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옥의 집

시시각각 2014. 3. 31. 22:58

동옥의 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했다.

작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 동옥의 신혼집이다.

지하에 있는 동옥의 공부방을 찍지 못해 아쉽다.

이날의 메뉴는 다음과 같다.

쭈꾸미, 호박죽, 해파리냉채, 홍어무침, 갓김치, 간장게장, 꼬막, 낙지죽, 생굴, 월남쌈, 숯불 삼겹살.

동옥의 집에서는 그냥 있는 반찬이란다.

옥의 짝 여의씨에게 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즐거웠을까. 더 말해 무엇하랴.

신동옥 부부, 박장호, 서대경과 함께 했다.
지난 3월의 어느 토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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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 대담

 

빌딩나무 숲을 거니는 비교秘敎의 사제

 

이재훈 ․ 신동옥

 

 


신동옥 : 형과 대담을 하다니! 오늘 나의 주제는 ‘형을 이해하기 위하여’다.(웃음) 최근에 대담집(이재훈, <나는 시인이다>, 팬덤북스, 2011)을 냈다. 형이 인터뷰를 진행한 십여 년, 그 오랜 행간을 좇다가 문득 이건 농축된 이재훈 스스로의 질의응답이 아닐까 여겨지기까지 하더라. 돌아가신 김춘수, 오규원, 박찬 시인과의 인터뷰를 읽고는 뭉클하기도 했다. 대담집 소개 말씀, 더불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들려 달라.

이재훈 : 오랜 문우인 신동옥 시인과 대담을 나누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 우리가 만난 지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우리가 독고다이, 언더 스타일이 서로 맞아 이렇게 오래 가는 건가?(웃음) 각설하고,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는 내게 십여 년의 세월이 집적된 문학 일기처럼 느껴진다. 이 대담집은 시인들이 직접 육성으로 풀어놓는 시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는 책이다. 각 시인들의 시관詩觀, 창작의 비밀, 창작배경, 성장과정, 문청시절,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적 삶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시인론을 쓰는 많은 평자들이 내 대담을 귀동냥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인의 창작배경이나 시적 의도가 큰 참고가 될 테니까. 또한 원로, 중견, 시의 성향, 계파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수의 시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너무나 많다. 시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한 가지씩의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나는 서면 인터뷰보다는 거의 현장 녹음을 하고 녹취를 푸는 식으로 했다. 당연 품이 많이 든다. 그만큼, 재미난 일화도 많다. 개인적으로 이미 작고하신 김춘수, 오규원, 박찬 선생 같은 시인들을 대담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김춘수 선생은 김수영이 평생의 라이벌이었다는 얘기와 국회의원을 역임하셨던 사연 등이 기억에 남는다. 오규원 선생과의 대담은 경기도 양평의 서후리라는 동네에서 요양하고 계실 때 했다. 이메일로 대담을 주고받았는데, 대담을 시작한 2004년 여름은 지독히 더웠다.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대담의 진행과정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박찬 선생은 연세에 비해 좀 일찍 작고하셔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대담 당시 일산에 살고 계셨는데, 비가 많이 내렸던 날이다. 직접 차를 몰고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대담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에피소드를 이 자리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또다른 자리에서 말할 기회가 있겠지. 궁금한 독자 분들은 우선 <나는 시인이다>를 참조하면 될 듯하다.

신동옥 : “1972년 강원도 영월 태생”이라고 약력에 썼다. 그런데 성인이 되기까지 강원도, 경상북도, 충청도까지 이사가 잦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린 시절 겪었다는 폭설에 대한 기억이나, 스무 살의 서울 체험에 대한 기억은 내게 이채롭게 들렸는데.) 자아가 형성되는 예민한 시기에서 막 사회화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잦은 이사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이재훈 : 태어난 곳이 영월이지만, 영월을 고향이라고 말하기엔 내게 고향이 너무 많다. 어쩌면 고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초등학교 때까지의 유년시절은 강원도 일대에서, 중고교 시절은 경북 일대에서, 고교부터 지금까지는 충남 논산이 내가 겪은 공간들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 땅의 산하들이 나를 키웠으니까. 그렇게 어린 시절을 늘 떠돌았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 이전 살던 곳을 그리워했고. 적응이 될 만하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늘 친구들에게 떠나는 사람이었고, 먼 곳에서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연락이 끊기는 사람인 거지. 말이 없었고, 혼자 많이 놀았고, 누군가 먼저 다가와야만 겨우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신 시인께 언젠가 얘기했던 폭설에 대한 기억은 강원도 인제의 깊은 골짝에 살 때였다. 정확히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그 동네는 여름과 겨울밖에 없었다. 9월이면 김장을 시작했고, 너무나 추운 동네였다. 심지어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얼어 죽었을 정도였으니까.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군인들이 눈을 치워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동네였다. 눈이 많이 왔던 날은 방문을 여니 마루 위까지 쌓였던 적도 있었다. 허리 깊이까지 눈이 내려 갇혔던 기억. 대체로 아이들은 동굴을 만들어 놀았다.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산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재미난 추억들이 많다.
   어릴 때부터 공간에 대한 집착은 없었던 거 같다. 떠나면 슬퍼진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쿨하게 떠났던 거 같다.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눈물바람이었고. 나는 이사를 가면 늘 타던 커다란 트럭이 기억에 남는다. 정확하게는 트럭 뒷좌석의 다락방 같은 공간. 이삿짐을 싣던 트럭은 운전석 뒤에 한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동생 둘과 함께 덜컹거리며, 평소에 먹지 못했던 맛난 과자를 먹으며 정말 오래도록 차를 타고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디로 가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걸 보면. 이사를 안가겠다고 떼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대충 어디 먼 곳으로 가는구나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사를 간다는 얘기를 들으면, 또 트럭의 뒷좌석에 탈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철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인지 뿌리의식이 없고, 정처 없는 유랑의식이 날 지배했다. 나중에 어디 조용한 데로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가끔씩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내게 중요치 않다. 내가 가는 그곳이 또 다른 내 고향이 될 테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앉아 있는 자리가 어떤 공간인지가 중요하다. 조용한 다락방 같은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신동옥 : 그래서 그런지 형의 작품에는 공간 내지는 공간성에 대한 예민한 촉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의 경우 그 공간은 첫째 도시와 일상의 공간, 둘째 신성의 거소, 셋째 비밀한 시원始原이 기루어지는 자리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개별 작품들 안에서 시적 공간을 배치하는 스킬이 놀랍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시인으로서 형의 특장이 아닌가 싶은데.

이재훈 : 시를 쓰면서 시적 공간의 배치를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부분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속에서 스스로 운용되어진 것 같다. 시적 공간들이 떠오르고 이동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 것이지. 그래서 시속의 자아가 많이 날아다닌다.(웃음) 시공간이 광활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곤 하는데. 이런 부분은 평소 상상하던 버릇 때문일 것이다. 늘 이곳 현실보다는 현실 너머를 많이 생각하고, 상상했다. 예를 들면, 우주로 날아가 외계인을 만나 놀거나, 내가 칠십 넘은 노인이 되어 새로운 사랑을 한다거나 하는 식의 상상들. 사실보다, 기적 같은 사실이 더 매력 있지 않나. 현실보다 믿을 수 없는 현실 혹은 믿고 싶은 현실에 더 강한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상상들이 현실에 발 디디고 사는 시인의 모습에 투영되어 나온다.
   또한 성인이 될 때까지 잦은 이주와 이별 등의 시간이 유목적 감각을 낳았던 것 같다. 유목적 감각이 묵시적 꿈들이나 환상, 욕망 등과 뒤섞여 내 시적세계를 이룬 것은 아닐까. 신성의 공간이나 시원 등을 탐구하는 시적 세계는 신화나 종교, 고고학 등을 좋아하는 독서습관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관심은 지속될 것이지만, 좀 외롭겠지. 좀 낯선 것일 수 있으니까.


신동옥 : 낭만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박수연, 「내면적 낭만의 순간」, <현대시>, 2005년 12월호) 첫 시집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썼는데.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원始原의 원대한 물음이 있다. 가령 밤하늘의 별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다소 낭만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꽤 고통스러운 일이다.”(「흠의 고백」,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시인의 말 중에서)

이재훈 : 과장된 표현으로 읽혀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겐 정말 절실했다.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은유적인 표현을 썼지만, 내 존재 이전의 먼 곳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일은 내겐 중요한 행위였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나를 여러 번 죽였다. 운명이란 것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이재훈이란 인간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운명적으로 이렇게 타고나서 생긴 거다. 남자이고, 이런 부모와, 이런 종교와, 이런 생김새와, 이런 교육과, 이런 공간들 모두.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은 몇 개밖에 없더라.
   존재탐구나 고행, 미지의 동경 등은 오래도록 나를 치기어린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아직도 미완인 걸. 계속 치기어린 사람으로 살아야겠지. 낭만주의자. 멋있지 않나. 끝까지 낭만주의자로 남고 싶다.

