기씨와 손택수, 유홍준 시인, 그리고 최학림 부산일보 문화부차장이, 대형 유리창 넘어 한려수도가 보이는 다방에서 함께 담소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듣고 웃어 넘겼지만, 귀가 후 부산일보 문화면 기사(3/25)로 읽었을 때, 나는 김춘수 시인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지는 관념시의 새로운 수평을 떠올렸습니다. 이어 친숙하고도 낯선 사물에 독특한 언어철학을 먹이는 프랑시즈 퐁주의 시를 생각했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그날 평은 다양한 암시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의 고향에서 그의 격려와 함께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행운은 드문 일이지요.

 

이재훈:좀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선생님의 문학을 우리 시사의 어떤 지점에 있느냐 생각하면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시인들이 가지 않은 독특한 지점에 가닿아 있다는 말입니다. 문학사는 어쩔 수 없이 통시적 전후(前後)의 영향관계와 공시적인 유사성에 의해 진단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실 때 어떠한 시인들과 근친관계 혹은 영향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허만하:한국시의 통시적인 또 공시적인 지형도에 유난히 어두운 나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더욱 거울은 자신을 볼 수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다만 평론가 김주연 교수가 나의 시에 대해서 “김수영, 김춘수, 김종삼을 잇는 유니크한 시세계”를 가진 것으로 읽어 준 사실이 이재훈 시인의 질의에 대답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세 번째 시집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에 대해서는 “그의 시는 언어에 대한 독특한 시선과 자의식으로 세계를 새롭게 번역해 낸다. 그 새로운 풍경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서로 넘나들고 전체와 부분이 뒤섞이며 묘한 이미지를 직조해낸다”는 <문학과사회>의 평설을 읽고 거울에 비친 내 시의 초상을 조용히 한 번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깊이를 더하며 내 시를 몰아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를 쓰고 있습니다만 때로 그런 궤도에서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영향은 그렇게 가시적인 것만은 아니고 안으로 스며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국내 시인의 영향보다 외국 시인의 영향이 더 큰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도 단일한 것이 아니고 폴리포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훈:‘풍경’과의 만남에 대해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세계 속에서 중요하게 얘기되어지는 것들이 ‘풍경’에 대한 발견입니다. ‘풍경’이라는 요약어는 이제 시 속에서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입니다. 풍경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보거나 풍경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보는 방식이지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풍경을 보는 방식은 좀 다른 근거에 존재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말하자면 풍경을 보며 그 풍경을 형이상학적 사유로 체화하여 읽는 방식입니다. 또한 본다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게 생각되고요. 선생님에게 ‘풍경’이 가지는 의미는 어떠한 것인지요?

 

