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7.09.12 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재훈

 

우리는 그때 김광석을 광석이형이라고 불렀다. 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갈 데가 없었다.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살았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도 몇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에 모여 술이나 마시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는 무협지나 비디오를 빌려보는 게 최고의 재미였다. 자취방에는 비디오기기가 없었기에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할 수 있는 비디오기기까지 빌려주던 시절이었다. 하루 이틀 동안 열편이 넘는 비디오를 보고나면 머리가 아팠다. 대부분 홍콩영화나 헐리우드 액션영화였는데 줄거리나 영화 제목이 겹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 할 일이 없으면 음악을 들었다. 우리에게 김광석의 음악은 마치 우리의 삶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김광석을 듣고 있으면 그때의 일들이 떠올려진다.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라면만 먹어 자주 설사를 했다. 밥은 먹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저마다 학원으로 업소로 공장으로 식당으로 나다녔다. 밤이 되면 두더지처럼 한 사람씩 자취방의 소굴로 기어들어왔다. 모두 지쳐있었다. 아무런 기술도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그 외로움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 속에서 나오는 외로움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서로 얽혀 마음을 힘들게 했다. 아무런 낙관도 없는 미래의 일들이 눈앞에 뻔히 보였다. 친구들끼리 점점 말수가 줄었다. 무협지를 읽는 일도 비디오를 보는 일도 심드렁해졌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술을 찾았다. 스무 살은 누구나 술을 물처럼 마실 나이였다. 항상 술이 부족했던 나이였다. 안주는 새우깡이나 생라면 몇 개면 그만이었다. 술을 마시면 김광석을 들었다. 왜 김광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누구도 김광석의 노래를 바꾸라고 한 일은 없었다. 술을 마실 때는 무조건 김광석이어야만 했다. 누구라도 김광석을 틀어놓는 것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김광석을 들으며 옛 애인을 생각했다. 무료한 날들을 생각했고, 댓가없는 날들을 생각했으며, 사람은 왜 이렇게 외롭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했다. 김광석을 들으며 노래가 주는 쓸쓸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김광석의 노래가 왜 쓸쓸하게 들리는지에 대해서는 서로의 의견들이 달랐다. 그의 목소리 때문이라는 친구도 있었고 그의 노랫말 때문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그의 포크적인 음악성향 때문이라고도 했다. 어느 이유에서건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술을 찾게 되고 쓸쓸해지게 된다는 사실에서는 모두 수긍했다.

나는 김광석의 노래 중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그 노랫말이 꼭 내 얘기 같았다. 실제로 유리창에 이별한 애인의 이름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술을 마시면 꼭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진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울고 싶을 때 듣는 노래이다.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가 많다. 남자라는 무의식적 관행 때문에 울음을 많이 참는다. 혼자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세상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것만 같다. 또한 세상 모든 일들이 애처롭고 고맙고 미안해지게 되는 노래이다. 김광석은 김목경의 이 노래를 버스에서 듣다가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다고 한다. 내가 60대가 되더라도 아직 철이 들지 못한 늙은 어린애일 테지만 이 노래만큼은 아는 척하며 꼰대짓을 하고 싶어진다.

<마루>는 어머니와 슬픔에 관한 시이다. 이 시는 그 시절을 통과해 쓴 시이다. 어쩌면 김광석과 함께한 깊은 밤의 수많은 술추렴이 이 시를 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루


이재훈


이별은 순간이다
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
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생을 버텨왔다 그러나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신다
엉덩이 밑에서 건져 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_ 출처 : <이럴 땐 쓸쓸해도 돼>(천년의 상상) 중에서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지  (0) 2018.01.29
조정권 선생님 추모 산문  (0) 2018.01.15
서툰 사랑  (1) 2017.07.18
저 멀리 있는 시에 관한 짤막한 단상들  (0) 2015.05.12
바람의 계곡 라다크 투르툭에서의 이틀  (0) 2015.01.29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