신동옥 : 첫 시집 해설에서 유성호 선생은 형의 시세계에서 종교적인 맥락을 소상히 밝힌다. 김유중 선생의 통찰(「그노시스를 향한 열망」, <시와생명>, 2002년 겨울)과 형 스스로의 고백적 아포리아(「숭고한 그노시스와 연금술사」, <시와반시>, 2007 겨울)도 있었다. 모태신앙이지 않나? 형의 기독교적인 상상력은 묵시록적인 비전보다는, 일종의 영지주의靈智主義(Gnosticism)랄까 그런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 같다. 이런 성향은 첫 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으로 건너오는 동안 더 강해진 것 같고. 형 시에서 종교적인 채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재훈 : 종교적 메타포나 질료가 시속에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내가 생각지 않았는데 언어 속에 들어와 있더라.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니까 그런 부분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까지는 집과 교회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 아주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신앙생활에 대한 다짐과 계획 등으로 모든 삶의 울타리가 쳐졌던 때였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자취를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또 이사 가신 거지. <데미안>에 등장하는 싱클레어의 삶이 시작된 거다. 사춘기가 늦게 와서, 전학을 가지 않겠다고 반항을 했다. 그렇게 혼자 떨어져 지냈는데. 문득, 이 모든 주어진 삶의 굴레에서 이탈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격렬하게 몰려왔다. 그리곤 신앙생활과는 동떨어진 난삽한 생활들을 했다. 그때는 신앙생활 이외의 모든 것들은 난삽한 죄의 생활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아무튼, 정통 기독교 외의 것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에큐메니칼, 해방신학, 중세 비교도, 그노시즘 등등. 기독교의 고집스런 구원관에 대한 회의도 있었고. 그 후로, 성聖과 속俗을 오고가는 철새 신자로 살았다.

신동옥 : 그렇다면, 형을 ‘연금술사’ 내지는 ‘그노시스트Gnosist’라고 불러도 되겠다.

이재훈 : 그렇기도 하다. 그노시스트지. 믿음보다는 앎에 더 관심이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신론자라기보다는 크리스천이 돼야 한다.

신동옥 : 시에서 상징을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다! 첫 번째 시집의 ‘황홀한’ 시리즈와 두 번째 시집의 ‘대황하’ 연작은 이런 생각을 단박에 증명하는 역작이다. 시적 상징에 대한 형 나름의 정의 같은 것이 있을 텐데. 참, 대담이 활자화될 쯤 두 번째 시집이 나올 수도 있겠다. 제목은 어떻게 정하셨는지?

이재훈 : 과찬이다. 한 편의 시에서 전달할 수 있는 상징은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작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상징은 여러 편의 시 속에서 반복적으로, 혹은 다양한 변주로 전달되어야만 힘을 갖는다고 본다. 특히 ‘대황하’ 연작은 물에 대한 상징을 제대로 밀고 가본 경우인데, 앞으로도 이러한 스타일의 연작들을 생각 중이다. ‘대황하’ 연작은 우연히 시상이 다가왔다. 이십대 초반 시절 쿠스코Cusco라는 밴드의 「대황하」라는 곡을 지겹게 들었던 때가 있었다. 한 평도 안 되는 고시원에 누워 이어폰으로 그 곡을 들으며, 거대한 황토물의 휘몰아침을 생각하면서 삶을 견디던 때였다. 오래전 그때의 감성이 정말 섬세하게 다가오더라. 내겐 행운인 거지. 두 번째 시집은 아직이다. 해설도 아직 안 나왔고. 때가 되면 나오겠지. 제목도 아직 미정이고.

신동옥 : 두 번째 시집, 기쁘게 기다리겠다.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쓸쓸한 날의 기록」)라고 말했다. 이때의 ‘서정시’, ‘서정시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재훈의 정의를 듣고 싶다. 그거 아는가? 가끔 형이 “나는 실패한 서정시인이지”라고 말할 때나 “나 같은 삼류시인이 무얼”라고 할 때면, 콱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다는 거.(웃음)

이재훈 : 편하게 읽으면 되지 무얼. 그 시는 정재학 시인과 내 자취방에서 밤새며 나누었던 얘기들을 시화한 것이다. 그래서 부제를 ‘정재학에게’ 라고 붙였다. 감수성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다는 건데. 그런 면에서 모든 시들은 다 서정시이다. 왜 서정시라 칭하는 것들만 올곧은 정서와 예민한 감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론에서 흔히 말하는 ‘서정시’에 대한 개념도 새롭게 정립해야 될 시점이지 않을까.
    가끔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기부정’은 날 채찍질하기 위해서다. 자기비하, 자기부정 등을 통해 최소한 내가 그런 시인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최고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간혹 있는데, 그 순간 아찔하다. 너무 천박하고 유치한 생각이지 않나. 그 생각을 덜기 위해 끝없는 자기부정을 하는 것이다. 자기부정만이 살 길이다.

신동옥 : 동감同感, 상련相戀이다. 첫 번째 시집의 세계가 노래 특히나 영가靈歌의 세계였다면, 두 번째 시집의 가장 특징적인 무늬는 ‘침묵’과 ‘고요’의 깊고 너른 울림이 아닌가 싶다.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이재훈 : 그렇게 읽히는가. 아마도 침묵과 고요의 시간들을 얻고 싶어서겠지. 요즘 도통 침묵과 고요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수다스러워졌고, 주위는 산만하고 시끄러워졌다. 유폐의 공간과 시간이 부족하다. 그런 열망이 시에 드러나지 않았을까. 또한 첫 번째 시집이 하늘 위에서 부르는 노래였다면, 두 번째 시집은 하늘과 땅의 중간쯤에서 부른 노래이지 않을까. 아마 세 번째 시집은 좀 더 땅으로 내려와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신동옥 : 「新林洞」, 「매일 출근하는 폐인」, 「비비디 바비디 부」,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등등 두 번째 시집에서는 일상의 공간에 대한 재해석이 눈에 띈다. 그 공간을 성찰하는 눈이 깊고 차분해졌고. 청년과 장년, 미혼과 기혼의 차이인가? 시인 이재훈에게 생활인 이재훈의 일상은 어떤 주제인가?

이재훈 : 두 번째 시집의 십여 편 정도는 내 일상 공간들이 시에 직접 드러난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내게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스무 살 때 처음, 서울을 와봤다. 물론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영락교회에서 초청한 강원도 오지마을 어린이탐방단에 뽑혀 서울에 온 적이 있긴 하다. 그때 국회의사당과 KBS를 견학했었는데. 스무 살 때 본 서울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너무나 큰 한강과 책으로만 보던 63빌딩, 아파트, 수많은 차들. 시골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 괜히 도시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멀리 서울의 빌딩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땐 알싸한 도시의 매연도 좋았으니까.
   이런 서울이 지금은 부정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숨이 막히고, 날 옥죄는 공간으로. 하지만 어쨌든 내가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할 공간이지 않나. 아마 서울에서 인간처럼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통과제의일 것이다. 시에서는 몽상하는 산책자로 남고 싶다. 도시 속의 은둔자로 살아가고픈 욕망 때문이다. 욕망의 서울 속에서 겨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러한 도시성찰이라도 있어야 하니까.
   청년이건 장년이건 별 생각이 없다. 결혼을 했으니, 그저 고맙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에 많은 게 담겨 있다. 가장으로서 책임이 있기 때문에 밥벌이를 해야 하고, 그런 일상들이 시속에 스며들지 않았겠나 생각한다.

신동옥 : 두 번째 시집 원고를 읽으면서, 소재나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진 것을 보았다. 호흡과 리듬이 첫 번째 시집보다 더욱,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 시 속에서 이재훈은 젊음 쪽으로 역진逆進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재훈 : 정신연령이 낮아서일 거다. 그런 평가가 기분은 좋다. 젊음 쪽으로 역진이라니. 하하. 그런데 나이는 먹어가고 있지 않는가. 올해로 사십이다.(웃음) 두 번째 시집은 첫 번째 시집에 비해 좀 더 다양한 시편들을 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동옥 : 난 여전히 형이 사십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각설하고) 현재 월간 <현대시> 부주간이다. 국가대표 편집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 그만큼 성별과 연령, 시력詩歷을 불문하고 유연한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문학 현장에 있었는데, 그간 어떤 변화를 지켜봐 왔나? 시단이 달라진 점과 형 스스로가 달라진 점은 무얼까?

이재훈 : <현대시> 1999년 12월호부터 편집에 이름을 달고 일했다. 발행인 원구식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대학원 공부와 병행하며 일하기 시작했다. 그새 만 십년이 훌쩍 넘었다. <현대시>에 내 청춘과 삼십대를 고스란히 바쳤다. 억울한 건 없다. 좋아서 한 일이니. 나 같은 시인도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좋은 문학지를 만들기 위해 나름 바닥부터 고생했다. <현대시>는 한국 시단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대표적인 시전문지이다. 많은 시인들이 아끼는 잡지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또한 가장으로서의 내 생활을 걱정해주는 분들이 많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최근 시단의 변화는 젊은 편집진들로 세대교체가 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으로의 시단을 위해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단은 아직까지 다른 집단에 비해 권위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 자유로울 것 같지만 위계를 중요시한다. 그런데 젊은 세대의 시인들은 이런 부분을 견디지 못한다. 어른들이 뭘 시키거나 가르치려드는 게 싫은 거지. 또 윗세대들은 달라진 젊은 세대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선생 노릇 안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 같은 어른들이 젊은 시인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은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차이는 언제나 있어 왔던 것 같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랫세대들이 윗세대가 되면 또 이해하겠지. 원래 시인은 제각각 하나의 공화국 아닌가. 이형기 선생은 “시인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고 했다.
   유연한 교우관계는 따지고 보면 외롭다는 말과도 같다. 인간관계는 깊이가 중요하지 않나. 아무래도 시전문 월간지에 있다 보니 대부분의 시인들을 한 번씩은 보게 된다. 신동옥과 같은 시인이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깊고 청명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길 위에 영혼의 동반자인 문우들이 있다는 게 고맙고 든든하다.
   내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얼까. 잘 모르겠다. 내 꿈은 멋있게 늙는 것이다. 나잇값 못하고 추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지도.

