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2일. 권현형 누나의 시집 <포옹의 방식>(문예중앙)이 출간되어 축하자리를 마련했다.

<시원> 동인 멤버였던 옛 동지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대학로 2차 자리에서.

잘 빚어진 포도주처럼. 시간도 진하게 익는다.

몇몇은 일정상 참석을 못했다.

장무령, 권현형, 최치언, 이재훈, 정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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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0) 2013.10.11
Posted by 이재훈이
,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이재훈


그대들은
나를 외계인이라 불렀지.
난장이라고도 불렀으며
그냥 ‘꽃’이라고도 불렀지.
나는 원래 눈이 하나인 키클롭스를 사랑했고
피부가 검은 육체를 사랑했지.
피비린내 나는 이 행성에
착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어.
내 고향에서 십만 광년이나 떨어진 땅.
처음엔 검은 땅과 푸른 바다와 하늘이 끔찍했지.
왜 지구에 사는 종족들은 땅에 붙어서 다닐까.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어.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매일 괴로웠지.
비명과 고통이 반복되었고,
숭배할 대상은 이 땅에 없었어.
몇몇은 돈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름다운 살육을 보지는 못했어.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지.
결국 이 세계는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해.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남겨진 숫자의 아름다움.
그 미학으로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지.
팔등신은 수로 만들어지는 것.
조화의 아름다움은 방황으로 만들어지는 것.
지구인이라는 종족은 말이야.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지.
나는 거대한 건물 속으로 몸을 숨겼어.
하얀 가루가 폭발하고
그 가루가 내 몸에 달라붙었지.
해독크림을 발랐지만 너무 늦었어.
갑자기 사위가 연기로 가득 찼어.
손전등을 빌려 친구들과
살아나갈 도주로를 찾았지.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어.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 외울 거야.
그대들은 나를 북극에 핀 꽃이라 하겠지.
외눈박이 육체를 사랑하는 나를 말이야.


*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 DNA가 없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체가 전염하는 가상의 바이러스. 공기로 전염되며, 20초 안에 사망. 감염자의 공격성을 극대화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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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



최치언
(시인)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란 제목의 이 시는 SF적이고, 퓨전적이고 카툰적이다. 상징들은 적당하게 불친절한데, 서사는 힘이 있고 흥미롭다.
시인의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 시는 나의 영혼을 무례하게(?) 자극하여 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재밌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재밌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상징이나 주제, 의미 따위를 분석해야 되나? 미안하지만 난 남이 쓴 상징이나 주제, 의미를 분석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하여간, 제멋대로 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00년00시00분.
핏빛 하늘 위로 거대한 날개를 가진 무엇인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온 외계생명체들이었다.
지구를 향해 ‘십만 광년’을 날아온 그들의 거대한 날개는 너덜너덜 찢겨져 있었고, 말대가리 같은 길쭉한 얼굴은 돌투성이에 얻어맞은 듯 으깨어져 있었다. 주걱처럼 휜 턱주가리 아래 선과 악을 초월한 당근 맟 같은 그들의 하나 뿐인 눈알이 박혀 있었다.
한편, ‘검은 땅’에선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로 보기에도 ‘괴로운’ 인간들이 ‘우쭐’대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남자라는 인간들은 서로의 성기를 만지며 그 크기와 무게로 서열을 매겨댔고, 여자들은 사소한 질투로 자살을 결행했다. 하여간 그들은 소란과 무질서와 미친 짓거리들로 간신히 안정적인(?)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못생긴 발가락이 지구를 굴리고 있다는 허무맹항한 감상에도 젖어 있었다. 이미 지구가 무엇 때문에 우울하게 돌고 있는지 뻔히 밝혀졌는데도 말이다. 인간은 그러한 족속들이었다. 우월이 지나쳐 추악의 단계로 진입한 멜랑똘리들이었다.

00시00분.
맨발의 A가 14블록을 걸어간다.
A는 파랑에서 빨강으로 신호등이 점멸하는 것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걷는다. 그리고 그는 멈춰 서서 실성한 듯 하늘을 쳐다보며 지껄여댄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난장이’들, 눈물을 묻히지 않은 눈알로 이곳을 섬뜩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저 ‘꽃’들. 시인의 상징에서만 가능하던 존재들! 우린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 누군가 피를 토해야 겨우 하나를 알아먹을 수 있다면, 너무 늦어버린 거야.”
A의 뒤로, 털 빠진 비둘기 같은 수명의 B들이 신호등의 빨강을 쳐다보며 멍청하게 구구대고 있다.
A는 뒤돌아 B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왜 저들은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저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전에 시를 가르쳤다면, 저들은 나와 좀 더 각별한 얘기를 나누었을 텐데……”
A가 이처럼 난수표 같은 말을 떠들고 있을 때, 복용시 침을 찍찍 뱉게 되는 신종마약 찍찍을 처먹은 C가 덤프트럭을 몰고 13블록을 빠져 나오고 있다. 그리곤 14블록으로 낭창낭창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앗’하는 사이도 없이 인도로 뛰어들며 B들을 모조리 깔아뭉개 버린다.
덤프트럭에서 12인치 몽키스파나처럼 생긴 C가 내린다. C는 덤프트럭에 깔린 B들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기꺼멓게 썩은 이빨들 사이로 침을 찍찍 뱉으며, 갤갤 풀린 눈으로 핏빛 하늘을 올려다본다. 물론 A는 O다리 니퍼처럼 서서 황당하게 C를 보고 있다.

00시00분.
하늘을 날다 지친 외계생명체들이 C의 검은 동공 속으로 내리꽂히듯, ‘검은 땅’ 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당황한 C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 지른다.
“찍찍… 난장이들… 찍찍… 꽃… 찍찍…”
A는 얼른 C에게 다가서며 말한다.
“자네 눈에도 저것들이 ‘난장이’와 ‘꽃’들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자네하고는 좀 더 각별한 얘기가 필요할 것 같군. 뭐랄까?… 음… 다 뒤집어엎고 다시 시적으로 상상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고나 할까…?… 자네와 내가 지구를 구하는 일말일세… 부디, 이미 저지른 아픔답지 않은 ‘살육’ 따위는 잊어주게. 내 이름은 콩킹박사일세… 자네 이름은?… 찍찍맨이라 해두지…”
C가 A의 얼굴에 찍찍 침을 뱉을 사이도 없이 A는 C를 어둠에 쌓인 구두뒷굽 같은 골목 안으로 잡아끌고 들어간다.
순간, 빗빛 하늘에서 핏방울들이 떨어져 내리고 추락하는 외계생명체의 비명으로 지구가 헐렁헐렁 흔들리기 시작한다.
신호등이 빨강에서 파랑으로 점멸한다.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20초 동안에 사망한다던가? 거짓말을 조금 보탠다면 위의 짧은 이야기는 시를 읽고 난 뒤 20초 동안에 제멋대로 떠오른 생각이다.
그렇다면 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아닐까? 오래전부터 나에게만 유통된 말을 빌려 쓰자면 진정한 상상력은 의식의 죽음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하여간, 이것이 이 시의 힘이다.

_ [시와사상], 2010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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