허만하:풍경은 세계의 동의어이면서 세계의 시적 은유라는 이중성을 가진 말이라 생각합니다. 경치가 풍경이 되는 것은 경치가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지는 그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자연의 일부가 목숨을 얻어 숨쉬는 풍경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어를 가지기 이전의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었지만 언어를 가지고부터 인간은 풍경의 일부가 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내가 종래의 시학 용어에 속하지 않는 ‘풍경’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은 기존의 문화적 전통에서 형성된 지적 체계를 떠나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발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찾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 ‘풍경’이란 말이 인간과 세계의 교섭을 다루는 모든 방법(철학. 시를 위시한 예술)을 수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또 인식의 기반이 되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나타내는데도 손색이 없는, 무한한 가변성(용량)을 가진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무렵 길 위에서 현전하는 풍경을 사귀고 있었습니다. 시는 정신적 풍경의 창조라 할 수 있지요. 우연한 일치이겠지만 두 사람의 실존주의 철학자가 풍경 속에서 그들 철학적 원리를 찾았던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케르케고르는 쉐란 섬 북단의 길레라이(Gilleleie) 벼랑 바닷가에서 실존을 깨달았고, 니체는 스위스의 실스 마리에서 영겁회귀사상을 얻었던 것입니다. 두 곳에서 있는 기념비를 풍경과 인간 사유의 극한이 하나가 된 자리를 기념하는 표시라 나는 생각합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시는 객관적인 묘사이기보다 감수성의 통로를 통과한 이미지입니다. 시인의 표정과 사유가 덧입혀진 묘사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미지의 방식은 때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독자를 압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그야말로 진경입니다. 저는 이 풍경의 발현 방식이 형이상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념’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저 또한 이 방법론에 대해 무척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에서 ‘관념어’는 무척 위험한 언어로 치부되지 않습니까. 잘 된 시를 쓰기 위해 관념을 어떻게 시 속에 투영해야 하는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허만하:묘사와 설명이 다른 것을 미리 말했던 것은 프랑시즈 퐁주의 시학입니다. 시에서 관념이 미덕이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반-미덕이 될 수는 전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나는 다만 세계와의 만남에서 잉태하는 관념이 결정화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헐벗은 관념은 철학의 영역이 아닌 시의 영역에서는 보기 민망할지 모르지만, 관념이 없는 시또한 지나치게 시적이라 나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따금 제도화된 느낌을 만나고 실망합니다. 그 실망에서 벗어나는 길에서 시인은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 냅니다. 릴케와의 만남 때 이야기 한대로 나는 처음 시를 쓸 때부터 그랬습니다. 랜섬은 형이상학적 시의 존재 이유를 밝힌 것으로 압니다. 만년의 하이데거가 사유는 정의랑 논의를 벗어난 곳에 사는 것이며 시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진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던 사실을 나는 주목합니다. 그 무렵 그의 글은 거의 시론이지요. 사유는 노래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만물을 낳는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김현승 시인의 「검은 빛」일 수 있습니다. “노래하지 않고/노래할 것을/다 생각하고 있는/빛”(「검은빛」)일 수 있습니다. 시는 “아픔보다 더 아픈/빛을 넘어/빛에 닿는/단 하나의 빛”입니다. 백화점에서 넥타이 고르기 이야기라는 기호의 문제에 환원될지 모르지만 나는 관념이 없는 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탈구축할 지층의 두께가 없는 엷은 시보다, 외견상 반시적(?)으로 보일 수 있는 관념이 배어 있는 감성 쪽에 끌려듭니다.
이재훈 시인이 대담의 들머리에서 말했던 캠벨이 괴테를 공자, 노자, 장자와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시인 괴테보다 사상가 괴테를 보았던 것이지요. 단테를 “물음 안에서 시를 쓰는 하이에나”라 욕했던 험담가 니체가 “괴테는 내가 경의를 표하는 최후의 독일인”이라 아첨했던 것도 시인 괴테의 관념 체계에 대한 것이었지요. 이재훈 시인이 물었던 것은 잘된 시를 쓰기 위해서 관념을 어떻게 시속에 투영해야 하는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였지요.
이 질의에 대해서는 김춘수 선생이 미리 해답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함께 들어보기로 하지요. 시집 <거울 속의 천사>(114 p.)에 수록되어 있는 「시인」을 읽겠습니다. 3할은 알아듣게/아니 7할은 알아듣게 그렇게/말을 해가다가 어딘가/얼른 눈치 채지 못하게/살짝 묻어 두게/살짝이란 말 알지/펠레가 하는 몸짓 있잖아/(후략). 통영 사투리가 배어 있는 그의 육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이재훈:그간 우리의 시가 가지는 방법론은 자아의 세계화였습니다. 즉, ‘동일성’의 시학에서 본다면 작고 하찮은 사물을 통해 우주의 진리에 대해 동일화를 꾀하는 방법론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은 이미 식상할 대로 식상해졌고, 꽃과 나무로 대표되는 소재들과 바라보는 시선들도 천편일률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근간에는 ‘차이’의 시학에 대해 많은 얘기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선생님의 시는 단연 이채로운 세계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허만하:우리들의 인식이 동일성보다 차이에 눈뜬 것은 서구의 이성 만능주의의 붕괴와 거의 때를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데리다의 탈구축 작업의 중심개념의 하나인 차연(diffrance)도 상이하다는 프랑스어의 동사 diffrer가 적극적으로 가담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과 ‘어떻게’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시작품에 대한 논의에서 시니피앙을 무시하고 시니피에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하는 그 무렵의 글들을 보고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극대화한 것이 그로마틀로지(데리다)이겠지요. 시는 전달할 메시지의 문제이라기보다 표현의 문제가 선행하는 언어예술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말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에서 보는 특징의 하나라는 지적이 현 콜로라도 대학교 영문학부의 클라그스 교수의 말과 일치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나는 전혀 그런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지요.