신동옥 : 이재훈이라는 ‘첫정’ 선배가 있어 든든하다.(웃음) 형은 소문난 독서광이기도 한데. ‘이재훈이 꼽은 책 베스트 3’을 부탁한다면.

이재훈 : 소문났다니 무슨 말인가.(동옥 : 내가 소문냈다) 독서광은 신동옥 시인을 따라갈 자가 없는데. 옛날 말이다. 헌책방을 돌며 책을 모을 땐 좀 읽었었지. 지금은 많이 읽지 못한다. 책 베스트는 통과하자.

신동옥 : 마지막으로, 시인 이재훈으로서 생활인 이재훈으로서, 형 스스로에게 하는 당부와 다짐은 무언가? 이 자리에 명문화시켜서 남겨놓자.

이재훈 : 그러지 말자. 명문화라니. 명문화시켜 놓아도 내일이면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시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의 생각들이 자주 바뀐다. 특히 삶의 무게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요즘은 더욱더. 결국 시인과 생활인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것을 알면서도, 두 마리 토끼를 쫓아가야만 하는 운명 아닌가. 다만 내 시에 등장하는 “나는 백 년의 무명을 견딜 것이다” 같은 철없는 폼은 계속 재고 싶다.

신동옥 : 그 다짐 함께 간직하겠다. 오랜 시간 고생 많으셨다.

이재훈 : 고맙다. 오늘이 기억날 것이다.

2002년 이즈음, ‘현대시동인상’ 시상식장이다. 머리는 삭발을 하고 붉은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는, 커단 화분에 앉아 호프를 먹었다. 대학로 비어할레 3층 화분 위에서 형과 첫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돌아가고 술집 불이 꺼지고 보도블록에서 새벽 훈김이 올라오는데, 무슨 열병에 들떴는지 근처에 여관을 잡기로 한다. 함기석, 김태형, 김참, 정재학, 김언, 이재훈 형들 틈에 함께였다. 태형 형이 앞장섰다. 모두들 아스팔트 한 가운데로 스크럼을 짜듯 나란히 허청허청 느릿느릿 폴랑 폴랑 걸었다. 그러고는 서울대병원 뒤쪽 여인숙 2~3인실에 들었다. 재훈 형과 재학 형과 나는 카운터 밑으로 주인 몰래 기어들어간다. 염소 똥만한 방에 장정 일곱이 ‘빤쓰’만 덜렁 입고 앉아 할 말은 무에 그리도 많은지. 새벽 어스름 재훈 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가 막 뜨는 좁은 골목길로 재훈 형이 나서자 ‘빤스’만 입은 장정 몇이, 어디 먼 길 떠나는 사람 보내는 모양 술기운에 아득한 손을 오래 흔들고 섰던 거다. 재훈 형은 이 날의 멤버들을 일러 ‘첫정’이라고 부른다.
내가 형을 처음 만나고 함께 밤을 지새운 다음날, 형은 전농동 시립대 후문 ‘관방’에서 또 어디로 집을 옮긴 거다. 그리하여 내게 남은 형의 첫인상은, 해가 뜰 무렵 혼자 떠나는 사람, 무시로 집을 옮기는 사람, 좁은 어깨에 하늘같은 것을 잔뜩 얹은 사람, 그러고도 내처 흔들리며 걷는 사람…… 형이 좋아하는 헤르만 헤세, 헤세가 쓴 ‘크눌프’ 같은 사람. 형이 어디서 어디로 방을 옮기고 서가를 옮기는 동안 내가 함께 한 셈이 된다. 형은 형대로 아우 녀석이 어디서 어디로 옮겨서 빌빌대는 내내 함께 한 셈이 된다. 세포가 자라고 커서 소멸하는 저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시공간 감각으로 그렇게 형은 ‘부동의 포에지’를 짊어지고 또 옮기며 사십 세에 이른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와 지난 십년 동안의 형을 돌이킨대도 형의 장난기 가득한 빙그레 웃음 한방이면 내사 와그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 그러니 내편에 실재하는 형이라는 품 넓은 웃음―실재의 포에지를 가만 가만 들여다보는 수밖에. 부디 이재훈이라는 그노시스엔 바닥없이 천공이 깊어라. 이재훈이라는 연금술사에게는 촉매 없이 치환이 자재하라. 기도를 더하며 함께 하는 것. 함께 할 수 있어 내내 고맙고 든든한 것.



신동옥 | 시인. 1977년 전남 고흥 출생.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가 있음.


_ <현대시> 2011년 6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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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 오늘의 전위 21세기 한국의 시동인

전위를 꿈꾸는 주체들의 동거



이재훈(사회)
김근
김언
신동옥


1. 동인 활동의 현주소
2. 동인들의 문학운동과 전략에 대하여
3. 동인 활동을 통해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는가
4. 현 동인들에 대한 비판적 점검과 동인 활동의 허와 실
5. 동인 활동과 창작과의 관계
6. 2000년대 활동하는 시인들의 일상과 시적 향방
7. 2000년대 동인의 의미와 전망


1. 동인 활동의 현주소

이재훈 :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를 맡은 이재훈입니다. 이번 좌담은 2000년대 이후 시동인들을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이를 통해 21세기 새로운 시적 경향을 진단해보는 자리로 마련하였습니다. 애초의 계획으로는 동인 개개인의 시적 경향을 바탕으로 각 동인이 추구하는 지형도를 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런 기획이 여러 차례 있었고, 동인 구성원을 통해 동인의 지향점을 찾는다는 것이 단순한 논리로 귀결되는 것 같아 이번 좌담을 마련하였습니다. 좌담을 통해 좀 더 자유롭고 편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대시]에서 90년대 초반에 이와 비슷한 동인 좌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현대시] 1992년 5월호) 90년대 시동인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자리였는데, 이제 10년을 훌쩍 넘어 2000년대 시동인을 점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2000년대 이후 시동인의 위상과 가능성을 점쳐보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제가 현재 시동인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등단 이후 90년대 후반부터 <시원>이라는 동인 활동을 한 경험이 있고, 또 전반적으로 좌담을 이끌어 갈 길잡이로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지금 세 분의 시인들께서 각 동인들을 대표하여 좌담에 참석해주셨습니다. <천몽>의 김언, <불편>의 김근, <인스턴트>의 신동옥 시인 반갑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들 가까운 친구들인데 술자리가 아닌 이렇게 진지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새롭네요.(웃음) 먼저 각 동인들의 탄생 배경과 현재의 활동 상황 등을 소개해 주십시오.

김언 : 오늘 좌담에 참석하신 <불편>의 김근 시인이나 <인스턴트>의 신동옥 시인과 달리 저는 <천몽>에 초창기부터 참여해온 시인이 아니라서 동인의 탄생 배경과 변모 과정을 살아 있는 육성으로 들려줄 수가 없어서 아쉽네요. 부득이 작년에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렸던 <천몽> 동인 페스티벌에 소개된 소책자 내용을 간단히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1998년 고찬규, 권혁웅에게 동인 제의. 이장욱, 이영광이 가세하여 90년대 중후반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 전 시인들 선별 작업 시작.
1999년 2월, 10여 명의 시인에게 편지 보냄. 첫 모임 강혜미, 고찬규, 권혁웅, 박해람, 배영옥, 손택수, 여정, 이영광, 이장욱, 이찬, 유종인, 진수미 참석. 같은 해 이미자 들어옴.
2000년 김행숙, 정재학 들어옴. 이영광 나감.
2001년 이기성 들어옴.
2005년 김언, 배용제, 이근화, 진은영, 황병승 들어옴.”

이렇게 소개가 되어 있는데요, 당시 소책자에 약력과 시가 들어 있는 시인은 모두 18명입니다. 개중엔 현재 동인 활동이 사실상 전무한 몇 사람도 있지만, 일단 소책자에 소개된 시인을 모두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찬규, 권혁웅, 김언, 김행숙, 박해람, 배영옥, 배용제, 손택수, 여정, 이근화, 이기성, 이미자, 이장욱, 정재학, 진수미, 진은영, 황병승. 여기에 지난해 12월 조연호 시인이 마지막으로 동인에 가입된 상태입니다.
보시다시피 <불편>이나 <인스턴트>에 비해서 인원이 조금 많지요? 많기도 하지만, 동인들 각각의 시 스펙트럼과 활동사항은 그보다 훨씬 더 폭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색깔도 다르고 사는 모양새도 다르고 등단 연수와 나이 또한 멀게는 10년 가까이 차이가 나다 보니 언뜻 하나의 동인이라고 이름 붙이기가 곤란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 어수선함과 다양함이 어쩌면 <천몽>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천몽> 내부에 단일한 문학적 지향성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1999년 동인이 결성될 때부터 견지해온 <천몽>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알고 있으며 그 고집은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동인은 분명하지만, 각자의 문학적 지향은 하나의 에꼴로 묶이지 않고 산만한 편입니다. 따라서 동인을 통한 일정한 문학 운동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동인 모임’만이 있을 뿐이지요. 어떤 문학적 구심점이 없이 각자의 시세계를 ‘각개 격파’해가는 시인들의 모임은, 나중에 별도로 설명이 더 있겠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가장 2000년대적인 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몽>이 동인인 순간은 아주 가끔 있습니다. 1년에 서너 번 정도 모이는 모임이나 부득이하게 동인의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 순간에만 ‘분명히’ 확인되는 동인, 이게 과연 진정한 동인인가 하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런 질문이나 힐난조차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문학적 지향성이나 구심점 같은 동인의 내부를 비워놓았기에 대외적인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오지 못했던, 아니 하마터면 나올 뻔했던 동인지 서문에도 들어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있지 않습니다. 내부에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세계가 모인 것, 그것이 <천몽>입니다. 어느 지면에서 진수미 동인이 얘기한 것처럼 <천몽>은, 음식에 비유하자면, 비빔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선살로 이루어진 모듬 초밥에 가까운 동인입니다. 으깨지고 비벼지고 섞이는 동인이 아니라 함께 진열되어 있지만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 그 상태가 <천몽>이라는 동인입니다.

김근 : <불편> 동인이 시작된 건 2002년 겨울이었습니다. 동인을 처음 제안한 건 저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등단 후 몇 년 동안 문학적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그 공백기 이후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 저는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 소통이라는 건 문학적 고민에 대한 소통이면서 문제의식의 공유였죠. 제가 처음 동인을 제안한 건 같은 [문학동네] 출신 이영주 시인이었습니다. 만나서 얘기해보니, 그 역시 저와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시단에 팽배한 전통적 서정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 서정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기보다는 시단의 일방향성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었죠. 그리고 그 시들이 리얼리즘이나 상업주의로 포장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가까이 지내던 같은 [문학동네] 출신인 안현미 시인에게 전화했고, 안현미 시인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셋이서 함께 할 시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김중일 시인을 추천했고, 이영주 시인이 김민정 시인을 추천했고, 안현미 시인은 장이지 시인을 추천했습니다. 이렇게 여섯이서 출발했습니다. 그 뒤 2003년에 하재연 시인이 동인에 합류하게 되었고, 2004년 김경주 시인이 동인을 함께하게 되면서 여덟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여덟 명이 동인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초기에 저와 이영주 시인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소통에 대한 필요성은 모두 공유했습니다.
등단 순으로 보면, 저(1998년 [문학동네])와 김민정(1999년 [문예중앙])이 1990년대 말에 등단했고, 이영주(2000년 [문학동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안현미(2001년 [문학동네]), 김중일(2002년 [동아일보]), 하재연(2002년 [문학과사회]), 김경주(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순입니다.
초기에 모임은 2주에 한 번씩 모여 합평을 했습니다. 서로 작품에 대해 합평을 하며 3년 정도를 보냈고 그 이후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지금까지 모이고 있습니다. 첫 시집들이 나온 뒤에는 각자의 첫 시집들이 가지고 있는 특장과 단점을 토론하며 이후 작품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집들이 나오면서 또 다른 모임의 정체성을 마련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신동옥 : <인스턴트> 같은 경우에는 강성은, 김안, 박장호, 서대경, 신동옥, 황성규 이렇게 여섯 명입니다. 동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01년에 제가 먼저 등단하게 되면서였습니다. 함께 수업을 들으며 알고 지내던 박장호, 서대경과 함께하면서 틀이 갖추어졌습니다. 황성규는 학교 후배이고 시에 뜻을 두고 있어 2002년부터 합류했습니다. 초기에는 일없이 만나 학교 얘기나 하고 했어요. 그러면서 인터넷 카페활동이나 부정기적으로 술추렴을 하고……. 선후배 시인들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싶네요. 그러다가 김안이 들어오면서 합평을 위주로 하는 본격적인 동인 모임이 꼴을 갖추었습니다. 2001년에 모임을 갖기 시작하여 강성은이 2004년 겨울에 마지막으로 들어와 만 3년 만에 여섯 명이 모두 모였습니다. 모임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많으면 일주일에 한 번, 늦어도 두 달에 한 번, 평균 2~3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져왔어요. 그러면서 한 명씩 한 명씩 등단을 했습니다. 제가 2001년 겨울에 등단했고, 맨 마지막으로 등단한 강성은 시인이 2005년 가을에 등단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계속 우연이 겹쳐지면서 동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마추어 모임으로 시작했으니, 애초부터도 동인이라는 자각은 없었습니다. 동인 이름도 제가 멋대로 붙인 카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거구요. 2006년 여름, 어떤 잡지의 동인 특집에 인스턴트 동인 여섯 명의 신작을 실으면서부터 동인 이름을 인스턴트라 외부에 알린 셈이 되었습니다. 동인의 이름과 존재를 드러낸 셈이죠. 앞으로도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저희 스스로는 만들어진 경위나 활동도 그렇고…… 평소에 해오던 대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계속 해온 것이죠.

이재훈 : 동인 활동의 현주소를 들었는데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천몽>은 10여 년 가까이 동인 활동을 해왔고, 그 다음에는 <불편>이, 그리고 <인스턴트>가 가장 젊은 동인으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인스턴트> 같은 경우는 등단 전부터 꾸려져서 등단 후까지 이어지는 약간 다른 탄생 배경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 동인들의 문학운동과 전략에 대하여

이재훈 : 우리나라의 시사에서 동인지의 의미는 남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1919년 <창조>에서부터 시작하여 각 문학연대마다 동인지가 시사에 던지는 새로운 문학적 특성은 그 시대를 대변하였습니다. 동인지는 발표지면이 귀했던 시절, 신인들의 새로운 목소리를 수용하는 발표의 장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비영리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자본의 시스템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이로 인해 동인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무대가 된 셈입니다. 이러한 성격이 하나의 문학운동으로 발전해나가기도 했으며 새로운 문학담론을 창출했습니다.
동인지는 결국 기존의 권력적인 문학의 장에 새로운 저항의 기운을 불어 넣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기존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전위의 힘이나 개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동인의 정체성 중의 하나가 어떤 기획에 의해 발전한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동인들의 문학 활동이 전략을 가지고 수행해야 의미를 갖는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지금의 동인과는 좀 다른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동인이 가지고 있는 문학운동이나 전략, 혹은 동인들이 추구하는 문학적 지향성 등을 자유롭게 얘기해 주십시오.

신동옥 :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많이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인스턴트>의 경우 동인이 만들어진 배경이 여타의 동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동인이 결성되려면 동인을 만든 핵심 멤버들 사이에 어느 정도 문학적인 경향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저희 동인 중에 모난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는 시인은 없었고, 특별히 작품세계에 변화를 보인 동인도 없었어요.
사전을 찾아보니 동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정의되어 있더군요. “어떤 일에 뜻을 같이하여 모인 사람”. 여기서는 ‘사람’은 단수 일반명사이지만, 동인 활동을 한다고 말할 때 이 말 자체가 복수 개인으로서 개체인 동시에 집단을 뜻하게 됩니다. 때문에 동인은 한 집단을 이루면서도 그 안에서 개개의 독립성이 강조됩니다. 동인 활동의 지향성·방향이라는 말은 이런 정의에서 거꾸로 도출됩니다. 두 번째로는 ‘같은 뜻’ 또는 ‘뜻을 같이 해서 활동을 한다’라는 말입니다. 보통 동인 활동, 동인운동, 시운동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런 의미의 지향성이 강조됩니다. 동류를 이루는 시인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획책한다면 그 지향점은 모호한 대로나마 밝혀야 하겠죠. 저는 질문에 포함된 ‘문학활동, 문학운동, 전략’ 이런 말들이 생소하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너희들만의 전망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글을 써나가면서 좌절에 부딪혔을 때, 어떤 비극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미래를 견지하느냐’ 하는 것일 텐데요. 글쎄요…… 저희 동인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답했느냐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있군요. “<인스턴트>는 그럴듯함에 호소하는 오래된 전통에 대해서 항상 의구심을 품는다.” 동인으로서의 인스턴트는 전략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비겁한가요?). 저희 동인들이 함께 원고지 60매 정도의 아포리즘이랄까, 나름의 시론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유독 이런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언어, 리듬, 음악, 자아, 운율, 세계, 의식….’ 결국 저희 동인은 한 번도 합의하지는 않았지만,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바, 시 자체를 동인의 문학적 지향성으로 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대답은 별다른 변별점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김근 : 선배 동인들과의 차이를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인지 문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문학사에서 동인운동은 근대문학의 태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50년대 후반기 동인들의 모더니즘 운동이 있었고, 70년대 80년대 <반시>, <오월시>, <삶의문학>, <시와경제> 등은 문학이 이 땅에서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를 제공했습니다. <시운동>은 80년 문학이 낳은 역효과에 대한 대응으로 보여집니다. 그들 역시 그런 방식으로 80년대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시힘>은 이른바 민중적 서정시로서 우리 문학에서 무척이나 확고히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21세기 전망>은 90년대 이른바 우리 문학의 변화의 시기에 문학의 한 고민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인지 운동은 우리 문학의 이론과 이념을 제공하기도 했고 엄혹한 시대에 권력에 의해 매체가 사라진 자리에 매체를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선배들의 동인지 운동은 우리 문학에서 굉장히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동옥 시인이 이야기한 대로, 동인들의 문학운동이나 전략이라는 것이 과연 2000년대 가장 젊은 동인들에게 합당한 용어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동인들은 어쩌면 운동과 전략을 하지 않기 위한 동인이지 않을까요? 전시대 동인들의 운동과 전략이라는 것은,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상황이 있었지만, 제도에 반발함으로써 제도에 진입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운동과 전략이란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불편>의 경우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경계심이 처음부터 팽배했습니다. 동인 자체가 제도화되고 권력화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심이나 반성을 공유했던 탓인지 ‘하나의 지향성을 가져야 된다’거나 ‘그 지향성을 이론화하고 실천해야 된다’는 개념은 저희에겐 아예 없었습니다.
<인스턴트>도 2006년에 동인특집을 하면서 동인에 대한 자각을 했다는데, ‘불편’이라는 이름도 나중에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동인 이름이 ‘불편’이 된 것은 2004년의 일입니다. 함께 동인 모임을 하고 있는 게 문인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이름이 뭐냐고 묻는 일들이 잦아졌고, 그냥 얼버무리기엔 ‘불편’한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 게다가 그 즈음 동인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결국 동인지는 출판사 사정에 의해 나오지 못했죠.). ‘불편’이라는 이름은 동인 초기에 안현미가 제안했던 이름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인들끼리 여러 이름의 후보를 들고 얘기해본 결과 ‘불편’이 우리 동인 이미지에 가장 적확하다고 결론이 났죠.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저는 한동안 그 이름이 ‘불편’해서 입 밖에 내는 걸 쑥스러워했습니다.(웃음)
생각해보면 ‘불편’이라는 이름은 조금 사적으로 느껴집니다. 세상에 대해 절망의 태도도 아니고 희망의 태도도 아닌 겨우 불편함을 드러내는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섣부른 희망이나 절망이 세계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 불편함은 문학제도에 대한 불편함이기도 합니다. 문학제도 역시 우리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겐 다양성과 동인 각자의 개별성이 중요했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각자의 색깔로 시를 쓰는 동인들은 각자가 가진 시적 문제의식의 아주 조금씩의 교집합만을 동인에 두었고, 그 교집합을 통해 동인 안에서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죠. 사실 동인으로 뭘 해보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혹자는 그게 무슨 동인이냐고 반문했었고, 젊은 동인들이 점점 취미집단화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평론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선언이 없습니다. 다만 불편해할 뿐이죠.