 

이재훈:“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해서 추가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산문시가 많이 등장합니다. 요즘은 또한 산문시들이 아주 많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무분별한 산문시에 관해서 비판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선생님의 <길과 풍경과 시>에서 산문시에 관해 짧게 언급한 말이 있는데요. 또한 <현대시>에 「운율의 계보」라는 시론도 발표하셨습니다. 결국 산문시는 리듬으로서의 내재율이 어떻게 녹아 들어가느냐의 문제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산문시의 문제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만하:산문시에 대한 내 견해의 전모는 <현대시학>에 「산문시에 대하여」라는 글(2004년 2월호)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압니다. 내 시론으로는 좀 긴 편이지요. 산문시의 발생과 그 전개는 시의 역사에서 필연적인 것이라는 견해였습니다. 시=행갈이 운율이라는 도식적인 견해에 대한 반성이지요. 산문과 산문시는 전혀 다릅니다. 산문은 의미의 전달을 사명으로 하지만, 시는(산문시를 포함하는) 도구로서의 언어사용을 거절하는 자평에 있습니다. 언어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지평이지요. 시와 산문시의 구별(또는 비산문시와 산문시의 구별)은 하나의 개념을 이항대립구도 속에서 파악하는 로고센트리즘이 낳은 구별이 아닌지 검증해볼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시적인 것’이 입는 언어의 의상은 시인이(또는 시적인 것 자체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산문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를 보면 두 가지의 길이 서로 공존하면서 수평선처럼 나란히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과학적 원리와 시의 원리, 즉 병리학자로서의 길과 시인으로서의 길입니다. 요즘 시인들은 대부분 두 가지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생활인으로서의 길과 예술가의 길인데요. 그것의 괴리감에서 오는 고민들이 많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두 가지 길을 어떻게 잘 이끌어오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허만하:내가 실존주의 사상에 눈떴던 것은 자연과학적 세계상(때로는 역사적인 필연성이라는 위협적인 모습을 띠기도 했었다)에 대항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가치를 지키기로 결심했을 때였습니다. 이 두 가지 상이한 원리는 강도 높은 집중을 요구하는 분명히 대립적 관계였습니다만 차원을 달리한 시점에 서면 상호보완적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타원이었습니다. 원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지만 타원은 두 개의 중심을 가지는 궤적입니다. 하나의 중심에 자리잡지 못하고 두 개의 중심(서로 다른 두 언어체계) 사이를 왕래할 때는 갈등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또한 시를 위한 밑거름이 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일 병리학이란 자연과학에 헌신했다면 실존으로서의 자기표현의 길은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겁이 납니다. 그 동안 어려움 속에서 내가 시를 지켜 주기도 했지만 시 또한 나를 지켜주었고 또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정년이 지난 이 즈음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데리다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상관적 존재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상대방의 존재를 ‘le supplement’라고 한 견해가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재훈:릴케, 메를르 퐁티, 크리스테바, 데리다 등등 선생님께서 탐독한 시인과 철학자들입니다. 대체로 선생님의 사유는 서구적인 이성적 체계 속에서 발화되어 그것을 우리의 문법으로 체화시키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산문을 보면 동양적 사상에 대한 인식 또한 남다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년 시절에는 한학공부를 많이 하셨잖아요. 그리고 한국의 전통 문양인 기와에 대해서도 전문 연구자 이상으로 수집, 탐구하시고 <신라의 기와>(공저)라는 연구서까지 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양에 대한 관심은 어떤 부분에서 이어져오는 지 궁금합니다.