김언 : [현대시]로부터 질문지를 받고 나서 동인들끼리 따로 모여서 의논하지는 못하고, 천몽 카페 게시판에 올려놓은 후 댓글을 다는 식으로 의견을 모았더랬습니다. 대체적인 의견은 앞서 동인 활동 상황을 얘기하면서 말씀드렸고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동인 한 분이 전화상으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문예사조로서의 문학운동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했습니다. 동인을 통한 혹은 유파를 통한 거시적인 문학운동은, 영원히는 아닐지라도 한동안은 끝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의 두 동인도 마찬가지지만, 동인이라고 해서 하나의 에꼴로 묶는 것 자체가 시대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사실, <천몽>을 포함하여 2000년대 동인을 이루는 시인들 대부분이 거대담론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성장기를 보낸 시인들입니다. 혹은 아예 거대담론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를 시작한 시인들입니다. 그들에게 거대담론은 이미 과거이거나, 절실하지 않은 남의 세계입니다. 이들에게 거대담론 혹은 일정한 방향을 지닌 담론과 시를 이어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어색합니다.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말인데, 그런 점에서 동인의 탄생과 그 모임의 성격도 과거의 동인들과 달리 조금 더 느슨하고 조금 더 개인적이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천몽> 역시 시작할 때부터 그 점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천몽>에는 문학적인 합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시에 대한, 문학에 대한 <천몽>의 유일한 합의점은 ‘합의하지 않는 데 있다’ 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스무 명 가까이 모여서 동인을 하는데 얼마나 그 세계가 넓겠습니까? 넓고 다양한 만큼 동인 각자의 미학적인 새로움을 찾아가는 것이 <천몽>의 특성이면서 또한 시대적인 요청이 아닐까 싶네요. 각자의 문학적 대안은 존재할 수 있지만, 일정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해 고민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2000년대 시동인들은 내면적으로 이미 문학에 대해서 집단적인 ‘방향성을 가지자, 경향성을 가지자’란 구호를 폐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젊은 시인들에게 일정한 문학 운동이 부재한 것을 아쉬워하는 얘기가 들립니다. 운동이 없는 것 자체가 젊은 시인들에게 더 적합한 옷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의 우려이겠지요.
일부 비평가들의 경우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동인이 아니더라도 굳이 일정한 유파로 묶어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하나로 묶이지 않는 시인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니 자꾸 오류가 생길 수밖에요. 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서로 다른 속성으로 뭉친 시인들을 하나의 노선이나 경향으로 파악하려면 아마도 판판이 실패할 것입니다.
2~3년간 시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래파 담론도 그런 실패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 명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간에 유파로 묶어서 파악하려고 하니 들어맞지 않는 것이고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가열되었던 셈이지요. 일부 언론과 비평가들이 미래파를 마치 하나의 유파처럼 묶고 나서 그들의 공통점으로 든 단어가 ‘난해시’였다는 사실은 이 논쟁이 얼마나 시적으로 허약한 토양에서 시작된 논쟁인가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난해시’가 그토록 ‘쉽게’ 하나의 유파를 대변하는 단어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여기에 대한 얘기는 또 쓸데없이 길어질 것 같으니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3. 동인 활동을 통해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는가

이재훈 : 아마 앞선 질문과 공동선상에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전 세대의 동인 활동을 보면 그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새로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운동>, <시힘>, <시와경제>의 80년대 시동인이라든지 <21세기 전망>, <슬픈시학>, <오늘의 시> 등의 90년대 시동인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90년대 시동인을 통해 신서정을 얘기하기도 했고, 키치 세대의 탄생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시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얘기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2000년대 동인들의 활동은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을까요? 김언 시인이 이어서 이야기해주시죠.

김언 : 되풀이해서 얘기하지만, 일단 동인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문학적 성취를 거부하는 것이 <천몽>의 분명한 성격입니다. 그리고 동인 내부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지향점을 동인 전체의 이름으로 확대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집단적인 문학 운동은 물론이고 문예사조에 육박하는 거시적인 새로움을 노리는 동인들도 저는 없다고 봅니다. 대신 저마다 미시적인 새로움을 찾아서 각자의 시세계를 더 파고들어갈 수 있고 그럴 만한 미학적인 틈이 각자의 시 앞에 분명히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시적인 새로움에 자신의 문학인생을 걸고 투신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말도 되지요.
만약 동인 차원에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기획한다면, 단순히 선언뿐만 아니라 동인지가 반드시 필요해집니다. 새로운 문학 운동을 동인들 전체의 시로 일정 부분 증명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동인지가 불필요한 시대입니다. 제도권 내부의 시단, 특히 젊은 시인들만 놓고 보자면 분명한 사실이죠. 동인지가 불필요한 이유는, 일단은 제도권 내부의 발표지면이 풍족하기 때문이고, 조금 더 파고들면 시인들 스스로 자기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 동인지를 내봤자 모래알을 모아놓은 것일 테니까요. 여느 시 전문지의 구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지요.
한국 근현대 시사詩史에서 ‘동인 문학’은 ‘동인지 문학’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서히 ‘동인 모임’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 성격의 변화 자체가 어쩌면 2000년대 동인들의 유일한 새로움이 아닐까요? 얼른 눈에 띄는 집단적인 새로움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각자가 서로 다르기를 열망하는 2000년대 문학의 지반을 이루는 새로움이 현재 변화해가는 동인들의 성격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김근 : 김언 시인이 말한 것처럼 문학적 새로움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 추구해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인이라는 하나의 색깔로 묶이기보다는 동인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저희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오히려 동인 각자의 문학적 새로움이 동인의 새로움을 결정짓는다고 할까요?
‘불편’에는 선언이 없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죠? 선언이 없는 게 선언이죠. 선언은 없지만, 동인 안에서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 서로 존중되고 소통할 수 있고, 자극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저희는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문학적 새로움이라는 것도, 그 속에서 각자가 추구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합평 과정에서 따뜻한 옹호와 생산적 비판은 물론 있었지만, 그것이 동인 이름으로 강요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동인 각자에게 <불편>의 위상이나 색깔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저희 동인끼리 이미 공유하는 바죠.

신동옥 : 형들의 답과 비슷합니다만, <인스턴트> 역시 비슷한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답이라는 것이 동인 활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노출한다 해도요. 사史적으로 <시운동>, <시힘>, <시와경제> 등이 활동한 80년대와 같은 경우에는 동인지시대였고, 동인 활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명백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치사회적인 여건으로 잡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 발표지면의 부족 자체가 동인 활동을 지탱시할 수 있었다는 점을 먼저 짚을 수 있겠습니다. 동인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천차만별입니다. 동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자기 나름의 미적 선언들을 걸고 시작한 경우, 어떤 전문가 집단에서 시를 여기나 집단취미로 표방하고 시작했다가 기성이 된 경우, 가장 절망적인 경우에는 문학적 에꼴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앙가주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시에 이데올로기를 싣고 사회의 부름에 답하려 한 경우도 있지요. 80년대 동인들이 남긴 성과는 극명합니다. 획일화되고 획일화를 지향하는 문학사에, 또 격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 동인 활동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학적 다양성을 입증했다는 점입니다. 시단도 하나의 사회문화적 공동체이니 말입니다. 90년대 시동인의 경우 80년대 문학에서 종개념으로 후퇴했던 개별적 시적 자아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드러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동인들이 처음으로 올곧은 ‘개인―개인성’에 눈을 돌립니다. 형들도 90년대 후반에 등단하셨는데, 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선배들의 작업을 시단 안팎에서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만개시킨 것 같습니다.
사史적인 연장선에서 2000년대 이르면, 너희들은 어떤 선언을 통해서 동인 활동이란 이름으로 시사에 새로움을 줄 수 있느냐는 물음이 질문 자체로 하나의 답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새로움 자체가 새로움이니, 동인 활동을 통해서 새로움을 줄 수는 없는 상황이 된 거죠. 저희 세 동인에서 이름을 떼고 그냥 A동인, B동인, C동인이라 불러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저는 이 아이러니가 시사에 어떤 안티테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90년대와 연속성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반反―동인 활동이라는 점, 즉 복수인칭으로 활동해 나가면서 서로간의 암묵적이고 느슨한 미적인 합의나 연대가 있을 뿐……. 그게 결정적인 차이 같습니다.

이재훈 : 연이어 이야기하면, 저도 좌담을 구성하고 준비하면서 회의적인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이전 동인들과는 태생이나 상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통해 그 ‘다름’을 듣는 기회가 되어서 더욱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동인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전과 다른 것을 ‘다르다’고 막연하게 말할 수도 없고, 반대로 역사적인 동인의 맥락이 있기 때문에 그 흐름을 피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죠. 지금까지 각 동인들께서 이전 세대와 다르다는 지점을 짚으면서 지금 현 동인의 정체성을 말해왔습니다. 지금 제기된 정체성은 선언이 없는 동인이나 모임 형식의 동인이 될 텐데요. 이처럼 동인의 정체성을 많이 말해 주시는 것이 그간의 평론가들이나 선배들이 암묵적으로 바라보는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죠. “쟤들이 모여서 권력화라려고 한다, 에꼴을 만들려고 한다”는 식의 시선과 동시에 “새로운 목소리나 담론을 내야지”란 식의 강요들이죠. 이런 암묵적인 강요들에서 자유롭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현 동인들이 분명 이전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현 동인들에 대한 비판적 점검과 동인 활동의 허와 실

이재훈 : 이전 세대의 동인들이 운동의 차원에서 새로운 문학담론의 생산과 세대교체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지금의 동인들은 그 역할의 차원이 줄어든 게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굳이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필요성이 있는가. 동인의 필요성이 설득력을 잃은 지금의 시점에서 동인 활동은 새로운 섹트주의나 에꼴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동인 참여자의 개개인도 자신이 활동하는 동인이 친목단체의 역할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시인도 있습니다. 지금의 동인이 한국 시단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나 의미, 기대 등등이 궁금하고요.
하나의 예를 들자면, 2002년 [현대시]에서 동인특집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시원>과 <천몽> 동인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시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문조사를 보면 대부분이 동인이라는 집단의 이름이 아닌, 개개인의 이름으로 호명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합니다. 새천년 벽두부터 이전 세대와 다른 이와 같은 생각 때문에 동인 활동의 위축이라든가 하는 용어가 나오기도 한 것이죠. 그럼에도 동인 활동을 계속해나가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이고, 동시에 단점 또한 있을 것입니다. 동인 활동을 통해 얻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김근 : 과연 그렇다면 동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요, 전 동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동인을 하는 이유는 이미 문학제도가 너무 공고해 이 문학제도 안에서 소통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미래파 논쟁을 다 지켜봐서 아시겠지만, 미래파 논쟁은 생산적인 시적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한 채 미래파로 거론되는 시인들과 미래파 바깥에 있는 시인들에게 상처만 주고 끝이 났죠.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미래파 논쟁의 한 실패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죠. 이처럼 제도 안에서 소통할 수 없다면 동인이라는 모임 안에서 각자의 문학적 지점들을 존중하면서 우리끼리라도 소통하겠다는 것이 저희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통의 성과들이 개개인의 작품으로 드러나게 하겠다는 것이죠. 
단점에 대해서 물어보셨는데, 저희들이 상처받은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불편>이 세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건 2005년 발발한 미래파 논쟁 이후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과정에서 ‘불편⊂미래파’라는 수식이 암암리에 유포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다. 그러나 <불편>에는, 평론가에 따라 물론 달라지겠지만, 이른바 미래파에 이름이 들어가는 시인도 있고 들어가지 않는 시인도 있습니다. 미래파를 가지고 <불편>을 설명하기에는 폭이 너무 협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내부에서 상처를 받았죠. 그 덕에 유명해진 시인들도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구설에 휘말리거나 상처를 받기도 했죠.
그리고 당시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나왔습니다. 저희 동인들의 첫 시집들도 대부분 그때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문단의 태도는 “이 젊은 시인들이 어디서 나왔지?”였습니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등단해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소위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주요잡지들이 이 시인들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죠. 그전까지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시집이 쏟아져 나오자 마치 새로운 종족이 탄생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젊은 시인들을 서열화를 하며 분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젊은 시인들 각자의 시세계가 지닌 색깔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색깔인 것처럼 다뤄졌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젊은 시인들이 유행을 따른다는 비판도 심심찮게 등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불편>은 우리가 미래파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서 언급되는 것에 대해 거부합니다. 미래파 이후 저희 동인 이름이 자주 언급되면서 이러저러한 잡지에서 동인 특집을 하자고 제안이 들어왔었는데, 거의 거절했습니다. 몇몇 잡지나 매체에 동인 특집이 게재되었습니다만, 의도와는 달리 <불편>에겐 오히려 상처로 되돌아온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재훈 시인이 앞서 <천몽>과 <시원> 동인의 설문조사에 대해 말했듯 <불편>의 시인들도 동인의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기만의 작품세계로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동인들이 첫 시집들을 다 냈는데, 시집 약력에 동인 이름을 밝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죠. 저와 김경주 시인이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약력에 처음 <불편>이라는 이름을 넣었습니다.

김언 : 밝히지 않았다고 다른 동인들이 기분 나빠하지도 않죠?

김근 : 예.

신동옥 : 저희는 안 밝히면 탈퇴해야 해요.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웃음)

김근 : 어쨌든 이런 ‘동인’으로 묶이며 받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신동옥 : 김근 형이 앞서 개별적인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상황이 젊은 동인들의 시운동을 더 필요로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잡지나 작품집을 보면 면식도 없고 개인적인 정보도 없는데 꼼꼼하게 읽게 되고, 읽고 나면 은연중에 이런 문제의식으로 작업들을 하고 있구나 하는 공통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변화의 일례입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새로운 징후나 새로운 감성이 나오면 그것을 이론화시키려는 작업들이 뒤따랐고, 시적 합의를 거쳐 정리되었어요. 그러한 작업이 서로의 교조적 입장 차이를 재확인하는 데 그친 것이 금방 말씀하신 미래파 논쟁입니다.(물론 비록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을지라도 미래파 논쟁은 작금의 시단에 분명 살을 찌운 부분이 있어요) 결과적으로, 어떤 새로운 징후들이 나타났을 때 이를 이론으로 봉합하기가 버거워진 상황, 감성적 공감대를 끌어내는 데에도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죠.
동인 활동은 우리가 전유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적 감성과 징후를 어느 정도 소통하게 만드는 계기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동인’이라는 개념은 초기 낭만주의 때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개별자들이 한꺼번에 묶이면서 개체―집단으로 명명되는데, 이들이 살롱 같은 데서 교우하고 서로 쓸거리를 나누고 때로는 마음이 맞으면 함께 쓰기도 하던 초기 낭만주의의 느슨한 집단의식(esprit de corps)을 가진 문학적인 담지자들의 모임이 바로 동인입니다.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 저희들이 하고 있는 활동은 순수한 의미로 이런 의미의 동인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와 같은 동인 활동으로 다시 ‘우리’라는 개념을 재정리할 수 있는 활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소박한……. 왜냐하면 지금의 시인들은 유파를 떠나 개별자이며 복수인칭으로 존재하니까요, 안도 없고 밖도 없는 시인 사회에서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들쭉날쭉 견강부회하며 함께―각자 쓰면 종국에 서로 지친다는 단점이 있어요. 어떤 선배님이 제가 동인 활동을 한다니까 말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더군요. “나는 내가 피우는 담배와도, 내 자신과도 동인을 못하는데 너희는 여섯이서 몰려다니는구나.”(웃음)