 

허만하:내 사유가 서구적인 이성적 체계 속에서 발화되어 우리의 문법으로 체화시키고 있다는 이재훈 시인의 지적은 옳은 것 같습니다. 동양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한국인의 사상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방면에 걸쳐서 손을 뻗쳐 보았지만 이렇다 할 성취가 전혀 없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적 편력이 나의 시 또는 시론에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수직’의 개념으로 많이 파악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실존으로서의 수직 개념이지요. 이러한 수직 개념은 다시 지층을 탐색하는 상징으로 깊은 곳으로 내려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식의 순결한 원형으로 되돌아가려는 몸짓으로 파악될 수도 있겠는데요. 메를로 퐁티의 ‘야생’이라는 개념을 말씀하신 적도 있으십니다. 이러한 인식은 동양적 사상과도 연관이 있을까요?

 

허만하:‘수직’의 개념이 단순한 기하학적 좌표(구도)의 Y축이 아닌 것은 메를로 퐁티의 철학에서 드러나 있지요. 그에게 있어서는 수직적인 것이란 존재를 실존에 잇는 한 방식이었지요. 그 자신, 그의 유저가 된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가 수직적이라 부르는 것은 사르트르가 실존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의 사유체계에 있어서는 높이와 깊이는 서로 교환 가능한 관념이 되어 있지요. 이재훈 시인이 말하는 지층을 탐색하는 상징으로서의 깊은 곳도 이런 수직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추상적인 사유에 나는 생물학적인 차원에서의 수직 개념을 이었지요. 그것은 메를로 퐁티가 말하지 안했던 부분입니다. 원래 인간은 네발로 기어다니는 동물이었습니다. 앞발로 땅을 짚던 오래고도 오랜 생리적 습관에서 벗어나 뒷발로 대지를 밟고 벌떡 일어섰을 때가 인간이 처음으로 인간이 된 순간이라 나는 생각합니다. 수평이 수직이 된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수직적 인간이 됨으로서 비로소 두 손의 자유(=실존의 자유)를 얻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점이 높이를 얻었던 사실을 ‘수직’에서 읽어 낸 것이지요. 화순의 운주사를 찾아 야산의 정상에 누워 있는 와불 앞에 섰을 때 나는 메를로 퐁티가 말했던 수직에 homo erectus로서의 수직을 겹쳐 생각했었지요. 경주 불상들과 다른 바로크적 미를 가지는 불상들이 이 골짝에 있다는 황지우 시인의 귀뜸에 홀려 이 일대를 몇 번 찾아보았을 때였지요.
메를로 퐁티의 ‘야생’의 개념은 그의 수직개념과 맞물려 있지요. 위에서 말한 그의 최후의 저서에서 그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세계를 존재의 의미로서, 수직의 존재…야생의 존재로서 복원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야생의(sauvage) 존재란 인간의식의 반성적 분석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지각에 몸을 맡기지 않은 날것으로서의 존재이지요. 그 자신 이 용어를 시원적인(primordial), 또 날것(brut)라는 다양한 동의어를 구별 없이 쓰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시가 개입할 수 있는 틈새를 나는 읽었던 것입니다. 확연한 윤곽(정의)을 가지고 있지 않는 대상, 사람의 눈길이 머문 적 없는 정갈한 원존재( Urwesen)라는 추상을 나는 하이데거의 귀향이란 개념에 이어 본 것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어불성설이지만 시는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나는 지각이전의 존재의 풍경에 야생이라는 형용사를 얹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은 시를 위한 모티프가 될 수 있다는데 시의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장자는 인위를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세계를 混沌(혼돈)이라 이름지었지요. 이 혼돈과 메를로 퐁티의 야생을 비교해보는 것은 격조 있는 심심풀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향하는 화살표의 끝간 데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莊子>의 인식론이라 볼 수 잇는 제물론편(齊物論篇)에서 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혼연히 하나로 있는 것은 말하고 있지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인간은 그것을 분석합니다. 그 분석 이전의 만물 제동(萬物齊同)의 경지를 메를로 퐁티는 야생이란 언어로 이해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메를로 퐁티의 야생이라는 개념과 연관이 있는 동양의 사상에 대한 질의는 나에게는 지나치게 어려 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끝까지 시인입니다. 이만 일어서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재훈:두서없는 물음에 좋은 답변 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대담이 독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만하:알차지 못하고 두서없는 대답 사과 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시를 쓰겠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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