김언 :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는 문단 체제와 문학 동인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문단에서 문학 동인이 융성하던 시기는, 달리 말하면 동인지 문학 운동이 왕성하던 시기는 역으로 한국 문단이 곤경에 처하거나 뿌리가 약했을 때입니다. 즉 문학의 제도화가 정착되지 않았거나 흔들릴 때 동인지 문학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920년대 근대문학 초창기, 해방 후에서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1980년대 신군부에 의한 언론 통폐합으로 영향력 있는 잡지가 폐간되던 시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문학의 제도화가 과거 어느 때보다 공고해진 시기입니다. 동인지 문학은 제도권 문학이 약해졌을 때 활성화되는데, 제도권 문학이 강성해진 지금은 동인지 문학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의 필요성조차 절실하지 않지요. 제도권 내부에서의 경쟁, 혹은 제도권 내부로 더 깊숙이 진입하고자 하는 경쟁만 남고, 제도권 자체를 대신할 만한 문학 운동이 힘을 쓸 여력도 필요성도 없어진 시기인 셈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문학 동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얼마나 될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상 할 일이 없죠.
특히 시단의 상황만 놓고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시단의 경우 제도권의 정점에 위치하면서 제도권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를 지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비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입니다. 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등단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집의 출간입니다. 그런데 자비 출간인 경우를 제외하고 시집을 내는 결정권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바로 메이저 잡지의 편집위원들입니다. 이 편집위원들의 대다수가 비평가이고 동시에 대학교수입니다. 대학교수이면서 비평가인 그들이 호명해줘야 시집을 낼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인이 갑이 아니라 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며, 오히려 을이 되기 위하여 애를 써야 된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영광스러운 을이 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까? 외롭게 자비 출간하는 갑이 아니라 누군가 호명해주어 시집을 내게 되는 행복한 을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제도권의 정점에 비평가와 대학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시인들조차 제도권 내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대학을 나왔고, 국문과나 문창과를 다녔고, 일부는 석박사 학위까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비평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즉 호명을 하는 사람이나 호명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제도권 내부에 있다는 것이죠. 현재의 시인들에게서 대학이나 비평가의 관여를 제외한 흔적을 찾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며, 그들에게 제도권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주문이 불가능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내부에 있으며 내부를 떠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대학이 문학을 점령해버렸고 비평가가 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마당에 시인들끼리 모여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기획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런 기획을 원하는 시인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끊임없이 모입니다. 사소하게는 술자리를 통해서 다르게는 어떤 계기를 갖기 위해서 모임을 만들어내는데, 그중 하나가 동인이라는 형태일 겁니다.
제도적으로 무력한 시인들이 무력하게 모여서 무엇을 모의해야 할까요? 무슨 얘기를 하고 무슨 합의를 끌어내야 할까요? 그것은 합의도 아니고 기획도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모임은 강단 비평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제도권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인들의 생각이 토로되는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흘러나온 이러저러한 얘기 전부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비록 지면으로 발설될 기회가 없더라도 시인들끼리의 소통, 좀 더 정확하게는 뜻이 맞는 시인들끼리의 소통은 수면 아래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을 겁니다.
가령, 미래파 담론이 시단을 휩쓸고 있을 때 시인들끼리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분명 달랐습니다. 비평에서 시작하여 비평으로 끝난 담론이고 논쟁이지만, 지면 밖의 시인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분열되는 얘기는 그 자체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런 얘기들조차 없다면 언론이나 잡지에서 떠들어대는 담론들만 수동적으로,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죠. 비록 제도권 내부에 있더라도 제도권의 정점에서 강조하는 것과는 조금씩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작업이 한국 시단의 또 다른 이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시인들의 ‘동인 모임’은 한국 시단의 전면이 아니라 이면을 움직이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5. 동인 활동과 창작과의 관계

이재훈 : 이제 조금 편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죠. 문학 동인이 비슷한 문학적 성향이나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동인 활동을 통해서 서로 문학 경향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동인 활동의 시작은 보통 시합평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 경험으로는 동인 초기에는 시합평을 열심히 하지만, 조금 지나면 시들해지죠. 각자의 길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할까요. 각 동인들은 시합평을 하고 계신지 궁금하고요, 시합평을 통해서 작품창작에 끼치는 영향은 없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아니면 시합평이 아닌 다른 활동을 통해 시적 영향력을 받는지도 알고 싶네요.

김언 : 이제 거의 시합평을 할 시기는 지나가지 않았나요? 적어도 <천몽>의 경우엔, 시집 한두 권씩을 낸 다음부터는 각자의 길이 정해진 것 같습니다. 동인 차원에서 시인 각자의 길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시적으로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던 2000년대 이전의 동인들도 서로의 시를 구속할 명분이 약했는데, 지금처럼 문학적인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합의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누가 뭘 써도 상관할 바가 아니죠. 그럴 필요도 없고요. 오히려 누군가의 시를 내가 못마땅해 하더라도 또 누군가 나의 시를 못마땅해 하더라도, 그 못마땅함까지 껴안고 더 파고 들어가는 것, 각개 격파해 나가는 것이 <천몽>을 포함하여 지금의 시동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김근 : 모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게는 작품 활동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동인 활동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다시 문단으로 진입할 때 가지고 있던 불확실성이나 작품에 대한 불안감이 동인들의 따뜻한 옹호와 응원 속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저희는 합평회를 길게 한 편입니다. 3년을 2주에 한 번씩 만나서 계속 합평을 진행해왔으니까요. 나중에는 지쳐서 그만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극도 받고 새로운 작품을 쓰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불편>의 다른 동인들도 아마 그랬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그런 작품 합평은 하지 않지만, 문학적 소통의 장은 열어두고 있습니다.
요즘은 동인 안에서 다른 고민들을 더러 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불편>에는 시와 다른 장르와의 소통에 주력하는 문화적 작업들을 진행해온 시인들이 몇 명 있습니다. 안현미, 이영주, 김경주, 저는 작가회의에서 ‘항구문학의 밤’이라는 행사를 2년여 동안 기획하고 진행해왔습니다. 이 행사는 우리나라 여러 항구들을 찾아가 시인들의 시에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결합해 함께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김경주는 ‘추리닝 바람’이라는 문화집단을 이끌며 문학뿐 아니라 희곡이나 문화공연 등 다방면에서 활동중이죠. 저는 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사무국에서 문학나눔큰잔치나 문학나눔콘서트 같은 공연들을 기획하는 작업들을 한 바 있습니다. <불편>은 앞으로 그런 다른 예술장르와의 소통 쪽에 관심을 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합의된 것은 아닙니다만,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한 공연 이후로 각자가 자극받은 것도 있고, 동인지를 굳이 책이 아닌 DVD로 내는 건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굳이 소통을 문학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장르와의 소통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어떨까 하는 고민들을 내부에서 조심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자극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동옥 : 처음에 이 질문을 받고서 저희한테 직접적으로 하는 질문 같았습니다.(웃음)

이재훈 : <인스턴트>는 지금까지 오래도록 합평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동옥 : 지금 여섯 명 외에도 같이 합평회를 갖던 아마추어 분들도 있었는데, 결국 그만두셨죠.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따라오지 못하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신 것이죠. 개인적인 성격에 따라 합평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것 같습니다. 자기가 얻는 게 있으면 하면 되고, 아니면 그만인 것이죠. 저마다 가진 문제의식을 존중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들더군요. 이미 아마추어도 아니고, 작품집을 묶었거나 묶어야 될 상황에서 남의 이야기는 곧이들리지 않죠. 저는 합평무용론자 중 한 명입니다. 모순이죠.(웃음) 굳이 합평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여 있는 순간의 에너지를 어떻게 느끼느냐가 관건이니까요.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공연했을 때 저희는 이제껏 합평했던 모습을 시나리오를 짜서 각자의 캐릭터대로 그대로 관객에게 보여줬습니다. 물론 사이에 미안할 정도로 망했지만요.(웃음) 소설동인이 시동인보다 적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는 짧고 직관적이고 감성적이죠. 또 개개인의 표면적인 기질이나 무의식적 기질까지 보여주죠. 그렇기 때문에 동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희 동인이 6~7년 동안 합평을 해왔다는 것은 문제가 심각해도 아주 심각합니다.(웃음)

6. 2000년대 활동하는 시인들의 일상과 시적 향방

이재훈 : 우리 젊은 시인들 삶의 주변을 한번 돌아보죠. 동인 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큰 것 중의 하나가 시인들과의 개인적인 유대라고 생각합니다. 동인을 통해 동시대 시인들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죠. 지금 제가 봤을 때, 젊은 시인들에게 참 힘든 문제가 생활입니다. 물론 이것이야 시인 개개인이 각각 알아서 헤쳐 나가야 될 문제이긴 하지만, 조금 억울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전 세대들은 시단에 순교하고 시에 인생을 바치면 당연히 생활이 따라 갔었죠. 지금은 시에 매진하라는 요구만 있을 뿐 그 누구도 생활을 책임져주지는 않습니다. 시인들의 일상 속에서 시가 가장 크지만 이십대를 지나 삼십대로 넘어가면 삶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정규직을 갖고 있는 시인이 우리 주변에 없기 때문에 다들 결혼도 미루거나 결혼을 했다고 해도 출산을 미루게 됩니다. 아예 결혼 자체를 생각지 않는 시인들도 많죠. 2000년대 활동하는 우리 주변 시인들의 일상은 어떠한지, 그리고 앞으로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어떠한 양상으로 개진될 것인지에 대한 예견을 나름대로 짚어주셨으면 합니다.

김근 : 다 힘들죠. 그런데, 이전의 선배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작가회의에서 특히 많이 느꼈는데요, 80년대 주로 활동하고 90년대까지 활동했던 저희 선배 세대들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생업이나 벌이에서 자유로운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부분 문학이 그들 삶에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생활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죠. 문학의 위상이 전에 비해서 높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희 세대는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그 일이 문학으로는 당연히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 소위 아르바이트, 교정이나 교열 같은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죠. 몇 년 전에 김경주 시인이 [한국일보]에 인터뷰한 기사에도 나오는 대필이나 심지어 야설 같은 것이라도 써서 먹고 살아야죠. 아무래도 시 쓰기보다는 먹고 사는 일에 치중하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동료 시인들을 보면 공부해서 학교에 자리 잡는 친구들이 더러 있지만, 그것도 녹록치만은 않죠. 한국작가회의에서 선배님들이 우리 때는 많이 모였는데 너희들은 왜 모이질 않느냐고 말씀하곤 하시는데, 사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다만 각자 일이 있을 때는 못 왔을 뿐이죠.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냐고 물으면 사실 저희 자신이 치졸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거죠.

신동옥 : 그 각자의 일이라는 게 들춰보면 별 일이 아닌데 본인한테는 긴박한 일이죠. 과외랄지, 학원 강의랄지. 본인에게는 생존과 관련된 것이니까요.

김근 : 그렇죠. 올해 들어 문예지개재우수작품지원사업도 없어졌죠.

이재훈 : 젊은 시인들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죠.

김근 : 저야 그 기간 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탓에 거의 수혜를 못 받았죠.(웃음) 문예지게재우수작품지원사업에 대해, 국가가 시인(그리고 소설가들)들 먹고 사는 것까지 책임져야 하느냐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는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문학에 대한 국가의 일종의 투자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시를 맞춰 쓴다는 식의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말들도 있었는데, 매분기 수혜자가 140여 명 되었는데, 그 140여 명이 그걸 받기 위해서 예심위원을 포함한 수십 명의 심사위원의 성향에 맞는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쨌든 갈수록 젊은 시인들에게는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문화나 복지 정책에 대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정부가 들어선 것도 우려스럽기도 하고요. 앞으로 시를 쓰는 것과 먹고 사는 것을 병행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신동옥 :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보기가 저희 동인입니다.(웃음) 이 시대의 젊은 시인들의 일상, 어떻게 먹고 사는가를 볼 때는 저희 동인들을 보면 되요. 저희 동인은 삼십대 중반에서 삼십대 후반, 다섯 명이 남자고 한 명이 여자입니다. 여섯 명 중에서 직업을 가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입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사는지 저희 서로도 잘 모릅니다. 길게는 7~8년을 보내왔는데도 말이죠. 심지어는 동인 활동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 역시, 서로의 생존―돈 벌이에 관련된 부분이에요.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두 달 동안 번역을 해야 한다, 두 달 동안 대필을 해야 한다, 학원 강의를 해야 한다하면 그 동안은 온전한 동인 모임이 불가능해요. 누군가 지방으로 가게 되면 당연히 동인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데, 저희는 한 명이 지방에 내려가 있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했거든요. 동인 활동의 가장 큰 장애가 다른 사람 돈 벌 때에요. 당장 저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웃음) 뭐 도와줄 방법도 없고요.
가장 곤혹스럽고 짜증나는 질문 중 하나가(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가장 편한 질문일 텐데) “요즘 너 어떻게 사니, 뭐 먹고 사니, 일은 잘 돼?”입니다. 할 말이 없죠. 그렇게 물어보는 분께 “예, 요새 집에서 시 잘 쓰고 있습니다. 한 달에 열 편 써요” 하고 대답할 수는 없는 거죠.(웃음) 눈물이 나는 이야기죠. 시집을 한 권, 두 권 가지게 되고 다른 문학적 지향점을 궁구하게 된다면 동인이 와해될 공산이 큽니다. 아무리 안개 속의 모래알 같은 집단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생존이 동인을 해체할 수 있는 아주 큰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삶에서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지만요) 나이를 더 먹어 언젠가 상상력으로 시를 쓰는 데 물리적인 임계치가 온다면 또는 다른 세계를 지향하게 된다면 곁에 서서 격려를 해줄 수 있겠지만 이 문제는 피할 수 없는, 피해서도 안 되는 현실이죠.

김언 : 두 분 얘기 듣고 있자니 새로운 천민계층이 출현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괜히 학력만 높고 사회적으론 전혀 쓸모도 없고 대접도 못 받고 있으니 말이죠. 예전에 어느 시인이 ‘시인은 정신적 귀족’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귀족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진 것 같습니다. 시인이라는 이력 옆에 가장 화려하게 붙을 수 있는 사회적 타이틀이 대학교수일 텐데, 그나마도 지금은 너무 드문 사건(!)입니다. 근근이 다른 직장을 다니기만 해도 대단해 보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시 쓴다는 것 자체가 지식자격증이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라도 되었는데, 지금은 학교 선생님 되기도 얼마나 힘들어요.

신동옥 : 그렇다고 저희 세대가 시를 쓰는 깜냥이나 자존감은 전 세대에 뒤지지 않는다고 봐요. 아마 전업시인이 제일 많은 세대일 겁니다.

김언 : 자존감은 높지만, 그걸 표출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게 안타깝죠. 전업 시인은 말 그대로 그냥 작품만 생산하는 사람일 뿐이죠. 예인藝人일 뿐이지 지식인 대접을 못 받는다는 거죠. 밥벌이가 안 되니까 당연히 결혼하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기가 힘들죠. 예전 같으면 자식들이 시인의 피를 이어가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죠. 혈통 자체가 사멸해가는 열등한 혈통이 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거나 기껏해야 자기들끼리 밥벌이를 챙겨주면서 연명해가는……. 새로운 천민 계층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거고요.

이재훈 : 새로운 천민계층의 출현이라는 말이 참 아프네요. 아무튼 젊은 시인들이 지금 고학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죠. 그나마 학위가 자격증이 되니까요. 제도적으로 전업문인들에게 할 일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타장르에서는 중고등학교의 예술강사 파견 등의 사업도 있던데요.

김근 : 문학큐레이터 제도 같은 것들이 지난 정부에서 논의되었던 것 같은데, 유야무야되었죠.

이재훈 : 그런 사업도 아이디어를 내서 활성화가 되면 젊은 문인들도 좀 더 용기를 갖고 문학에 매진할 텐데요.

7. 2000년대 동인의 의미와 전망

이재훈 : 문지문화원 사이에서는 토요일마다 동인들의 특집을 기획하고, 각 동인들의 이름으로 다양한 공연을 창출해 독자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스턴트> 이후 이렇다 할 만한 시동인은 없는 것 같은데요. 굳이 동인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도 이유이겠죠. 지면도 더 늘어났고, 젊은 세대일수록 각자 개성이 뚜렷해서 모이는 것 자체가 싫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동인 활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은지, 그리고 덧붙여서 더 젊은 후배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주세요.

김언 : 새로 등장하는 시인들이 동인을 하든 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각자가 ‘외로운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네요. 혼자 있어도 외롭고 모여 있어도 결국에는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요. 단수화된 ‘우리’를 거부하는 대신 복수화된 ‘나’를 선택한 대가로 그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공동체로서의 생활을 감내해야 할 겁니다. 거기서 발견하는 각자의 목소리가 각자의 문학이며, 각자의 문학이 제도권 내부로 불편하게 스며들 때 예기치 못한 균열도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당대의 문학 제도도 그렇게 부스러지면서 변해갈 거라 믿습니다.
한마디만 더 추가하자면, ‘동인은 동인으로 남고 시인은 시인으로 남는다’는 사실, 이 사실을 현재의 젊은 시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고 <천몽> 동인들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앞으로도 최대한 느슨해지기 위하여 모임을 이어갈 것 같습니다. 느슨함의 끝에 와해가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요. 다만, 서로에게 그리고 각자에게 찾아올 문학적 균열을 충실히 지켜볼 따름입니다.

김근 : 후배들의 각자 입장은 다르겠지만 많은 동인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동인들이 다양한 목소리와 색깔로 우리 시를 풍부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문학 제도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 우리 문학이 그 풍부한 다양성을 껴안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신동옥 : 형들이 좋은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덧붙일 말이 별로 없네요. 언제나 동시대인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좋은 심판자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한 세기 이상이 지나야 의미가 어렴풋이 드러나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김언 형이 말한 ‘복수화된’ 나들이 감내하는 외로운 공동체로서 시詩라는 장, 그 장을 따로 함께 살아내는 한 방편으로 동인 활동은 해결책 중 하나입니다. 자신을 책임지고 서로를 신뢰하는 것은 싸움 중에도 큰 싸움이니까요. 외롭고 처절하게 쓰고, 그 길에서 좋은 도반들 만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재훈 : 말씀 감사합니다. 시인축구단처럼 다양한 모임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반면 “시인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이형기 선생께서 하신 말의 의미도 함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좌담에 참여해주신 김언, 김근, 신동옥 시인 감사합니다. 술이나 마시러 가죠.

_ <현대시>, 2009년 3월호 게재.

이재훈 |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김근 |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으로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김언 |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숨쉬는 무덤>, <거인>
신동옥 |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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